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5화
“약당에 사 둔 정유를 조합해 만든 것입니다. 청련수라고 이름 붙였지요.”
손가락 두 개 크기나 될까 싶은 작은 병을 기울이자 투명한 액체가 흘러나왔다.
그 이름답게 물처럼 보였으나 날카롭고 상쾌한 향이 확 퍼졌다. 영험한 뭔가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단목천기가 청련수를 손에 묻혀 관자놀이를 천천히 문지르는 사이에, 단목현우가 벌떡 일어나더니 단목천기의 뒤로 달려갔다.
“제가 이리저리 궁리를 해 보았는데 혈에 맞추어 쓰면 효과가 훨씬 좋았습니다. 목뒤 위쪽의 천주혈(天柱穴)을 눌러 주면…….”
“이 녀석이……!”
“아이고, 아버지! 가만 좀 계셔 보세요.”
성년이 된 지도 한참이 된 녀석이 체통도 없이 무슨 짓이냐고 호통치려고 했던 단목천기였지만 차마 그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태어나기를 이름 있는 세가의 재능 넘치는 막내아들로 태어났던 단목현우다. 열일곱 살이 될 때까지 그는 미움받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생기 넘치는 소년이었다.
예의범절을 모르고 천방지축이라며 한탄을 해도 그가 배시시 웃으며 아버지, 형, 누이, 라고 애교를 부리며 어깨를 주물러 주면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었다.
갖고 싶은 걸 사 달라고 조르면 못 이기는 척 모두 사 주었고 울상을 지으며 발을 구르면 곧 숙부가 될 녀석이 아직도 어리광이냐며 타박하면서도 주위 사람들에게 눈짓해 어찌 된 일이냐 캐묻곤 했다.
그러다 그 사랑스러운 경박함, 어리광, 장난기 같은 것이 하루아침에 싹 사라졌다.
매번 큰 소리로 떠들어 담장 밖까지 소리가 새어 나가겠다며 혼쭐을 내야 했던 웃음도 씻은 듯이 사그라졌다.
조카가 망가진 게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면서부터였다.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폐관 수련에 들어가는 단목현우를 말리지도 못했다. 그러다 마침내 첫째 단목현성까지 죽고 나자 젖은 재처럼 시들어 가던 막내아들이었다.
“어떠십니까? 시원하지요?”
“…….”
“아버지. 그 애가 총명하기가 어디 비할 곳이 없을 지경입니다. 천자문을 벌써 다 외웠지 않겠어요?”
“…….”
차갑고 서늘한 기운이 목뒤에서부터 천천히 퍼져 나갔다.
그가 기억하는 막내아들의 손은 열일곱 어린 소년의 것이었는데 지금 목덜미에 닿아 있는 건 훌쩍 큰 청년의 손이라는 사실에 가슴께가 저렸다.
“글씨를 쓰는 걸 가만히 보았는데 제가 쓰는 동작을 똑같이 따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직 손아귀 힘은 부족해서 필체야 다르다만, 제가 그토록 영민한 애는 본 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영민하다 해도 어찌 이런 걸 하루아침에 만들어 낸단…….”
그렇게 중얼거리던 단목천기는 말끝을 흐렸다. 마주 앉은 아들의 안색이 도로 흐려진 탓이었다.
“제가…… 걱정을 하게 한 것 같았습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
“하나 있는 숙부의 표정이 좋질 않으니 명석한 아이가 어찌 된 일인지 알아본 거겠지요. 그토록 명석한 아이니 다 알았을 것이고요.”
단목현우는 착잡한 목소리로 말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를 위로하기 위해 다급한 표정을 짓던 조카의 얼굴을 떠올리며.
─ 사실 그동안 신선들께서 너무 재미있게 놀아 주셔서, 그만 빨리 돌아와야 하는 걸 깜빡했어요.
작은 애가 눈을 깜빡깜빡하며 서둘러 사과의 말을 덧붙였다.
단목현우는 그 거짓말이 차라리 사실이었다면 얼마든지 웃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늦기는, 지금이라도 와서 얼마나 좋은지 모른단다, 그렇게 말하면서 웃을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거짓말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신선이 사는 선계라니, 그 얘기를 늘어놓는 조카의 얼굴을 보면서 단목현우는 가슴이 갈라지는 것 같았다.
요즘은 세 살배기 어린애도 그런 이야기는 믿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조카에게는 그 삼 년이 없었다. 삼 년이 아니라 칠 년이 없었다.
자신이 지켜 주지 못했기 때문에…….
“하여간 련아는 재능도 있고 감각도 탁월하니 이런 걸 곧장 빚어낸 거겠지요! 앞으로 무얼 가르쳐도 잘 배울 것입니다. 저와는 약재 공부를 계속하기로 했고요.”
“흥. 약당 당주라고 하나 있는 것이 몇 년이나 팽개치고 폐관 수련이나 했으니 이제라도 공부해야지. 이런 물건을 만들어 낸 걸 보아하니 네가 가르칠 것도 없을 것이다. 같이 배운다면야 모를까.”
“그러니까 련아와 같이 배울 생각이래도요. 그리고 련아가 만든 청련수 말입니다. 아버님 주위에 선물로 드리면 어떻겠습니까? 화산파에도 하나 보내고, 당문에도 보내고, 또 만송상단의 단주께도 보내 드리면 좋지 않을까요?”
단목현우가 조잘거리듯 말했다.
