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25화
“…숙부.”
“내가 당장 화공을 불러다가…… 내, 내가 잘못했니?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나 보다, 련아야.”
“숙부. 아기 오리 보셨어요? 월영재 연못에 청둥오리 있던 거요.”
“본 적이 있는 것도 같은데…….”
“못생겼단 말이에요. 작고 까맣고 털은 삐죽삐죽 나있고.”
단목현우는 멍하니 듣다가 파안대소했다. 항상 의젓하고 어른스럽던 조카가 새끼 오리를 보고 못생겼다고 투정을 부리고 있자니 왜인지 가슴이 벅찼다.
“아니야,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아주 귀엽단다.”
"아니, 숙부. 그런 개념적인 문제가 아니라 실제 오리 말이에요."
련이 양손으로 허공에 오리의 모양을 잡아가며 열변했지만 단목현우는 목이 빨갛게 될 때까지 웃기만 했다. 아주 오랫동안.
“이거 어떠냐?”
련은 거의 새벽에 가까운 시간부터 찾아온 단목현우를 보며 눈만 깜박였다.
단목현우는 흰자위에 실핏줄이 오른 게 밤을 샌 듯했다.
“숙부? 괜찮으세요?”
“내가 그림을 좀 그려보았다.”
“무슨 그림을…….”
련은 자신 앞에 무릎을 쪼그리고 앉은 단목현우가 펼쳐 보이는 종이를 양손에 쥐고 훑어보다가 눈을 크게 떴다.
다소 거칠지만 붓끝을 한 번에 휘둘러 물가에 앉아있는 새의 형상을 한 그림이 여러장이었다. 부리는 선명한 노란빛 안료로 그려져있다.
“숙부…….”
“네가 보기엔 어떠냐?”
마치 충분히 보기 좋고 멋있고 귀엽지 않으냐는 듯했다. 련은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청련수는 효험이 따로 있으니 병의 정면 말고, 바닥에다 새기면 어떻겠느냐?”
“병을 만들 때 정면에 이 새 그림 그대로 볼록하게 새겨서 만드는 건요?”
“……그림이 마음에 드니?”
“이거요. 큰 오리 작은 오리가 있는 거요.”
련은 가장 뒤에 있는 종이를 앞으로 가져왔다. 단목현우가 그려온 것들은 모두 근사했지만, 마지막 그림은 특히 사랑스러운 데가 있었다. 도톰한 몸체 표현과 마주댄 부리같은 것이.
“그런데 일단은 설 각주님께 먼저 물어보고요.”
“……재경각 설관희 각주 말이야?”
“네. 우리 세가에서 그나마 돈 벌고 쓰는 걸 제일 잘 하는 사람이잖아요.
“……설 각주께서 안 된다고 하면?”
“병의 바닥에만 그리는 걸로…….”
“좋다! 좋아!”
단목현우가 히죽 웃었다.
그리고 설관희는 처음엔 갑자기 들이닥친 련과 보고 놀란 듯했다가, 그들이 내미는 그림과 계획을 진지하게 들은 다음에 손뼉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해가 바뀌어 련의 거처가 월영재로 바뀌면서 짐을 옮기는 동안 련은 텅 빈 방에서 아직 옮기지 않은 자신의 옷가지 몇 개를 펼쳐 놓고 있었다.
그리고 고민 끝에 서너 벌을 골랐다. 곁에 있던 유모 장 씨가 조금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여전히 예쁜 옷들인데요…….”
“난 추위 별로 안 타니까 괜찮아. 그리고 나한텐 조금 작기도 하고.”
련의 말대로였다. 한겨울이 되어도 련은 그다지 추워하지 않았다. 찬 바람을 쐬면 코끝이 조금 발개지긴 했지만.
“몸도 약하신데.”
“다른 외투도 많잖아.”
련이 웃으며 밀어냈다. 유모 장 씨는 몇 번 더 머뭇거리다가 그 옷을 챙겨 들었다.
련의 처소 앞에 만들어 놓은 작은 연못을 옮겨 주겠다며 단목비가 항아리에 연못물을 퍼 담고 있었다.
곁에서 거드는 시늉만 하던 화륜은 유모 장 씨가 련의 옷을 챙겨 가는 걸 보곤 쪼르르 달려왔다.
“저 옷으로 뭐 하려는 건데요?”
“저 옷 팔아서 만두 만들려고. 곧 있으면 이월 보름인데, 그때 거리에서 만두 나눠 줄 거야.”
련의 말에 화륜이 눈을 모았다.
“잔치는 안 하고요?”
“무슨 잔치?”
“아기씨 생일잔치요.”
이번에는 련이 눈을 크게 떴다. 세가에서 따로 잔치를 준비하지도 않는데, 자신의 생일을 화륜이 어찌 알지?
“아! 륜아 너도 그 만두 먹은 적 있어?”
지금 그녀가 말하는 만두란 련의 생일날마다 세가에서 만들어 거리에 나눠 주는 만두였다.
딸이 앓고 있으니 생일잔치를 할 수도 없고, 그저 딸이 낫기를 기원하며 선행을 베푼 것이다.
세가의 형편이 그렇게 유복하지는 않아서 그저 빈민가에 만두 하나씩 나눠 주는 것뿐이었지만.
“뭐…… 네.”
“어어? 정말?”
련은 정말 놀랐다. 이런 인연이 있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마천교 소교주가 옛날 옛적엔 우리 집 만두를 먹었다고?’
“먹으라고 나눠줘 놓고서는 왜 그렇게 놀라요?”
