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3화
밀물을 보면 바닷물이 차오르는 걸 알 수 있지만 이걸 막아 보라고 하면 방도가 생각나지 않듯이 지금 련의 상황이 딱 그랬다.
자신의 처소를 지키던 무사 정영의 정체도 알았다. 그는 장차 세가의 정예인 유성십팔숙 중 한 자리를 차지할 예정이었는데, 인력이 부족하다 보니 그가 빈자리를 어떻게든 메우고 있는 것이다…….
“돈? 돈인가?”
역시 돈인가?
련은 자신이 안일하게 생각했다는 걸 인정했다.
자신은 살아 있는 영약이고 단목비는 천하제일이 될 자질을 가지고 있으니 가세를 일으키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거라 여겼다.
단목세가가 기울어 가는 건 태상가주 단목천기의 낫지 않는 부상과 소가주였던 단목현성의 사망 때문이었으니, 이건 단목비가 무림인으로 이름을 떨치면 자연히 해결될 문제였다.
튼튼하고 젊은, 살아 있는 천하제일인을 가진 가문이나 문파가 번창하지 않기도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가문 꼴을 보니 단목비가 다 자랄 때까지 버티지 못할 것 같다.
‘그래, 맞아. 내가 본 미래에서도…… 그렇게 버티지는 못했잖아…… 내 약값이 좀 컸다고 쳐도.’
단목비는 몸이 약한 누이를 어떻게든 돌보려고 애썼고 집 안팎의 어렵고 힘든 일은 티 내려 하지 않았지만, 이제 와 돌이켜보면…….
련은 흐릿한 기억을 애써 쥐어짜 보다가 털썩 몸에서 힘을 뺐다. 지나온 미래가 어쨌다 저쨌다 하는 건 이제 와서 소용없는 일이다.
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돈을…… 돈을 벌어야 해.”
다른 세가들이 단목천기와 같은 경지에 다다른 고수가 없으면서도 지금의 단목세가보다 윗줄에 있는 이유가 있었다.
단목천기 정도의 고수는 아니어도 사지 멀쩡하고 아픈 곳 없으며 적당한 수준의 고수들과, 그리고 돈!
돈이 있으니까!
즉 지금 단목세가에 필요한 것도 돈이었다.
돈이 있어야 제자를 받고, 그 제자를 키우고, 가세를 키울 수 있지 않은가!
련은 울적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 작은 몸으로 대체 어떻게 돈을 벌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했다.
* * *
무림 세가라면 제각기 의약당을 꾸려 운영하기 마련이다.
매일 고된 훈련을 하고 대련을 하는 집단이니만큼 약의 수요도 많은 게 당연했다.
해서 금창약 같은 것들은 이름 높은 의방이나 의각이 아니라 무림 세가나 문파에서 만든 것을 제일로 치는 것이다. 수천만 번의 임상시험으로 검증된 치료약이니 오죽할까?
단목세가에도 약당이 있다. 가세가 기울기 시작한 몇십 년 전부터 의각에서 분리된 약당.
당주인 단목현우마저 얼마 전까지 모든 걸 팽개치고 폐관 수련만 한 차라 그 약당마저 비실거리고 있긴 해도.
“어찌 이리 얇게 입고 와!”
단목현우가 해가 뜨기 전부터 약재실을 둘러보며 약당을 살펴보던 것도 그간 약당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이다.
그러다 약재실 밖에 손님이 왔다며 나갔더니 어린 조카가 얇은 침의 위에 털조끼 하나만 덩그러니 걸친 채 그를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찬바람에 코끝이 발갛게 물든 채로.
곁에 서 있는 호위 무사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니 조끼는 그의 것인 듯했다.
화들짝 놀란 단목현우가 얼른 자신의 피풍의를 벗어 련을 둘둘 감싸고는 번쩍 안아 들었다.
“이 새벽에 이렇게 얇게 입고 돌아다니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 아니, 여기에 내가 없었으면…….”
“엣취!”
뭐라 말을 덧붙이기도 전에 련이 재채기를 한 통에, 단목현우는 말 얹기를 그만두고서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약재를 보관하고 있는 곳인지라 이쪽도 따뜻하지는 않았지만 바깥보다는 나았다.
“여기까진 어쩐 일로 온 것이야? 무슨 일이 있느냐? 악몽이라도 꾼 건 아니겠지?”
단목현우가 조금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련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대답했다.
“재채기는 조끼의 털 때문에 한 거고, 온 건 천자문을 다 외워서요. 제가 글자 다 외우면 숙부가 상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뭐? 그렇다고 해도 오늘 낮에 수업을 할 때 와도 되는 것 아니냐.”
“혹시라도 저만 상을 받으면 비아나 륜아가 속상할까 봐서요…….”
련의 말에 단목현우는 잠시간 눈을 깜박이다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피풍의가 련의 이마까지 덮도록 다시금 꼼꼼히 감싼 뒤에 자신의 처소로 향했다.
하인에게 난로의 불을 강하게 지피도록 숯을 가져오라 한 단목현우는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열어 둔 창을 전부 닫고, 눈치 좋은 하인이 가져온 탕파(손난로)도 련의 품에 넣어 준 다음에야 련의 맞은편에 앉았다.
“약속은 약속이니 천 자를 다 외웠는지 보자꾸나.”
그러곤 조용히 붓을 움직여 천자문에 쓰여 있는 내용 중에서 무작위로 몇 가지를 적어 련에게 내밀었다. 련은 차분히 그가 내미는 것들을 읽었다.
