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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2화
‘그런데 괜히 말해줬다가 기분 나빠하진 않으려나. 아니면 어린애의 실없는 소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영.”
“네, 넵? 넵!”
걸어가던 정영이 화들짝 놀라 련을 쳐다보았다. 련이 자신의 이름을 알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듯했다.
“보법 연습 해?”
“앗…… 죄송, 죄송합니다. 제가 아직 많이 부족해서…….”
정영은 두 배로 더 놀라 황급히 말했다. 주인을 수행하고 있으면서 딴짓을 한 셈이니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아니 아니, 뭐라고 하는 건 아니야. 그냥 그거…….”
련은 잠깐 말끝을 흐리다가 정영의 손을 놓았다. 여태 무공을 익혀본 적은 없었지만 평생을 무림 세가에서 살았다. 가문의 기본 보법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보통 몸으로 처음 선보이는 거라면야 발이 꼬이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지만, 련에게는 조화가 있지 않은가.
련의 발걸음이 유쾌하고 가볍게 움직였다.
“이건 그냥 적과 멀어지는 게 아니라. 잠시 몸을 피하지만 다시 나아갈 때 쓰면 좋은 동작이거든. 그래서 물러서는 왼발 뒷다리에 단단히 힘을 줘서 몸을 뒤로 뺐다가 앞으로 나갈 탄력을 얻는 식으로.”
“네?”
“왼발을 축으로 오른쪽 다리를 끌고 왔다가 다시 내뻗는 거니까 순간적으로 몸이 좀 기울어지는 걸 두려워하지 말고 움직이면 더 좋을지도 모르겠네.”
탁, 타닷!
정영에게서 한 걸음 멀어졌다가 다시 한 걸음 가까워지는 동작은 마치 어린애가 친척 어른에게 장난을 치는 듯이 가벼웠지만 그 발끝에는 묘리가 담겨있었다.
“아…… 아, 네! 새겨듣겠습니다.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영이 손을 맞잡고 꾸벅 인사했다. 련은 정영이 너무 순순히 나오자 도리어 머쓱해져서 뺨을 긁적였다.
‘하긴. 주인집 장손이 이래라저래라 하면 알았다고 하지 뭐라고 하겠어.’
괜히 말했나 하는 어색함과 후회가 들어, 련은 더는 말하지 않고 침묵했다.
다 둘러보려면 한 식경이 족히 소요될 넓은 장원인지라 두 사람이 조용히 재경각에 도착했을 땐 아침 해가 반짝 떠올랐다.
“지금…… 재경각 서고에, 말씀이십니까?”
“영하고 똑같은 말을 하네. 안 되는 거야?”
련이 웃으며 하는 말에 재경각주는 파드득 놀라더니 그녀의 손을 쥐고 선 무사를 쳐다보았다.
재경각주 설관희는 이제 겨우 사십이 넘은 중년이었으나 머리는 벌써부터 희끗하고, 반면에 얼굴은 주름 하나 없어 청년처럼 보이는 동안의 남자였다.
“아이고,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연히 들어가실 수 있지요. 있고말고요.”
재경각주는 열흘 전에 마지막으로 들어갔던 재경각 서고의 모습을 필사적으로 되짚으며 서고 쪽으로 련을 안내했다.
‘정리가 좀 되어 있던가? 아니던가? 아, 그때 서류를 대충 올려놓고 초일이 녀석한테 정리하라고 했던 것 같은데 이 녀석 정리는 잘했나?’
단목련은 이제 겨우 여덟 살, 눈을 뜬 지는 간신히 일 년이 될까 말까 한 어린애가 알아도 뭘 알겠는가 싶으면서도 괜히 불안하고 신경이 쓰였다.
련은 무슨 일이 있는지 알고 싶어 몸살이 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재경각주를 서고 문 앞에 세워 두고 안으로 들어갔다.
재경각주가 수탉처럼 목을 쭉 빼어 안쪽 눈치를 살피려 애쓰는 기척이 느껴졌다.
‘집안 돌아가는 꼴을 좀 알아야 뭘 해도 하지.’
집안에 망조가 든 건 이미 알고 있다.
가주 대행인 그녀의 고모 단목현요가 집에 붙어 있질 못하고 무림맹에 나가 있는 것만 봐도 알 만한 일이었다.
일어서려면 어디에 앉아 있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계란 위에 앉아 있다면 섣불리 일어나다가 다 깨지기만 할 테고 모래 위에 앉아 있다면 발이 빠질 테니까.
련은 크게 심호흡하고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 * *
“우리 누이…… 많이 아픈 거야?”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소년 두 사람이 단목련 처소 근처에서 안을 기웃거렸다. 처소를 지키고 선 무사 정영은 인기척을 느끼곤 그쪽으로 눈을 돌렸다가 어린 소년들이 속닥거리는 모습에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그것도 금방 흐릿해졌다.
며칠 전 이른 새벽, 단목련이 재경각에 들렀다 왔다.
다들 의아해했지만 곧 이해했다. 천자문을 거의 다 배워 간다고 하니 글자를 이것저것 읽어 보고 싶었겠거니, 라고.
문제는 그날부터 그 작은 소녀의 안색에 구름이 꼈다는 것이다.
미소는 흐려지고 웃음소리는 잦아들었다. 심지어 입맛도 없는지 식사량까지 부쩍 줄어 세가 안이 온통 비상이었다.
소녀의 어린 아우들까지 몰려와 숨을 죽이고 안쪽을 기웃댈 정도로 모두 걱정하고 있었다.