당연히 세가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보면 열에 두셋은 그 만두를 먹었다고 하겠지만 련은 한 번도 그 만두를 먹은 사람과 실제로 만나본 적은 없었다.
“인연이라는 게 있긴 한가 봐…….”
“무슨 만두 하나에 인연씩이나…… 어쨌든 잘 먹었었어요.”
화륜은 약간 부끄러운지 련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빠르게 말했다. 련은 연신 놀라워하다가 눈을 접고 웃었다.
“그럼 내가 무사히 일어난 것도 륜아 덕분인가보다.”
“만두를 준 사람이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주면서 나 좀 낫게 해 달라고 했던 건데 이렇게 나았잖아. 다 륜아가 잘 먹어 줘서 그런 거겠지?”
그렇게 말하며 화륜의 머리를 쓰다듬는데, 화륜이 찡그린 표정으로 련을 바라보며 말했다.
“누가 찾아와서 자기가 만두 잘 먹어준 덕분에 누이가 나은 거라고 하면서 뭐라도 내놓으라고 하면 당장 쫓아내야 돼요. 알겠죠?”
“…….”
“정말로요.”
“알았어…….”
“그건 그렇고, 어쨌든 올해는 생일잔치를 해야 하지 않아요? 생일잔치를 안 한다고 쳐도 길에다 만두를 뿌릴 돈이 남아 있어요?”
화륜이 그녀의 질문을 어물쩍 넘어가며 반문했다. 련은 잠깐 침을 삼켰다.
“……안 부족해! 청련수 계약금도 들어왔고.”
거기다 청련수가 팔리기 시작하면, 비록 큰 액수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돈이 돌기 시작할 것이다.
그녀의 기대대로 견언조의 셋째 아들이 잘만 해 준다면 생각보다 훨씬 큰돈을 기대할 수도 있었다.
견언조 앞에서야 청련수가 팔리면 팔리는 거고 아니면 말고, 라는 식으로 대꾸하긴 했지만 솔직히 잘 팔렸으면 좋겠다는 게 련의 내심이었다.
그런 생각이 있으니까 장래가 보장된 장원 급제자를 굳이 광고판으로 쓸 생각을 한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만 의지할 생각은 아니었다. 청련수는 작은 시작에 불과했다.
‘앞으로는 어떻게든 세가도 좀 일으켜 세우고, 돈도 벌고, 많이 할 거니까…….’
“그럼 생일잔치는 안 해요?”
“어, 그게…….”
련은 뺨을 긁적였다. 어머니 위지청이 자신의 생일잔치에 대한 얘기를 한 적은 있었지만 그걸 무른 게 련 본인이었다.
잔치를 열 비용으로 매해 해 온 만두 나눔을 계속하자고 얘기하며.
솔직히 말해서 병이 낫길 기원하며 만두를 나눠 주었는데 당사자가 병이 나으니 만두가 끊기면 사람들 입장에서는 자신이 아프던 때가 더 낫다고 여기지 않겠는가?
그게 고작 일 년에 한 번 주는 보잘것없는 왕만두 하나라도 말이다.
하지만 화륜 같은 어린 소년들에게는 공짜 만두보다는 세가에서 열릴 잔치가 더 기대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련이 그에 관해 달래 주려는 찰나 화륜이 화들짝 손을 내저었다.
“제가 잔치하고 싶다는 거 아니에요.”
“륜아 생일에는 잔치하자!”
“아니, 잔치하고 싶은 거 아니라니까요.”
“우리 륜아 생일이 언제지? 내가 돈 많이 벌어서 우리 륜아 생일잔치는 진짜 성대하게 해 줄게. 약속만 지키면.”
“무슨 약속이요?”
“계속 여기 있겠다고 약속한 거 그새 잊었어?”
“아, 그거.”
네네, 하고 화륜이 건성으로 대꾸했다.
“그래서 륜아 넌 생일이 언젠데?”
“몰라요.”
농담하지 말고 말해 달라고 조르려던 련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위지청 말이 화륜은 친인척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고아라고 했었다.
세가의 하인이 된 소년을 뜯어먹으려고 달려들 친척조차 없는. 생일을 모르는 게 당연할지도 몰랐다.
‘천화륜 생일이 언제였더라?’
애써 옛 기억을 더듬어 봐도 떠오르는 건 없었다.
일단 아무리 흑천련과 마천교, 백도맹이 무림맹 하나로 엮여 있다 해도 백도맹 한가운데에서 마천교 소교주의 생일잔치를 해 주는 일은 결단코 없었으니까.
‘자기네들끼리야 했을지도 모르겠네.’
“음, 그래? 그러면 이참에 생일을 만들까?”
“맘대로 하세요.”
“그럼 구월 보름날 어때?”
화륜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조금도 관심이 없구나…….’
련이 내심 탄식하며 슬쩍 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얗게 종이를 바른 창 위로 스르륵 글자가 떠올랐다.
화륜
무공 : 일부 동기화에 실패했습니다.
자질과 오성 : 일부 동기화에 실패했습니다.
고민 : 일부 동기화에 실패했습니다.
련은 잠깐 입술을 달싹이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화륜은 련을 향해 왜 신 포도라도 먹은 것처럼 웃냐고 물어보곤, 연못물 옮기던 단목비가 기어코 단지 깨 먹는 것을 향해 혀를 차며 걸어갔다.
‘정말 생일이 없는 거였다지만 그래도 단번에 그렇게…….’
련의 눈길이 마지막 줄로 향했다.
비고 : 생일─구월 보름
화륜의 생일이 생겼다. 그녀가 정해 준 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