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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22)화 (22/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22화

견위운은 갑자기 고요해진 처소 안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흑천련 소속 부천주는 만송상단의 직계라 해도 쉽게 얻을 수 없는 끈이었으니만큼 그녀도 아껴둔 것이지만, 견위운은 그걸 쓸 때가 바로 지금임을 직감했다.

‘손이 가지 않는 똑똑한 둘째.’

눈동자가 찬란하게 빛나는 작은 소녀와의 대화가 벼락처럼 머리에 꽂힌 탓이었다.

지금껏 견위운은 가문의 후계자가 되기에도 부족함 없는, 아니, 차고 넘치는 모습만 보여주었다.

정보에 기반한 냉철한 판단력, 운을 끌어올 정도의 저돌적인 행동력, 끈기, 근성, 노력, 재능, 실력…….

그러나 상단의 후계자 자리를 결정짓는 건 당락이 정해진 시험을 통과하는 게 아니었다.

‘그걸 이제야 알다니.’

절강성을 호령한 대상인이라 해도 사람이고 또 아버지임을, 견위운은 이제야 깨달았다.

조금 부족해도 열심히는 하는 것 같은 첫째, 혼자 학업의 길을 걷느라 외떨어져 있는 막내.

그리고 그 사이에 혼자서도 무엇이든 잘하는 둘째.

솔직히 견위운은 자신이라면 당연히 셋 중 자신에게 가장 많은 관심을 쏟을 거라고 생각했다.

모자란 첫째와 멀리 떨어져 살게 될 막내 사이에서 유능한 둘째만이 서로 말이 통하지 않겠나?

‘내가 너무…… 자만했어. 나를 너무 과신했다.’

그러나 그건 동등한 관계일 때의 얘기다. 위에서 아래를 돌봐 준다고 생각하면 전혀 다른 결론이 나는 것이다.

손을 댈 필요가 없는 자식이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고 관심이 없다는 건 애정이 닿을 일이 적다는 말이었다.

처음으로 본 자식이라 애틋한 마음과 안쓰러운 걱정을 함께 담아 보게 되는 첫째와 떨어져 있어서 더 마음에서 가실 날 없고 안쓰러운 셋째까지 신경 쓰고 나면 ‘둘째야 알아서 잘하니까.’라고 생각하게 되는 게 상사가 아닌 부모의 마음인 것이다.

견위운은 아버지의 진솔하고 따뜻한 사랑과 관심을 바라는 게 아니었기에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손이 가지 않을 만큼 똑똑한 둘째를, 언제 돌아보게 될까?

그것 역시 단목련이 말해 주었다.

‘륜아는 항상 저도 비아도 열심히 돌봐 줘요.’

그 넘치는 명석함으로 형제들을 돌봐 줄 때.

그걸 견언조가 자연스레 눈치챘을 때, 중간에 끼인 자식을 챙겨 주지 못했다는 미안함과 모자란 다른 자식을 챙겨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이 밀려들지 않겠나.

‘그 멍청한 벗들을 좀 쳐 낸다고 해서 오라버니가 똑똑해지진 않을 테지.’

그리고 정신을 차린다 해도 상관없었다. 제정신 잘 챙긴 견위정보다 자신이 더 유능하니까.

‘그럼 동생 녀석한테도 뭘 보내야겠어.’

제 큰 형을 닮은 건지, 어렸을 때는 대단한 기재가 났다고 법석이었는데 휘주로 올라가서는 매일같이 방탕하게 술이나 퍼마시고 있다기에 동생에겐 관심을 끊었던 견위운이었다.

“위학에게…….”

뭐라고 말하려고 했던 견위운은 자신이 하인을 내보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곤 숨을 골랐다.

‘그런데 그 애는 대체 뭐지?’

단목련.

어린애가 아무렇게나 자기 하고 싶은 얘기를 떠들어 댄 모양새였는데 너무나 정확하게 자신의 상황을 겨누고 있었다.

‘그런 우연이 가능한가?’

자신 정도 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 애의 말에서 지금과 같은 결론을 도출해내기 어려웠을 것 같기도 하지만…….

‘청련수를 만든 장본인이라고 했지.’

견위운은 그게 헛소문이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

* * *

새해를 맞이하며 련이 이제 약속한 대로 무공을 배우고 싶다는 얘기를 꺼냈을 때, 단목천기는 조금 멈칫했다가 차를 내어 오게 했다.

찻물이 흐르고 차향이 월영재를 감쌀 때 단목천기가 말했다.

“무공을 배우고 싶으냐?”

“네!”

련이 당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단목천기는 그 정도로 대화를 마무리 짓지 않았다.

숨을 들이마시며 한참이나 바깥을 바라보고 있던 그가 고개를 돌려 련을 주시했다.

“강해질 수 없다고 해도?”

“네?”

“너는 강해질 수 없다.”

단목천기가 단언했다.

“십수 년을 연마한다 하여도, 너는 언제나 세가에 갓 입문한 무사만 하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다른 문파, 다른 세가의 그 누구와 겨뤄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영원히 그러하다. 그렇게 정해졌느니라. 네가 무얼 얼마나 어떻게 노력해도, 죽었다 깨어나도 바꿀 수 없다. 그래도 무공을 배우고 싶으냐?”

단목천기의 말은 담담했으나 눈빛은 달랐다. 피를 토하며 말한다 하더라도 그런 얼굴은 아닐 것이다.

