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4화
“나무의 잎사귀나 뿌리, 씨앗 같은 것에서 짜낸 기름이란다. 이건 훈의초(薰衣草)에서 짜낸 기름인데 아주 향기가 좋아. 맡아 보겠느냐?”
그나마 기름들 상태는 상급이었다. 련은 반짝이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훈의초…….’
기분 좋게 차분해지는, 꽃내음과 풀냄새가 어우러진 향이 났다. 련은 단지들을 쭉 둘러보았다. 여러 가지 이름이 빠르게 지나갔다. 동청유(冬青油), 안수유(桉叶油), 박하순(薄荷醇), 박하유(薄荷油), 장뇌(樟脑), 백리향유(百里香油)…….
련의 눈에 맑지만 강한 빛이 들었다. 조화를 쓸 기회가 왔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녀의 조화는 현재 7성.
1성을 이루면 모나지 않게 어울릴 수 있고, 2성이면 균형을 잡을 수 있다. 련은 그게 지금까지 단순히 몸의 균형 감각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저 기름들을 본 순간 알 수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라는 걸.
그리고 여기서 움직이려면 해야 할 일이 있다. 련은 단목현우를 올려다보았다.
* * *
가장 먼저 동청유(冬青油)를 4할, 박하유(薄荷油)와 박하순(薄荷醇)을 일대일로 섞은 것을 3할, 안수유(桉叶油) 2할, 장뇌(樟脑), 훈의초(薰衣草), 백단유(白檀油), 백리향유(百里香油) 섞은 것을 1할.
심안, 조화, 정화를 동시에 쓰면서 한 단지에 맑은 기름을 모아서 천천히 휘저었다. 코끝이 시원해지는 향이 올라왔다.
련은 기름의 입자 사이사이로 영기가 스며들어 가는 걸 보며 빙긋 웃었다.
심안으로 재료를 꿰뚫어 보고, 조화로 원하는 효과를 내는 배합 비율을 맞추어 섞고, 마지막으로 정화까지 한번 둘러 주니 완벽했다.
‘옳지, 옳지! 영기가 쭉쭉 닳는구나!’
그렇게 한 단지를 완성했을 때 련의 영기는 ‘15’까지 떨어져 있었다. 깨어난 이후 처음으로 달성한 쾌거다.
‘심안에 조화가 월척인데? 그래서 심안과 조화가 어우러진다느니 그런 이야기를 했구나.’
심안으로 재료의 상태를 꿰뚫어 볼 때만 해도 이딴 약재를 공급한 약재상을 당장 갈아치워야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런데 정유 단지들을 찬찬히 둘러보는 순간.
동청유(冬青油)
등급 : 상급
상태 : 중급
동록 나무의 잎을 발효, 증류해서 만든 기름. 상쾌하고 그윽한 향이 난다. 항염, 진통 작용이 있다.
박하유(薄荷油)
등급 : 최상급
상태 : 상급
박하 잎을 증류하여 만든다. 진통, 마취, 소염, 해열 작용을 한다. 소화불량에도 효과가 있다.
[조화를 사용하시겠습니까?]
소매를 흘끗흘끗 보며 훑어보고 있는데, 갑자기 조화를 써 보겠냐는 문구가 뜨는 게 아닌가.
이런 적이 있던 적이 없어서 놀라 얼른 조화 능력을 사용했다.
[인식한 재료를 조합하여 더 나은 효능을 가진 제품을 만들 수 있습니다. 방법을 확인하시겠습니까? 해당 기능은 영기를 소모합니다.]
당연히 한다. 하고야 만다!
정화를 쓰면 재료의 상태를 개선할 수 있다고 하기에 정화도 열심히 썼다. 그렇게 만든 것이 지금 이 깨끗한 물처럼 보이는 정유였다.
두통이 드는 곳에 바르면 맑은 정신이 들고, 졸릴 때 바르면 잠을 깨울 수도 있고, 관절염이나 뻐근한 곳 등 어디에나 발라도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시대는 이런 걸 ‘만병통치약’이라고 한다.
그 순간 맑은 소리가 들려왔다.
* 정화 3성 성취 (1▲) *
사기를 정화할 수 있습니다.
련은 잠시 자신의 조화 성취가 늘어난 순간을 음미했다.
“련아, 이건…….”
련은 어린아이 손바닥보다 작은 병에 완성된 정유를 조금 덜어 담고는 심호흡했다.
정말 중요한 건 지금부터다. 련은 주위를 둘러본 다음에 단목현우의 손을 잡아끌고 진지하게 속삭였다.
“있죠, 숙부님. 이게 뭔지 아세요?”
방금 자신이 만들었는데 단목현우가 알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련은 물었다.
단목현우가 선선히 고개를 내저었다. 조카를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애틋한 마음만 가득했다.
‘숙부…….’
련은 숙부의 손을 붙잡았다. 폐관 수련이라는 게 보통 혹독한 게 아니다 보니 그의 손도 몹시 거칠었다.
자신이 누워 있었던 지난 세월에 대해 죄책감 가질 필요 없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해주면 될까?
‘이런 얘기 한다고 아무 소용 없겠지만 그래도…….’
“제가 자는 동안에요. 구름 위에서 지냈어요. 그때 신선님이 알려 주신 거예요.”
“그게 무슨……?”
“제가 자는 동안 숙부님도 많이 아팠다고, 아직도 그렇다고…… 하지만 이걸 바르면 나을 수 있대요.”
