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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21)화 (21/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21화

“그게…….”

견위학을 숙부라고 부르게 되었으니 자신도 할아버지라 불러 달라는 견언조의 요구에 따라 그를 견 할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련이었다.

견위운은 나서서 뭔가를 해명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적이 드문지, 이 상황이 다소 수치스럽고 동시에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제 오라버니가 단목세가에 함께 오지 못하게 되어서…… 그렇다고 저만 오면 오해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다고, 아버…… 상단주님께서 절 보고 오지 말라 명하셨습니다.”

련은 그게 무슨 오해인지 알아차렸다.

견언조는 견위운이 후계자로 오인받는 상황을 염려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상단의 일원으로 어찌 거래하게 될 세가를 찾아보지도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여 다소 부끄러운 꼴을 하고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오라버니라면 위정 공자? 왜 못 오시게 됐어요?”

“…….”

“…….”

견위운이 입술만 달싹였다. 련은 익히 들어온 견위정의 성정을 떠올리며 말했다.

“술? 도박?”

하인이 이번에도 펄쩍 뛰었다. 견위운이 조금 더 눈을 내리깔았다.

“부끄럽습니다.”

그러니까 첫째가 술병이 나서 예까지 오지 못해서 공평(?)하게 둘째도 오지 말라 했는데, 그렇다고 정말 안 올 수는 없다며 하인 차림새를 하고서라도 찾아왔다는 것이다.

‘좀 차가운 사람인 줄 알았는데…….’

만송상단을 물려받지 못하자 자기 상단을 차려서 성공한 인물로, 그녀의 냉철하고 칼같이 단호한 성정은 절강성에서 세 살배기 어린애도 알고 있었다.

‘못 오게 했다고 남장까지 하고서 숨어올 만큼 열정적인 사람일 줄은 몰랐네.’

하긴 이 정도 열정이 있으니까 맨손으로 분가해 성공한 것일 테다.

“우리 세가는 보기에 좀 어때요, 위운 고모?”

“네?”

갑자기 고모 소리를 들은 견위운이 흠칫했다.

“견 할아버지께서 위학 공자에게 숙부라 하라고 하셔서요. 그러면 위운 고모도 되는 거죠?”

“음…… 그럼요.”

“그러니까 말씀 편히 하세요.”

“어…… 그, 그래.”

하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견위운이 당황하는 모습은 몹시 보기 드문 듯했다.

견위운이 크게 심호흡하며 말을 이었다.

“세가는…… 굳이 권세를 과시하지 않는 소박한 모습이 멋스럽구나.”

어린아이에게 너희 집이 낡고 초라하다고는 말을 못해서…….

그런 견위운을 보며 련은 심안을 끌어올렸다. 련의 눈동자 위로 별빛이 반짝였다.

“음. 그래도 너무 권세 없어 보이는 것도 좀 그렇죠?”

“어? 그렇지…….”

“아가씨!”

뒤에 선 하인이 화들짝 놀라서 견위운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견위운도 헛기침하고는 부정했다.

“아니, 아니야. 그럴 거야 없지.”

“그래도 저택도 보수하고, 무인들도 좀 더 끌어모으면 더 좋겠죠?”

“그건 그렇지. 솔직히 지금은 좀.”

“으그씨!”

하인이 입술을 꽉 깨물고 견위운을 불렀다. 거의 울 것 같았다.

련은 눈을 접고 웃었다.

“그래서 이번에 청련수를 팔아서 돈을 좀 벌어 보려고요. 얘기 들으셨어요?”

“그도 들었다. 저택을 꾸미는 건 금방 할 수 있게 될 것 같구나.”

견위운의 눈에 욕심이 스쳤다. 그녀가 보기에도 청련수는 될 물건이었고, 그걸 직접 관리해 수익을 올리고픈 욕망이 깃든 눈이었다.

련은 한껏 천진한 얼굴로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부자가 되면 가족들하고 제일 맛있는 거 같이 먹으러 갈 거예요.”

“그거 좋은 일이네.”

“네! 그런데 그중에서 특히 륜아한테는 새 옷도 사 주려고요.”

“어? 어어…….”

갑자기 이름도 모르는 아이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견위운은 말을 끊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이며 추임새를 넣어 주었다.

“그 애한테만 사 주려고?”

“네! 사실 륜아는 엄청 똑똑해서 혼자서 뭐든 다 잘하거든요.”

“그렇구나.”

“그런데 혼자서 뭐든 다 잘하니까, 제게는 동생인데도 제가 뭐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요.”

“아무래도 그렇겠네. 많이 똑똑한가 봐.”

“네! 엄청요. 그래서 저는 매번 제대로 못 챙겨 주는데, 륜아는 항상 저도 비아도 열심히 돌봐 줘요.”

“그러니? 착한 아이네.”

“생각해보니까 그게 미안해서요. 륜아한테만 새 옷을 사 주려고요.”

그러렴, 하며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견위운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크게 뜬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견위운을 보며 눈을 접고 빙긋 미소지은 련은 동생들 글자 수업을 하러 가야 한다며 손을 흔들고는 인사를 나눌 새도 없이 그 자리를 벗어났다.

* * *

“련아 나이가 여덟이던가?”

“예. 지난해 가을 무렵 병석에서 일어나셔서 올해로 여덟이시지요. 이제 내년 2월을 지나면 아홉 되십니다.”

돌아가는 마차 안, 견언조는 심복의 말을 들으며 미간을 매만졌다.

세 자식 중에서 무서울 정도로 똑똑했던 셋째 위학이 그 나이 될 무렵엔 어떠했는지 곱씹는 중이었다.

