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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24)화 (24/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24화

‘헉. 설마 그래서 매 맞고 도망쳐 마천교에 투신한 건가?’

련이 자신의 추측에 내심 무게를 실을 때 화륜이 인상을 찌푸린 채 그녀를 쳐다보며 목소리를 죽여 말했다.

“제가 왜 다른 데 가서 이런 얘길 해요?”

“아니…… 내 말은…… 네가 걱정이 되니까 그러지.”

이 건방진 꼬맹이야!

련이 애타할 때 화륜은 입술만 내밀고 투덜거렸다.

“전부터 자꾸 그러는데, 뭐 다른 데 가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럼 안 갈 거야?”

무심결에 반문했던 련이었는데, 순간 그녀의 눈이 크게 뜨였다.

련의 새까만 홍채 위로 흩어진 별빛들이 사르르 반짝였다.

“갑자기 무슨 소릴 하시는…….”

“너 계속 여기 있을 거야? 나하고 같이 있을 거야?”

자신은 무심결에 화륜이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당연한 일이다. 화륜에게서 마천교 소교주의 그림자를 떨쳐 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화륜이 정말 계속 같이 있을 거라면?

앞으로도 쭉 단목세가에서 함께할 거라면?

“……싫으면 뭐 쫓아내시든가요.”

“나는 영원히 안 쫓아낼 건데. 그럼 넌 안 갈 거지?”

“아무 데도 안 간다니까요.”

“계속 여기 있을 거지?”

“네, 네.”

화륜은 다소 귀찮아진 듯이 그녀를 어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련은 연거푸 대답을 재촉했다.

“안 갈 거지? 계속 있기로 한 거야. 약속했어.”

화륜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련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련이 으름장을 놓았다.

“너 약속 어기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뭘 또 어떻게 되는데요…….”

기세 좋게 말을 한 건 좋았는데 아무 말이나 내뱉다 보니 대꾸할 게 궁색해졌다.

련은 얼른 머리를 굴렸다. 저 나이 때 애들이 싫어할 만한 게 뭐가 있지?

“어…… 맛있는 것도 안 주고, 어? 너랑 말 안 해. 평생 너 미워할 거야. 알겠어?”

“예, 예.”

일부러 어린애 눈높이에 맞춰서 을러댄 것인데 도리어 화륜 쪽이 어린애랑 놀아 준다는 듯 의젓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련은 불퉁한 표정을 짓다가 그만두었다.

화륜이 어디로도 가지 않을 거라 생각하자 마음이 부르고 따스한 기분이 들었다.

미래의 마천교 소교주였을 이가 풍광 좋은 항주의 한 장원에 눌러앉아서, 느긋하고 행복하게 살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호상을 맞이하며 귀천하는 미래.

‘행복이 별거 있나…….’

무공 배우기 싫다는 걸 억지로 배우게 할 필요도 없다. 하고 싶은 거 하면 되지. 재능이 아깝기야 하지만 싫다는 걸 억지로 시키는 게 더 못할 짓이다.

두뇌 회전은 빠른 것 같으니 과거에 응시해서 관리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악기에 취미가 생길 수도 있겠다. 시나 서화도 좋지. 그의 말마따나 상방에 들어가서 일을 해도 되고.

‘마천교의 장래 소교주? 그건 자기네 알아서 찾으라고 해.’

련은 그저 흐뭇해했다. 이 조그만 꼬맹이가 만 리 밖에서 헤매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한결 마음이 놓였다.

* * *

사천성 성도의 어느 어둑한 골목.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 두 사람이 건물 사이의 어둡고 습한 구석에 우두커니 서서, 손바닥만 한 놋쇠 잔을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 명은 머리가 검은 올 하나도 없이 새하얀 색이었고 다른 한 명은 흰머리 하나 없이 새카만 색이었다.

흑백의 대비가 선명해 골목 안이라 해도 눈에 띌 법했는데 거리를 지나다니는 누구도 그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거기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이게…… 이게 어찌 된 일이냐, 흑담!”

“내가 물을 말이다, 백담!”

그들이 사천성 한가운데에서 이렇게 헤매고 있는 건 손 안의 잔에서 아무런 빛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분명……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선명하게 빛이 나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우리가 교를 나왔지. 그런데 이게 어인 일인지…….”

“혹시 죽은 것 아니냐?”

“삼십육천강을 타고난 아이가 어찌 그리 쉽게 뒈지겠느냐?”

“그러면 왜 빛이 있다가 없어진단 말이냐!”

“일단 교로 다시 돌아가서…….”

“말도 안 되는 소리!”

머리가 새하얀 노인, 백담이 기겁하며 외쳤다.

“성좌보잔(星座寶盞)을 들고 교를 나왔는데 빈손으로 돌아가자니!”

성좌보잔은 잔 세 개가 한 벌로, 마천교가 모시는 구천현녀(九天玄女)로부터 받았다는 신물이었다. 교주는 때가 되면 그것을 신뢰하는 장로들의 손에 쥐여 주며 교 밖으로 내보냈다.

바로 자신의 후계자를 찾을 때였다.

성좌보잔은 삽십육천강(三十六天罡)을 타고난 아이가 태어나 대여섯 살이 될 즈음이면 그 잔 속에서 빛을 발했다. 그 빛의 방향을 나침반 삼아 후계자가 될 아이를 찾는 것이다.