“뭐? 아니다, 련아. 나는…….”
전혀 아프지 않았다고 단목현우는 서둘러 말하려고 했지만 련은 살래살래 고개를 흔들었다.
물론 그의 몸은 아프지 않았어도, 마음에 병이 들고 두통을 떨쳐 내지 못했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여기에 바르면 바른 곳이 시원해지고 머리 아픈 것도 낫고, 뻐근한 목 뒤에 발라도 좋대요. 꼭 숙부님께 만들어 드리고 싶었어요.”
련은 배합한 정유를 담은 병을 내밀었다.
단목현우가 홀린 듯이 병을 조금 기울여 거의 맑은 물처럼 보이는 기름을 손끝에 톡톡 흘리고는 관자놀이에 문질렀다.
처음에는 눈이 살짝 시릴 정도로 시원하더니 살살 문지르자 항상 은은하게 무겁던 머리가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숨을 크게 들이켜자 다소 날카롭게 정신을 일깨우는 향이 청명하게 퍼져 나갔다.
조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이후로 항상 그를 감싼 두통이 사그라들자 어긋난 줄도 몰랐던 묵직한 호흡이 한결 편안하고 가벼워졌다.
단목현우는 놀란 얼굴로 련을 돌아보았다. 련은 그런 단목현우를 보고서 방긋이 미소 지었다.
신선 핑계를 떠올린 건 하인들이 떠들던 소리를 기억했기 때문이다.
가을이 와서 다른 데는 낙엽이 지는데도 여전히 푸르른 련의 처소 정원을 보고선 지난 7년간 련아 아기씨의 혼백을 신선이 데려갔다가 돌려준 게 분명하다고 속닥이던 소리들.
아예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은가?
세상의 끝에서 전부 다 보고 돌아와서 이런 능력을 가지게 되었는데, 세상의 끝이 선계라고 하면야 자신의 상태창은 신선의 목소리 아니겠는가!
혹여 남들이 알면 자신을 잡아가려고 할까 봐 두려우니 신선에 대한 건 비밀로 해 달란 말에 단목현우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다……. 네가 이렇게 영특하니 누군들 탐내지 않겠느냐?”
단목현우가 정유가 남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홀린 듯 중얼거렸다. 련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
“숙부님이 써 보시고 괜찮으면…… 할아버지께 조금 드려도 될까요?”
“어? 그럼! 그럼, 당연하지. 지금 드려도 괜찮을 것 같은데…… 이 숙부가 좋은 병을 가져오마!”
련이 만든 정유를 살짝 찍어 바른 목뒤를 주무르며 효능을 느끼던 단목현우가 벌떡 일어나 하인에게 무어라고 말했다.
깜짝 놀란 얼굴의 하인이 서둘러 가져온 건 어린아이 손바닥만 한 옥을 깎아 만든 작은 병이었다.
작은데도 옥으로 만든 병이라 그런지 괜히 묵직하게 느껴졌다. 그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단목현우가 불쑥 말했다.
“청련수(淸蓮水)…… 어떠니?”
“네?”
“몸과 마음을 청명하게 일깨워 주고, 기름이긴 하지만 물처럼 맑고 투명하니…… 아, 그러니까, 그 정유의 이름 말이다. 특별한 이름이 없다면…….”
단목현우도 많이 놀라고 정신이 없기는 한 모양인지 두서없이 말했다.
련은 그의 작명에 깃든 애정을 느꼈다. ‘청련수’에서 가운데 글자는 그녀의 이름이니까. 련은 활짝 웃곤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아녜요, 좋아요! 청련수…… 청련수. 마음에 들어요.”
련의 표정을 보고서 단목현우 역시 빙긋 웃다가, 또 금세 진지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오늘부터는 나와 함께 약학에 대해 공부하도록 하자. 아니, 알음알음 공부를 해 온 것으로 하고…….”
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련은 고개를 끄덕였다. 할 말은 그게 다였는지 단목현우는 잠시간 멍하니 있다가, 천천히 되물었다. 몹시 긴장한 듯했다.
“그런데 련아. 그…… 네가 자는 동안 선계에서 있었다는, 아니, 구름 위에 있었다는…… 그랬다는 거…….”
의심하는 걸까?
거짓말할 필요 없으니 솔직하게 말하라고 하면 어떡하지?
련이 그런 고민을 하는 사이에 단목현우가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그…… 신선들과 있으면서 어디 아프지는 않았느냐?”
“네?”
“춥거나…… 덥지는 않았더냐?”
련은 눈을 깜박이며 그를 한참 올려다보다가, 찬찬히 고개를 저었다. 단목현우는 그제야 긴장이 풀려 허물어진 얼굴로 빙긋이 웃었다.
“그래, 그럼 됐다. ……날 위해 이런 걸 만들어 줘서…… 고맙구나.”
련은 저도 모르게 그의 시선을 피하고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보았다.
단목현우의 ‘고민’ 항목이 깨끗하게 비워진 것을.
* * *
“이걸…… 련아가 만들어?”
“예, 아버지. 오늘 아침에 말입니다.”
오늘 천자문을 다 외웠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던 단목천기는 손녀를 가르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먼저 들이닥친 건 자신의 막내아들이었다.
조카가 만든 걸 품에 안고 들이닥친 막내아들의 얼굴이 반짝반짝 빛났다.
몇 년 전 사고 이후로 줄곧 음울한 그림자에 싸여 있던 그의 낯빛 위로 볕이 어린 듯 보인 건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