─ 그리고 제가 직접 만드는 것보다는 효험이 덜하기는 하지만, 보다 간단하고 저렴하게 배합하여 만들 수 있는 청련수도 있어요. 이건 단지 단위로 의각에 판매할 수 있을까요?

같은 물건, 다른 등급, 다른 가격. 비싼 것은 더욱 값져 보일 것이고 저렴한 것은 더욱 다가가기 쉬우니 이처럼 좋은 방도가 또 있을까?

그것을 저 어린아이가 직접 생각을 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설령 누군가에게 조언을 들었다 하더라도 경탄이 사그라들지는 않았다. 어린아이에게 그런 조언을 진지하게 할 사람을 곁에 두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능력이라 할 만했다.

“태상가주께서 말년에 복이 있구나…….”

서로 벗 삼아 함께 날아오르리라 기대했건만, 단목천기가 무림을 구한 대가를 혼자 치르는 동안 그의 장남은 요절하고 장손은 산송장이었으니 그걸 지켜보는 견언조의 마음도 편치만은 않았다.

청련수라는 기묘한 물건을 보자마자 달려온 것도 그래서였다.

단목세가에서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 낼 여력이 있다면, 일어서려는 준비를 하는 것이라면 한 손 보태기 위해.

“……그런데 위학이 녀석은 공부는 잘하고 있다 하더냐?”

심복이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견언조는 미간을 짚었다.

막내는 지금 휘주의 죽림 서원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과거 합격자를 줄줄이 배출한 데다가 상방의 자식들이 많이들 다니는 유명 서원이라 일부러 거기까지 보낸 것인데, 그곳에 간 막내에게서 들려오는 소식마다 기특한 얘기는 하나도 없어 그의 심복이 말도 잇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어르신, 도련님을 일러 휘상 중에서 가장 휘상답다며 모두들…….”

“그 녀석이 주루에 매일같이 출석한단 얘기 아니냐!”

사람들은 휘주 상인들을 보고서 관모(관직에 오른 자들이 쓰는 모자)와 음주 가무에는 은자 아끼는 법을 모른다는 얘기들을 하곤 했다.

그들이 관직을 얻는 일과 주루에서 노는 일에는 빠지는 법이 없다는 뜻이었다.

관모에 쓰는 돈은 견언조가 죽림서원에 내고 있으니, 견위학이 휘주 상인다움을 자랑하려면…….

견언조는 뜨거운 한숨을 푹푹 내쉬다가 품에서 청련수를 꺼내 관자놀이에 문질렀다.

서늘한 기운이 청명한 안개처럼 스며들더니 이윽고 두통이 가시고 마치 스무 살 무렵으로 돌아간 듯이 머리가 맑아졌다. 실로 신기막측한 물건이었다.

“련아가 새로 한 병을 주었으니 이걸 위학에게 보내면서 조카가 장원 급제를 기원하더라며 한마디 해 주어야겠다.”

장원 급제가 무어다냐, 말석이라도 좋으니 그저 향시에 붙기만 하면 좋으련만…….

“첫째는?”

“오후에 일어나서셔 약을 챙겨 드시고는 상점들을 둘러보러 나가셨다 합니다.”

제법 거리가 있는 본가의 일이지만 진즉 보고가 들어온 것이다. 견언조가 혀를 찼다.

“술병이 나서 드러누웠으면 아픈 척이라도 할 것이지…….”

첫째 아들의 술친구들이 제대로 된 인간군상이 아니라는 걸 파악하고 있지만, 견위정이 특별히 유능하지는 못해도 큰 실수도 없는 판에 쥐 잡듯이 할 수는 없었다. 견위정의 평판도 있으니 더욱 그랬다.

그저 스스로 그런 벗들을 쳐내고 좀 더 진중하게 사귀면서 상단의 일에 진지하게 임하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견언조의 탄식이 조용히 흩어졌다.

* * *

“아, 아가씨. 이렇게 먼저 돌아오셔서 무얼 하시려고요……?”

“오라버니는?”

“상점가에 나가셨대요. 가게들이 잘 있는지…….”

“흥, 도박이나 하러 간 거겠지.”

견위운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가, 이윽고 그 표정을 굳혔다. 곁에 있던 하인이 숨을 죽였다.

견위운은 한참이나 아무 말을 하지 않다가 미간을 문지른 다음에 하인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곁을 보필해온 충직한 이였다.

“의원을 불러다 가서 숙취 내리는 약을 미리 좀 달여두도록 해라.”

“예? 숙취요……?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견위운은 깊은 한숨을 내쉰 다음 조용히 주위를 살폈다.

부친이 단목세가를 얼마나 각별히 생각하는지 알기에, 얕게나마 무공을 익힌 덕분에 주변의 기척 정도는 인지할 수 있었다.

견위운은 근처를 기웃거리던 하인 하나가 멀어지자 빠르게 말했다.

“은소강에게 사람을 좀 보내 달라고 서신을 보내야겠다.”

“예?”

하인이 눈을 크게 떴다. 은소강은 흑천련의 십삼천 중 제3천의 부천주였다.

“사람을 무엇에 쓰시려고요……?”

“오라버니에게 빌붙는 저 패거리들을 다 떨쳐 내야겠어. 그들을 혼쭐 내줄 수 있으면서 입이 무거운 자들이 필요하다. 절강성 안에서는 그런 인물을 구할 수가 없으니…….”

“아니…… 큰 도련님의 벗들을, 말씀하…… 말씀하시는 거죠?”

“그래. 얼른 가 보거라!”

“아, 넵, 넵!”

견위운이 눈에 쌍심지를 켜자 하인이 엉덩이를 맞은 것처럼 헐레벌떡 뛰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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