“과진이내 채중개강(果珍李柰 菜重芥薑), 과일 중에서도 맛있는 건 오얏과 능금이고 채소 중에서 중한 것은 겨자와 생강입니다. 지과필개 득능막망(知過必改 得能莫忘), 잘못이 있으면 필히 고치고 배운 것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망담피단 미시기장(罔談彼短 靡恃己長), 다른 사람의 단점은 말하지 말고, 자신의 장점을 믿지 말아야 합니다.”
“…….”
단목현우는 놀라움이 역력한 얼굴로 련과 자신이 쓴 글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무작위로 쓴 것이니 천자문을 다 외웠다는 말은 정말인 것 같았다.
혹시 몰라서 구절 몇 개를 더 썼지만, 그의 조카는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또박또박 읊조렸다.
“아…… 벌써, 대단…… 대단하구나. 굉장하다. 아주 장해. 그래, 소원이 무엇이니? 뭐든 들어주마.”
이제 깨어난 지 한 해도 되지 않은 조카의 소원이야 못 들어줄 게 무어 있겠는가? 하물며 조카의 명석함은 그의 큰 기쁨이기도 했다.
련은 그를 올려다보며 방긋 미소 지었다.
“약당에서 조그만 걸 만들어 보고 싶어요.”
“뭐? 약당에서?”
“네!”
* * *
다른 애들이 서운해할까 봐, 라고 핑계를 댔지만 련은 자신의 말을 스스로도 믿지 않았다.
누이라면 좋아서 날뛰는 단목비는 누이가 벌써 글을 다 외워 숙부의 칭찬을 받았다며 제가 더 기뻐할 게 뻔했고 화륜은…….
‘이런 거 진짜 조금도 관심 없는 게 분명하고.’
그 앤 대체 뭐가 문제지?
련은 속으로 끙 앓다가 떨쳐 냈다. 그러니까 그녀가 새벽바람에 단목현우에게 달려와 천자문을 다 외웠다고 한 건, 이렇게 아무도 없을 시간에 약당의 재료들을 훑어보기 위해서였다.
뒤에 선 단목현우는 영 얼떨떨한 듯 의아한 듯 기묘한 눈치였지만 련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돈을 벌어야 해. 지금 당장.’
어떻게 돈을 벌 수 있을까?
가장 간단한 방법은 여기서 뭔가를 만들어다 파는 것이다. 시장은 확보되어 있다.
여기는 절강성 항주.
옛부터 상유천당 하유소항(上有天堂 下有蘇杭)이라고 하여,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고들 하지 않나.
아름답고 화려한 도시에는 사람도 많다. 항주에서는 돈 자랑을 하지 말라는 격언도 있을 만큼 도시에 부자가 많았다.
부자가 많다는 건 좋은 물건이 나왔을 때 사들일 사람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럼 뭘 팔면 될까?
련은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고민했다. 일단 작은 게 좋겠다. 유통하기 편하기 때문이다.
만들기도 쉬워야 한다. 생산이 쉬워야 인건비가 적게 들 테니까.
원재료도 공급이 수월한 것. 그러면서 성능이나 효능이 우수해야 하고…….
그러다 머리를 번쩍 스치고 지나간 것이 바로 자신의 힘이었다.
대라신선이 와서 감탄할 정도의 약일 필요도 없다. 그냥 시중에 유통되는 것보다 조금만 더 효과가 좋은 정도이기만 해도 될 터였다.
진짜 약보다는 민간에서 많이들 쓰이는 것이 좋겠다, 해서 련은 처음에 도라지청을 떠올렸다.
도라지는 달리 백약(白藥)이라고도 하니, 백약청이라고 이름을 붙여서 팔면 어떨까?
자신은 요리엔 영 재주가 없긴 하지만 약이 맛이 없는 것을 누가 뭐라 하겠는가?
또 단목세가는 다들 흰 옷을 즐겨 입으니 이름도 딱 맞지 않은가.
하지만 단목현우를 따라 약당 약재실에 들어온 련은 자신의 생각을 접어야 했다.
“아…….”
일부러 심안을 쓰면서 약재 창고를 쭉 훑었더니 정리된 약재들 사이로 경쾌하게 정보가 떠올랐다.
이름과 선도가 함께 뜨는데 그중에 청명한 푸른빛인 건 아주 드물고 대부분은 보통 이하, 그리고 도라지 같은 건 아예 붉은빛으로 떴다. ‘하급(下級)’이라고…….
“숙부님, 여기 약재는…… 어디서 사 오는 거예요?”
“호선의각에서 약초를 나눠 받는단다. 세가에서 의각을 분리할 때 그리하기로 했지.”
‘호선의각? 거기가 문제야? 아니면 세가 안에서 재고를 처분 못하는 게 문제야?’
어찌 됐든 이 시든 도라지로는 안 만드느니만 못하게 되었다. 련의 얼굴에 그늘이 지자 단목현우가 어쩔 줄을 몰랐다.
“다, 다음에는 바깥에 있는 약초방에 놀러 가 보겠느냐?”
“그래도 돼요?”
거래처 문제면 반드시 족쳐서 바꿔 버려야지.
련이 내심 생각할 때였다. 그녀의 눈에 크지 않은 단지들이 밀폐되어 놓여 있는 선반이 눈에 들어왔다.
“어? 저건…….”
“정유(精油) 말이냐? 보고 싶어? 보여 줄까?”
련이 시든 도라지가 아닌 다른 곳에 관심을 가진다 싶자 단목현우가 얼른 단지 하나를 꺼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