“매화를 꺾어 갈까? 그럼 꽃을 보고 누이 기분이 나아질까?”
단목비가 웅얼거렸다. 나뭇가지에 손도 닿지 않을 작은 키의 소년이 위로 목을 꺾을 듯 들고서는 꽃봉오리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매화나무를 쏘아보았다.
곁에 선 다른 소년은 시큰둥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네 키로는 꺾을 수도 없고, 아직 꽃이 피려면 한참은 더 있어야 해.”
“하지만 금목서는 주위에 이미 잔뜩 있는데.”
“그런 걸론 누이 기분 안 풀릴걸?”
“그럼 뭘 가져가야 해?”
“흠…… 아마도 전표 뭉치 같은 거.”
“전표? 그게 뭐야?”
정영은 소년들의 대화를 훔쳐 들으며 ‘전표’ 운운한 화륜을 흘끗 쳐다보았다.
어린아이치고도 커다랗고 또렷한 눈매와 이목구비에, 단목비와 나란히 두면 누구나 도련님 두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도련님과 하인이라곤 생각하지 못할 터였다.
듣기로는 우연히 단목련의 눈에 든 소년이었는데 아이가 무척 명석한 듯하여, 어려서부터 벗처럼 함께 키워서 측근으로 삼으려고 한다든가.
“전표, 그거만 있으면 되는 거야? 어디서 구할 수 있어? 어머니께 말씀드릴까?”
“그냥 해 본 말이야. 그걸 쉽게 구할 수 있으면 누이도 저러지 않을걸.”
“그럼 어떡해?”
“그러게 말이다…… 대체 왜 저러는 건지. 휴, 알 것도 같긴 한데…….”
탄식하듯 중얼거리는 나직한 목소리가 도무지 어린애의 그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정영이 화륜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한 건 화륜이 단목세가 안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하인 아이라곤 하지만 십 년, 이십 년만 지나면 가문 주축의 최측근이 되겠구나 싶어서 살펴보려는데 그 소년이 돌연 그를 홱 돌아보는 게 아닌가?
그러곤 눈을 깜박거리지도 않고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위아래로 훑더니, 흥미가 다한 듯이 스르르 고개를 돌리는 것이다.
그 뒤로 소년은 단 한 번도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이 정영의 가슴속에 묘하고 서늘한 잔상을 남겼다.
“이건 뭐 방법이 없네. 일단 천자문부터 외우는 게 낫겠다. 너, 천자문은 다 외웠어?”
“어? 아니…… 아직…… 륜이 형은?”
“나도 너만큼만 했어. 지금은 천자문이나 빨리 외우러 가자.”
“하지만 누이가…….”
“네가 천자문을 다 외워서 태상가주님께 검술 배우면 누이도 자리 털고 일어날 거야. 그걸 제일 기뻐할 테니까.”
“정말?”
“네가 천하제일인이 되면 누이는 기뻐서 춤도 출걸.”
“정말, 정말? 그런데 내가 천하제일인이 될 수 있을까?”
“글쎄…… 쉽지는 않을걸?”
정영은 멀어지는 두 소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천하제일인이라…… 자신에게도 그런 꿈이 있었던 날이 있었다. 그날이 왠지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정영은 문득 재경각에 들렀던 그 날을 떠올렸다.
그 새벽녘에 단목련은 그의 보법을 보고서 이리저리 일러주었었는데, 사실 정영은 그에 대해서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세가의 적손이 자기 가솔들에게 한두 마디 하는 걸로 일일이 마음 상해서야 이런 일을 계속하기도 힘들다.
다만 그 뒤로는 왠지 눈치가 보여서 한동안 보법 연습을 따로 하지 않았더랬다. 정영은 자신의 발끝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 * *
련은 침상에 대자로 뻗어 누웠다.
‘으흐흑…….’
그러곤 도로 엎드려 팔에 고개를 묻었다.
‘이걸 어쩌면 좋아?’
잠이 안 온다.
매일매일 쌓이는 영기 쓰며 명줄 연장하는 것에 몰두하던 나날이 꿈같을 지경이었다.
재경각을 한번 훑어보려고 했던 건 반은 충동적인 결정이었는데, 집안이 이 정도였을 줄이야…….
세가에서 직접 운영하던 가게들은 이제 두 손으로 셀 수 있을 만큼 개수가 줄었고, 세가 소속의 유성 표국은 먼 옛날 신강 너머까지 발을 뻗었던 일이 마치 거짓말인 것처럼 규모가 축소되었다.
작금에 와서는 표국에서 절강성 밖으로 나가는 일이라곤 하남성과 섬서성으로 오가는 표행밖에 없는데, 그것도 하남성에는 무림맹이 있고 섬서성에는 위지청의 오라비가 화산파에 있기에 오가는 듯했다.
급전이 필요할 때마다 전답도 처분해 왔는지 가지고 있는 땅도 20년 전에 비해 반토막이 났고, 과수원의 나무들은 시든 지 오래요, 세가 내 의각은 반으로 쪼개져선 반은 항주의 호선의각(湖仙醫閣)에 흡수되고 약당만 남았다.
세가에서 3년마다 제자를 받던 것도 지난번 차례는 걸렀다.
새 제자를 받기보단 있는 제자를 잘 간수하기로 한 것이다. 왜냐고? 지금 세가의 규모를 더는 유지할 수 없으니까.
그렇게 인원은 감축되었고 세가에서 애써 키운 무사들은 움켜쥔 모래알처럼 스르륵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