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23화
“무엇이든 보는 게 가장 먼저다. 보아야 알 수 있고 알아야 익힐 수 있느니라.”
“네!”
한시름 놓은 련은 다소 긴장을 풀고, 조용히 심안을 끌어올리며 대답했다.
“우선은 검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여 줄 테니 잘 보거라.”
“네!”
련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손녀딸의 얼굴을 훑듯이 살펴본 단목천기의 손가락에 아주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우와……!’
평생을 단목세가의 검에 바쳐 온 사람의 움직임이 시작되자 주위의 공기가 확 변하며 거세게 물결쳤다.
련은 천천히 호흡하며 눈에 새기듯 단목천기의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조부는 내공은 전혀 쓰지 않는 것 같았는데도, 초식이 하나하나 더해질수록 주변의 공기가 단목천기 쪽으로 휘말려 갔다
‘이래서 낙성십이검인가?’
검로를 따라 흔들리는 공기의 특정 지점이 은하수의 가장 빛나는 별들처럼 반짝여 보였다. 그 반짝임이 련의 눈에까지 와 닿았다.
그렇게 단목천기가 십이식을 모두 펼쳤을 때, 짚 인형에는 딱 서른여섯 개의 칼자국과 그 앞에 단 열두 개의 발자국만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착.
마지막으로 단목천기가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호흡을 한번 고른 다음 련을 돌아보았다.
“잘 보았느냐?”
* 심안 5성 성취 (1▲) *
단점을 개선할 방법을 알 수 있습니다.
눈이 뜨겁고 번쩍번쩍거리는 것만 같았다.
‘뭐 좀 괜찮은 걸 보기만 하면 심안이 번쩍번쩍 오르네. 아직 초기라 그런가?’
보통 학업 성취라는 것이 아무것도 모를 때는 부쩍부쩍 늘어도 뒤로 가면 갈수록 어렵기 마련 아니던가.
‘단점을 개선할 수 있다는 건 뭐지? 이미 내가 하던 건…… 그냥 단점을 그냥 지적하거나 없애는 것뿐이고, 이제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된다는 건가?’
어떻게 생각해도 보통 능력은 아니다. 고작 5성 정도의 성취가 이 정도라면 12성쯤 되었을 땐 뭘 볼 수 있을까?
련은 생각을 갈무리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한번 따라 해 보거라.”
“네?”
련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지금 이게 말이라고 하신 걸까?
무공을 배우고 싶다고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한번 본 초식을 어찌 당장 따라 할 수 있겠나?
심지어 초식도 열두 개나 되는 걸! 자신이 본 걸 다 외우기나 했는지도 의문이었다.
“잘하란 말이 아니다. 네가 어디까지 하는지 알아보려고 하는 것이니 하는 데까지만 해 보거라.”
련은 불안한 표정으로 입술을 꾸물거리다가, 크게 숨을 들이켜고는 목검을 쥐고서 짚인형 앞에 섰다.
‘그래도 이 검법 자체를 아예 처음 보는 건 아니니까…….’
세가의 기본 검식이다. 무공을 익히지 못했다곤 해도, 지난 생에 본 적은 많았다.
그리고 지금 자신에게는 그것뿐만이 아니라 ‘조화’까지 있으니만큼, 본 걸 따라 하는 건 해 볼 만할지도 몰랐다.
련의 눈동자에 별처럼 흩뿌려진 금빛이 반짝하고 빛을 내는 것과 동시에 련의 목검이 움직였다.
그리고 련이 본 것을 ‘전부’ 따라 했을 때, 짚 인형 앞에는 정확히 열두 개의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련이 숨을 쌕쌕 몰아쉬며 뿌듯한 얼굴로 단목천기를 돌아보았다. 단목천기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 채 흉흉하기까지 한 기세를 숨기지 않고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찌…….”
“네?”
그러나 단목천기가 뭐라고 말을 완성하기도 전이었다. 련이 ‘악!’ 하는 소리와 함께 거꾸러졌다. 갑자기 격하게 움직인 탓에 쥐가 나고 만 것이다.
단목천기는 하려던 말을 삼키고 얼른 바깥을 향해 사람을 불러들였다. 약당에서부터 사람들이 분주하게 달려왔다.
* * *
단목천기는 떨리는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월영재의 뜰을 서성였다.
총관 강립은 당혹스러움을 숨기지 못하는 태상가주의 모습을 본 일이 드물어 놀라면서도 그의 마음을 이해했다.
한 세가의 총관으로 살아오면서 신기막측한 것이야 못 본 것보다 본 것이 많다고 자부하는 강립이었으나 그와 같은 모습은 본 일이 없었다.
모든 무인은 자신만의 검로를 가지게 된다.
같은 무공을 익힌 사형제지간에도 미세하게 다를 수밖에 없다. 키가 다르고 팔다리의 길이가 다르고 생각하는 바가 다르니, 그 손끝에서 나오는 칼 역시 다른 것이다.
그런데 그가 본 것은 그렇지가 않았다.
단목천기가 작고 어려져서 낙성십이검을 펼친다면 그러한 모습일까?
거대한 체격의 단목천기가 펼쳤던 그 검술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작은 소녀의 손에서 펼쳐졌다. 아주 작은 버릇까지 그대로 흉내 낸 듯했다. 흉내라고 해도 그 정도라면 경지라 이를 만했다.
그런데 그것을 이제 겨우 열 살도 되지 않은 어린 소녀가 해낸 것이다.
