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6화
* * *
련은 멍하게 눈을 떴다. 옆에서 아이고 아이고 하는 곡소리가 왁 하고 들렸다가 제풀에 놀랐는지 다시 조용해졌다.
“아가야! 아가야, 정신이 드니?”
“어머니…….”
몸이 한번 흔들려서 련은 어머니에게 안겼다는 걸 깨달았다.
어머니 위지청의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의원이 달려와서는 깨어난 련의 상태가 아주 좋다고 했지만 위지청은 련의 손을 놓지 못했다.
이후 단목천기와 단목현우도 다녀가고, 발치에 매달려 잠든 단목비를 유모 장 씨의 손에 넘겨줬을 때야 련은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되었다.
새벽부터 힘내서 청련수를 만든 건 좋았는데 그날 아침 식사를 하다가 스르륵 혼절했다가 그대로 사흘간 열이 펄펄 끓었다 차갑게 식었다 했다는 것이다.
‘하…….’
련은 자신이 왜 까무러쳤는지 알았다.
[도움말 : 영기가 10 이상이 되도록 유지하세요.]
‘미치겠네. 50 이하로 떨어뜨리라고 난리 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선 10 이상을 유지하라고?’
청련수를 만드는 데 영기를 다 써 버릴 수 있다고 좋아했더니 이 모양 이 꼴이 되다니!
그래도 깨어나니 7년간 혼수상태였다 막 깨어났을 때처럼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련이 내심 의아하여 가슴께를 쓸어내리는 사이에 의원이 위지청을 보며 인자하게 웃었다.
“영특한 아이가 이 계절에 용케도 흑석초를 구해 온 덕이 큽니다. 역시 관대한 마음으로 선행을 베풀면 돌아오는 게지요.”
오갈 데 없는 고아 소년을 거둬 자식들의 형제처럼 벗처럼 키우고 있으니 선행이라 할 법도 했다.
“흑석…… 초요?”
위지청이 눈물 젖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연신 련의 뺨을 쓸었다.
“갑자기 많은 피를 쏟거나 기력이 쇠했을 때면 원기를 보충하여야 하는데, 몸이 약해진 상황에서는 지나치게 부족해서도 아니 되고 넘쳐서도 아니 되는 법입니다.”
의원이 눈으로 련의 상태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흑석초는 기력을 보하되 넘치면 채우지 않고 흘려보내는 성질이 있어서 이런 경우에 아주 딱인데, 늦겨울과 초봄에 걸쳐 겨우 나는 약초라 구하기가 어려웠지요.”
“그걸 화륜이 구해다 주었단다. 어찌나 고마운 일인지…….”
‘화륜이?’
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근처에 화륜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련이 누굴 찾는지 알아챈 의원이 부드럽게 웃었다.
“쌀쌀한 가을날에 온종일 산을 타고 다녔는지 몸살이 나서 누워 있습니다. 이제 아기씨도 일어나셨으니 그 아이도 돌보러 가 보겠습니다.”
련은 의원의 뒤를 따라가겠다고 벌떡 일어났다가 현기증에 비틀거렸다. 유모와 위지청이 놀라서 련에게 달려들었다.
화륜은 불쾌한 열감과 뻐근한 근육통을 앓으며 침상에 누워 있었지만, 밖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얘기들을 놓치지 않았다.
─ 아기씨께 그 약초로 탕약을 올렸대, 반밖에 못 드셨다는데 괜찮으실지 모르겠네.
그 얘기는 곧 다른 얘기로 바뀌었다.
─ 오늘 눈을 뜨셨대, 무사하시대!
이제 이걸로 됐을지도, 화륜이 속으로 생각할 때였다.
─ 지금 의원님이 그 애를 보러 가신대, 아기씨도 같이…….
‘뭐?’
화륜은 열로 뜨끈한 눈매를 문지르려고 했는데, 그보다 먼저 다른 손이 와 닿았다.
열기가 없어 서늘하고 작은 손이었다. 손의 주인이 중얼거렸다.
“바보 같으니…….”
누가 누구더러 바보라는 거야, 화륜은 생각했으나 목이 깔깔해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윽고 입가로 미지근한 액체가 스며들었다. 그 쓴맛에 정신이 번쩍 든 화륜이 뱉어 내려고 했지만 손의 주인이 어르고 달랬다.
“탕약이야. 이거 다 먹어야 착한 아이지?”
누가 착하다는 말 같은 것에 넘어갈 줄 알고.
화륜은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넘겨주는 약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꼴깍꼴깍 넘기고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자 흐릿한 빛 속에서 조그만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새카만 눈동자 위로 밤하늘 같은 별이 반짝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가 알던 것보다 반쪽이 된 소녀의 얼굴도 천천히 보였다.
“륜아야! 일어났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소녀는 그의 이불을 고쳐서 덮어 주고, 땀에 젖은 이마도 세심히 닦아 준 다음에 자잘한 생채기가 난 손에 연고도 발라 주었다.
“늦겨울에 나는 약초 찾겠다고 산을 그렇게 헤매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어?”
화륜은 투덜거리는 소녀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게요. 괜히 포목점에 갖다 줘서 얼음이나 챙기는 바람에.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아껴 놓을걸. 이젠 없는 흑석초 찾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몇 달 전 얘기를 하며 갈라진 목소리로 투덜거리자 소녀의 별이 떠오른 눈동자가 물기로 일렁거려서, 화륜은 잠시 괜한 말을 했다고 후회했다.