소리를 잠자코 듣던 단목천기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우선 사천당문에는 당분간 아무것도 보내선 안 된다.”
“예? 왜요!”
“아이가 무사히 깨어났다며 이것저것 보내면 당문에서 뭐라 생각하겠느냐? 혼사를 다시 이어 볼 요량이라 여기지 않겠느냔 얘기다.”
그 말을 들은 단목현우는 터무니없다는 듯 하고 싶은 말을 마구 쏘아 내려고 가슴을 부풀렸다가 곧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독선 당유벽과 단목천기는 젊어서는 절친한 벗이었고 나이가 들어서는 서로에게 목숨을 의지하며 협을 실천한 사이였다.
그렇게 마음도 척척 맞았겠다, 각자 가문의 꼭대기에 앉았겠다, 하여 태어나는 손주들을 맺어 주자 하였으니 그게 단목천기의 갓 태어난 장손 단목련과 당유벽의 네 살짜리 둘째 손자 당예설이었다.
여아가 태어나도 데릴사위를 들이는 무림 세가에서, 특히나 혈족을 지극히 아껴 당가타(唐家陀, 당문 혈족들이 모여 사는 지역) 밖으로 내보내는 일도 드문 사천당문을 생각하자면 파격적인 혼약이었다.
단목세가의 장손인 단목련이 세가 밖으로 나갈 수는 없으니 당예설을 사위로 넘겨주겠다는 의미였으므로.
이 혼약이 미묘해진 건 련이 태어나고 백일을 넘길 무렵이었다. 그때엔 모두가 련의 상태가 기이함을 눈치챘다.
그와 동시에 당예설이 보통 이상의, 솔직히 말하자면 사천당문 안에서도 놀라울 정도의 재능을 뿜어내기 시작할 때 모두들 이 혼약을 한 번씩 돌이켜보았다.
이제 이걸 어쩌면 좋단 말인가!
여아는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상태요, 남아는 가문 밖으로 내보내기엔 지나치게 아까워졌다.
여아가 멀쩡하기만 하더라도 아까운들 어쩌랴, 약속은 약속인 것을, 하고 포기할 수 있으련만 그도 아니니…….
결과적으로 그 혼약은 깨지긴 했다.
당유벽은 단목련의 벌모세수에 쓰일 비방과 약재를 모두 지원해 주었고, 단목천기는 그만하면 서로에게 도의를 다했다고 여겼다.
이렇게까지 해 주고서 혼약을 깨면 그 누구도 당가가 뒤늦게 손자를 아까워해 약속을 등한시했다며 손가락질할 수 없을 터였다.
“네 말대로 련아가 그리 명석하니 련아를 당문에 줄 수도 없고, 독선이 한번 제 품에 안은 당예설을 내놓을 리도 없으니 서로 곤란케 하지 말거라.”
“예에…… 그러면 화산파에는!”
“화산파에 뭘 보내는 것은 청윤진인이 폐관 수련을 끝마치고 나오고 나서 해도 늦지 않다. 지금 뭘 보낸들 약 올리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으냐.”
“그게 어찌 그리됩니까.”
“강도가 고맙다며 꽃을 보내면 그게 기쁘겠느냐?”
“강도랄 것까지야 없지 않습니까…….”
“장문인의 직전 제자가 타지의 어린아이 때문에 내공을 소실했는데 그러면 그게 강도질이지 무어란 말이냐?”
벌모세수에는 영약과 극독을 섞어 만든, 은밀하게 전해지는 비방과 함께 내공을 심도 있게 쌓은 고수가 한 사람 이상 필요하다.
그 고수의 내공 일정 부분이 대법에 소모되어 사라지니 비방을 구하면 사람을 구하지 못하고 사람을 구하면 비방을 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하여 보통의 문파에서는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고, 혈족계승 중심의 부유한 세가들이나 겨우 꿈이나 꿔볼 수 있는 게 벌모세수였다.
그런데 이번 련의 일은 어찌어찌 용케 아귀가 맞아 들어가 가능했다.
그 대법을 시전해 준 둘 중에 한 사람이 화산파 장문인의 직전 제자 청윤진인이었다.
련의 어머니 위지청에게 어려서 구명받은 적이 있던 청윤진인은 그녀와 의남매를 맺었고, 그 이후에도 은혜를 잊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을 살리고자 대의를 따랐다 한들 사가의 정을 다잡지 못하고 그에 이끌린 것이오, 그렇게 직전 제자의 몇십 년 내공이 허공에 사라졌는데 장문인의 마음이 좋으면 이미 우화등선하여 신선이 되었을 것이다.
“청윤진인도 소실한 내공을 복구하기 위해 폐관 수련에 들어갔다 하니, 그가 폐관을 깨고 나오면 그때 무어라도 하는 게 낫겠다.”
“네에…….”
“이걸 만든 련아가 괜찮다고 한다면야 만송 상단에는 선물로 보내도록 하자꾸나.”
단목현우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예!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제 련아 무공을 알려 주시는 거지요? 제게서 천자문을 다 배우면 알려 주기로 하셨잖아요.”
막내아들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그 애가 그리 영특하니 기대가 된다며, 몇 년 뒤에는 자신과 함께 논검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얼굴에 기쁨과 희망이 엿보였다.
아들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단목천기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단목현우가 벌떡 일어나 얼른 밖으로 달려 나갔다.
하지만 단목천기와 단목현우의 바람은 곧장 이루어지지 못했다.
련이 까무룩 쓰러졌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 먼저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