본 것을 고스란히 따라 할 수 있다면, 따라 한 것을 이해하고 익히게 된다면, 이다음 것을 배우게 된다면…….
‘하나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찌…….’
총관은 속으로 탄식을 삼켰다.
세가의 장손이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상태인 걸 보고서 저것이 생강시와 다를 바 무어냐고 떠들어 대는 자들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옛날이었다면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게 다 세가의 힘이 쇠락하여 그렇다. 단목천기가 수십 년 전 혈라곡을 물리쳤으나 부상을 입고서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뒤를 이어받아야 했을 장자가 죽었기 때문에, 장손이 정신을 차리지 못했기 때문에…….
비극은 차례차례 왔고 이것이 차곡차곡 쌓이자 마치 저주 같았다.
그리고 그 저주에서 완전히 헤어 나오지 못한 것 같았다. 단목련은 내공을 쌓을 수가 없으므로.
강립이 입술을 짓씹는 동안 단목천기가 조용히 물었다.
“아이 상태는 좀 어떻다 하더냐?”
“의원 말이 갑자기 몸을 격하게 움직여 다리에 경련이 일어나긴 했지만 지금은 진정되었고, 별다른 문제는 없다 합니다. 오히려 예전보다 아주 많이 건강해졌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내일은 근육통이 심하게 올 테니 주의하는 게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란다고 초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펼쳤으니…… 경련 정도로 끝난 것이 도리어 천만다행이다.”
당연히 도중에 제 발에 걸려 넘어지거나 그게 아니어도 전부 기억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 몇 초식 못 가 멈출 줄 알았다. 그러니 자신이 적당한 시점에서 멈춰 세웠어야 했는데.
그러나 그 누가, 어찌 그럴 수 있었으랴?
그의 눈앞에서 재능이란 이름의 기적이 펼쳐지고 있었는데. 그걸 멈춰 세우는 건 도리어 죄를 짓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차라리 죄를 지을 걸 그랬다. 단목천기는 내심 후회했다.
있는 재능이 도망가는 것도 아니거늘, 그리고 도망간다 하여도 아무 의미 없는 것이거늘.
아직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강 총관. 련아의 거처를 월영재로 옮기라 이르게나.”
“예?”
갑작스러운 말에 저도 모르게 반문했던 총관이었으나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예,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 * *
“누이이…….”
단목비가 련의 다리에 딱 붙어서 작은 손으로 조심조심 그녀의 무릎을 두드리며 울상을 지었다. 경련이 일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놀라 달려온 것이다.
단목비와 함께 온 화륜 역시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누이이…… 많이 아파요? 이제 괜찮아요?”
아프냐는 질문과 괜찮으냐는 질문을 동시에 하는 단목비를 보고서 련은 절로 웃음을 흘렸다.
“비아야, 륜아야. 천자문은 전부 다 외웠어?”
단목비는 훌쩍거리면서 대답을 살짝 피했고, 그사이에 화륜이 가까이 다가와 단목비를 끌어내렸다.
“비아는 아직 다 안 외운 것 같고, 륜아는? 다 외웠어?”
“대체 뭘 어떡하면 무공 배우는 첫날부터 경련이 난대요?”
“다리는 내가 너무 열심히 해서 그런가 봐. 그런데 너 천자문에 대해서는 대답을 안…… 악!”
련이 단목비의 머리를 쓰다듬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화륜은 단목비가 하듯이 가볍게 손을 뻗었다가, 날렵하게 움직여 련의 팔뚝을 붙잡았다.
“누이!”
그러자 단목비가 화들짝 놀라서 화륜의 곁에 바짝 붙었다.
정확히는 련의 팔을 붙잡은 게 아니라 한 곳을 강하게 눌렀던 화륜은 미간을 모은 채 입술을 삐죽였다.
“많이 아파요? 경련 났을 땐 여기 누르면 좀 괜찮다던데.”
“저, 정말? 이대로 우화등선해서 괜찮아지는 거 아니고?”
련의 시답잖은 소리에 그녀를 한번 쏘아본 화륜은 처음보다는 좀 더 부드럽게 꾹 눌렀다.
“유모 불러서 계속 눌러 달라고 해요.”
“난 이제 정말 괜찮아.”
“그러게 내가 다른 거 하라고…….”
화륜이 중얼거리듯 하는 말이 뭘 하지 말란 뜻인지 알아듣지 못한 단목비는 저도 화륜처럼 련을 주물러 주겠다고 달라붙기만 했다.
련이 그런 단목비를 살살 쓰다듬어 주자 단목비는 누이에게 매달려 금방 잠들고 말았다.
누이가 아프다는 얘길 듣고 놀란 바람에 피곤해진 모양이었다.
련은 잠든 동생을 옆에 뉘어 쓰다듬어 주면서도 동생 몰래 화륜을 살그머니 쏘아보며 속삭였다.
“너 자꾸 그런 얘기 할 거야?”
“흥.”
“다른 데 가서도 이러면 너 진짜 큰일 나. 응?”
련이 속 타는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자신이나 단목비야 그러지 않는다고 해도, 다른 세가에서는 고아 하인이 배우라는 건 나 몰라라 하며 상전의 앞날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며 콧소리나 흥 내는 작태를 보았다간 당장 매질을 했을 터였다.
행여나 화륜이 다른 위세 높은 가문에 거둬져 하인이 되어서도 이랬을 거라고 생각하면 속이 바짝 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