그러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 화륜은 밤이 왔다는 걸 깨달았다. 잠깐 눈만 깜박거린다는 게 잠에 빠진 모양이었다.
화륜은 침상에 누운 채 이마를 매만지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체온에 조금 따끈해진 수건이 손에 잡혔다. 련이 놓아주고 간 것이다. 그 손이 있다가 없어졌다고 생각하자 왜인지 마음이 허전했다.
화륜은 스스로가 그런 생각을 한 것을 믿기 어려워서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달칵.
“어? 륜아야! 일어났어?”
반쯤 몸을 일으키던 화륜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팔에는 수건을 걸치고 양손에 작은 대야를 든 조그만 소녀가 그의 침상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누이?”
“목마르지? 이거 마시자.”
소녀는 물수건으로 화륜의 이마를 닦아 주고는 물 주전자를 기울여 미지근한 물을 내밀었다.
“열이 나서 덥다고 해도 찬물을 막 들이켜면 안 된대.”
“……누이가 왜 아직 여기에……?”
“무슨 소리야, 왜냐니. 네가 아프니까 그렇지.”
소녀는 종알거리면서 그의 입가에 물잔을 대어 주고, 바깥사람에게 미음을 내어 달라고 한 뒤에 생채기가 난 그의 무릎을 살펴보고는 다시 이불을 덮어 주었다.
“왜 여기에…….”
“조금 전에 말했잖아. 네가 아프니까 돌봐 줘야 해서 그런 거라고.”
“나를……?”
“그럼 누구를 돌봐 주겠어?”
오리처럼 삐죽 나온 입은 집중할 때면 보이는 소녀의 버릇이었다. 그럼 지금은 무엇에 집중하고 있을까?
‘내 이마를 닦아 주는 일……?’
겨울 나뭇가지처럼 마르고 작은 손에 젖은 수건이 들려 눈가를 스쳤다.
“이러면 어쩔 수 없이…….”
“어쩔 수 없이?”
화륜은 말끝을 흐리며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륜아야? 졸려도 미음은 먹고 자자. 그래야 낫지.”
“으으으음.”
“륜아야, 착하지, 응?”
“으으음.”
“아이 착하다.”
화륜은 조금 꾸물거리다가 결국 련이 어르는 소리를 못 견디고 몸을 일으켰다.
“내…… 내가 먹을 테니까 그만해요.”
“너 아직 팔도 떨리고 손에 생채기도 많아서 안 돼.”
“누이도 다 나은 거 아니잖아요.”
“나는 다 나았어. 잠도 많이 잤어. 얼른 아 해.”
“내가 진짜 창피해서…….”
“아픈 게 뭐가 창피해?”
“정말…….”
“자, 얼른 먹자!”
* * *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련은 월영재 주방 소속 닭장 앞에 서서 한탄했다.
닭장 한편은 웅장하게 자란 오골계 한 마리가 차지하여 꽉 차 있고, 다른 닭들은 왠지 겁을 먹은 듯이 구석에 뭉쳐 있었다.
이제 확실히, 이 오골계는 닭이라기보다는 좀 더 다른 무엇으로 보였다. 크기는 화계(칠면조)만 했다.
“왜? 걱정이 되긴 했니?”
앓아누워 있느라 살이 내린 모습이 걱정스러웠는지 오골계의 새까만 눈동자가 그렁그렁했다.
“그런데 너는 정말 왜 이런다니.”
련은 닭장 사이로 손을 슬쩍 넣어 오골계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오골계의 깃털 끝이 신비로운 붉은빛으로 반짝거렸다.
“역시 봉황 같지 않아요? 아니면 주작(朱雀)? 둘이 비슷한 거죠?”
련은 옆에서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이제 번듯한 도련님처럼 보이는 소년, 화륜이 미간을 찌푸린 채 닭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란히 앓고 일어났는데 화륜은 놀랍게도 전보다 더 건강하고 씩씩해졌다.
“그게…….”
그럴 리가 없지 않냐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오골계의 붉은 광택이 도는 까만 눈이 순하게 끔벅거리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만 보면 다른 닭들을 지독하게 괴롭히면서 모이를 다 뺏어 먹는다던 모습은 연상할 수 없었다.
“음. 역시 그래 보이니?”
“그럼 누이 눈엔 진심으로 저게 그냥 평범한 닭처럼 보여요?”
“아니…….”
‘설마, 설마 영기를 먹어서 영물이 되어 가는 건가?’
그렇다고 닭이 주작이 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정말 일어나기야 하겠는가?
비록 이 오골계에겐 어떻게 봐도 영물 특유의 신비한 기운이 어리는 듯 보였으나…….
‘일단 주작은 깃털이 불꽃 아닌가? 얜 까맣잖아. 조금 붉은 빛이 돌긴 하지만.’
련이 애써 합리화하려고 할 때 화륜이 불쑥 말했다.
“오골계를 봉황으로 키우면 현령이 누이를 잡아갈걸요.”
“뭐어?”
련은 웃다가 사레가 들릴 뻔했다. 미래의 마천교 소교주였던 화륜은 고작 현령 정도인 관의 인사라면 손톱 거스러미 정도로 여기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도 어릴 때엔 호랑이와 현령을 같은 느낌으로 말하는 것이 자못 깜찍했다. 하지만 화륜은 진지했다.
“누이를 데려다가 닭장에 가둬 놓고 봉황만 키우게 만들 거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