“쉬벌, 잔에 뭐가 떠오르는 게 있어야 소교주든 소교주 후보든 찾아갈 거 아니냔 말이다! 사천성 요리도 질렸다. 여기 미친놈들은 매운 걸 못 먹고 뒈진 원한이라도 있는 건지…….”

매운 걸 잘 못 먹는 흑담이 넌덜머리를 내며 말했다. 백담이 침음성을 흘렸다. 그도 사천의 요리가 부담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자식들은 벌써 후보를 찾아서 교로 돌아갔다던데…….”

잔이 세 개 있으니 후보도 세 명이다. 그리고 장로들의 흥망성쇠도 이 잔이 찾는 아이에게 달려 있었다.

다른 쪽으로 간 장로들은 벌써 아이를 찾아 돌아갔다는데, 자신들이 찾는 ‘천괴성(天魁星)’ 아래 태어난 아이는 그림자도 찾을 수가 없어 사천 한복판을 하염없이 빙글빙글 돌고만 있는 중이었다.

“일단 동쪽으로 가자.”

몇 달 전까지 이 성좌보잔에 떠오른 빛은 일관되게 동쪽을 가리켰다.

그러다 사천에 당도할 즈음하여 갑자기 그 빛이 사라졌다. 흑담과 백담 두 사람 모두 당황해서 사천 일대를 조용히 수색했지만, 그 어디에도 흉성을 타고난 아이를 찾을 수는 없었다.

교의 후계자가 될 아이가 여기에는 없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아이가 쉽게 죽었으리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른 이변이 분명 있으리라…….

흑담이 날카롭게 되물었다.

“동쪽으로 갔는데도 없으면?”

백담이 대답했다.

“하남성에 무림맹이 있지 않으냐. 그쪽을 통해서 교에 연락을 넣으면 되지 않겠느냐. 뭐 사람을 더 보내 달라고 하든 어쩌든 그때는 보고를 하자고.”

사천성의 동쪽, 섬서성 너머에 하남성이 있다. 백담의 말은 일견 합리적으로 들렸다.

“무림맹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은데.”

백도 무림인에 대한 꺼림칙함을 느끼는 거라면 마천교인으로서 기본 소양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지금 그들이 ‘무림맹’으로 한데 엮인 뒤에도 여전했다.

“그러다 사천에서 계속 비비다가 당가와 마찰이 생겨도 귀찮을 거다.”

물론 그들은 그런 일이 생기면 힘과 설법으로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지만, 지금은 교의 후계자를 탐색하는 신성한 기간이었다.

“그래. 곤륜파 놈들도 언제 따라붙을지 모르고.”

마천교의 본거지와 그나마 가장 가까운 것이 곤륜산이다 보니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기도 했다.

무림맹으로 엮여 있으니 서로의 존재만으로 사건이 발생하지는 않겠지만, 서로 마주 앉아서 담소를 나눌 사이도 아니었다.

백담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거기까지 간 김에 항주에도 한번 들르고.”

“항주?”

흑담이 눈을 날카롭게 치떴다. 절강성 항주에는 두 사람이 노리는 게 있었다.

“동파육?”

“동파육!”

흑담과 백담이 서로 마주 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흑담이 성좌보잔에 담긴 물을 바닥에 버리고 비단으로 감싸 백담에게 건넸다.

백담이 성좌보잔을 품에 갈무리하고는 두 사람이 나란히 골목 밖으로 빠져나왔지만, 사천의 그 누구도 두 사람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 * *

만송상단에 보낼 청련수 포장을 마무리 지으면서, 단목현우가 아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청련수를 만든 사람이 우리 련아라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네?”

련이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갸웃하자 단목현우가 머쓱한 듯 덧붙였다.

“아니 그냥 이 숙부 생각에는…… 우리 련이 재능이 이렇게 뛰어나니까 모두가 알면 좋을 것 같아서…… 병에 뭔가 표식을 새긴다던가 하면 좋을 것 같거든.”

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상표!”

“오…… 상표? 그래, 그런 걸 상표라고 부르면 되겠구나.”

련이 반색하며 그의 생각을 반기는 듯하자 그제야 단목 현우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련은 눈빛을 반짝이며 종알거렸다.

“뭐가 좋을까요? 장기적으로는 단목세가에서 파는 물건마다 붙이기 좋은 걸로…….”

‘숙부가 의외로 이쪽에 재능이 있는 걸까?’

약당주로 묵힐 재능이 아니었던 것 같다. 재경각에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싶었다.

련의 생각을 모르는 단목현우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 세가에서 판다기보다는 네가 파는 것이지. 우리 가문 사람 중에 뭘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는 건 너뿐이구나.”

그 말이 옳다. 한 명이라도 무공이 아니라 돈 버는 재주가 있었더라면.

“아…….”

“아! 오리 어떠냐? 청둥오리를 그리는 거야. 두 마리를 이렇게……. 음, 한 마리는 아기 오리로 할까나.”

“……오리요?”

입을 삐죽하는 련의 버릇을 보고서 단목천기가 몇 번이나 오리같다고 놀리지 않았던가?

“지금 딱이다! 딱! 너다, 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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