련은 단목천기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알고 계셨구나…….’

그녀가 내공을 쌓을 수 없는 몸이라는 걸 단목천기는 알고 있는 것이다.

단목천기는 차마 손녀딸을 더 쳐다보지 못해 눈을 내리감았다.

자신의 늙은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는 듯했다. 분하고 원통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는 이 와중에도 얻은 깨달음이 있다.

자신은 평생 도가나 불가에는 귀의하지 못하리라는.

“너의 몸은 축기가 불가하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내공을 쌓을 수 없다는 말이지요?”

“……!”

손녀딸의 얼굴은 담담했다. 단목천기는 어린 소녀의 얼굴에서 형용하기 어려운 빛을 보았다.

“……내공이 없으면 하늘 위의 하늘에는 결코 발을 디딜 수 없다. 그 역시 알고 있느냐?”

“네.”

“네가 배우게 될 모든 것이 부질없을 것이다. 누구와 겨뤄도 승리할 수 없고 누구도 너의 검을 제대로 알아주지 않을 것이다. 내공이 없는 검이란 그렇다. 사람 인(人) 자를 보아라. 첫 번째 획이 없는 글자는 무너진 글자요, 두 번째 획이 없는 글자는 글자조차 아니다. 무공 공부에 있어 외공이 첫 번째 획이라면 내공이란 두 번째 획이니라.”

괜히 몇 년 뒤에 부질없는 노력을 하고서 상처받기보다는 차라리 처음부터 시작도 하지 않길 바라는 조부의 마음을 알 것 같아서 련은 빙긋이 웃었다.

“남을 꺾고 그들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검을 배우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전 우리 세가의 검을 알고 싶어서 배우려고 하는 거예요.”

“…….”

지난 생에 그녀가 죽기 직전쯤 백의명이라는 외공의 고수가 이름을 떨쳤다.

어려서 뭘 잘못 배웠는지 기혈이 뒤틀린 채 자란 바람에 내공을 익히지 못한 무림인이었는데, 외공만으로도 절정 고수까진 아니어도 나름대로는 내로라하는 고수가 된 것이다.

얼마 전까지도 잊고 있었는데 단목천기에게 무공을 배울 생각을 다잡으면서 그에 대한 것도 떠올랐다.

‘나도 뭐 여차하면 그런 쪽으로 가면 되지 않겠어? 하는 데까지는 해 보는 거지.’

“세가를 빛낼 천하제일인은 비아가 되어 줄 것이고 세가를 이끄는 것은 고모님과 숙부님이 거들어 주실 것이니 전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련의 말은 조리 있고 똑 부러져 명랑하게까지 들렸다.

여느 평범한 집안의 장손이었다면 이 정도만 해도 명석하다며 박수를 치고 어여삐 여겼을 것인데 여기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무가(武家)이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다를 것이다.”

“예?”

“배움이 깊어지고 시간이 흐르면 서운하고, 분하고, 억울하고, 원통한 마음이 아니 들 수 없느니라. 네가 총명한 만큼 더욱 크게 느끼게 되리라.”

련은 조금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가 오면, 그 마음은, 힘껏…… 최선을 다해 견뎌 내겠습니다.”

“…….”

그리고 그 말에 단목천기는 입술을 악물었다. 아직 열 살도 되지 않은 손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곤 믿기 어려웠다. 이 아이를 보고서 총명하다 영특하다 노래를 부르던 막내아들의 목소리가 귀에 감겼다.

하여, 지금 가장 억울한 건 단목천기였다.

저 나이인데도 손녀는 자신에게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단언하지 않았다. 분하고 억울한 마음이 드는 일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뎌 내 보이겠다고 답했다.

저리 영명한 아이인데. 아비와 어미의 근골을 타고났을 것인데. 벌모세수까지 받고서 눈을 떴는데, 이제 모든 걸 다 쥐여 줄 수 있는데…….

“……알았다. 네가 그리 말하니, 심법을 제외한 세가의 무공을 차근차근 알려 주도록 하마.”

“네!”

단목천기는 기대감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련을 바라보며 크게 한숨을 내쉰 뒤 입을 열었다.

“우리 가문의 가장 기본 검법이 무엇인지 아느냐?”

“낙성십이검(落星十二劍) 이요!”

“그래. 낙성십이검의 기본은 명징함이다.”

“명징함이요?”

언제 머뭇거렸냐는 듯이, 단목천기는 유수와 같이 말을 이었다.

“휘두를 때는 별빛처럼 빠르되 별보다 선명하게 보여야 하며, 별이 떨어졌을 때 천하에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듯이 단목세가의 검수가 검을 휘둘렀을 때는 모두가 그 뜻을 알 수 있을 만치 분명해야 한다. 내 말을 알겠느냐?”

련은 말로만 들어서는 잘 모르겠다 싶었으나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단목천기는 그런 련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고 짚 인형 앞에 섰다.

그것만으로도 분위기가 일변했다. 밤하늘과도 같은 서늘한 기류가 흐른다.

‘처음 뵈었을 때하고 비하면 엄청 많이 달라졌어.’

거의 매일같이 보아온지라 련도 그의 변화를 지금에서야 알아보았다. 검을 든 이제야.

단목천기의 얼굴과 손을 덮은 흉터는 여전했으나 검을 쥔 자세는 흔들림이 없고 흘러나오는 기세는 빈틈 하나 없이 강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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