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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27)화 (27/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27화

* * *

월영재 안은 귀신도 숨을 죽일 만큼 조용했지만, 그 밖은 간신히 억누른 긴장과 들뜸으로 들썩거렸다.

단목천기는 한 시대를 풍미한 위인이었다. 그의 몸이 성할 적에는 나는 새마저 단목세가의 대문 앞에서 멈추어 섰다는 얘기가 진담처럼 떠돌아다녔다.

비록 그가 혈라곡과 싸우며 입은 부상으로 말미암아 한 꺼풀 꺾였다 하더라도, 무월검 단목천기가 이 시대의 거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붕새의 한 걸음과 참새의 한 걸음은 격이 다른 법. 그가 이번에 얻을 경지를 미리들 셈해 보기 바빴다.

“어떻게 이렇게…….”

“이번에야말로 잔치를 하지 않을까요?”

세가의 전부가 들떠 있는데 재경각도 빠지지 않았다. 초일은 만송상단에서 보내온 문건을 정리하며 들떠서 말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됐지?”

“예? 뭐가 말입니까?”

변화는 느리지만 빨랐다.

썰물이 빠지는 걸 지켜보고 있을 땐 전혀 모르지만, 정신을 차려 보면 하룻밤 새에 온 세상 바닷물이 다 사라져 있는 것처럼.

설관희는 재경각에 언제부터 활기가 돌았는지 곱씹어 보았다.

세가에 어둔 그림자가 내려앉던 순간은 선명하게 기억했다.

단목천기의 부상을 낫게 할 도리가 없다는 말을 하던 독선 당유벽의 비참한 표정을 본 그날.

단목련이 울지도 웃지도, 누군가를 바라보지도 않는 산송장과 다를 바 없다는 걸 안 그날…….

단목현성의 장례를 치르던 날 쏟아지는 빗방울이 모두의 옷과 뺨을 차게 식히며 부연 김을 뿜어내던 그날.

그럼 빛이 들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지?

이 역시 명확했다. 단목련이 벌모세수를 받고 깨어난 이후부터.

설관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세상에는 이따금 그런 사람이 있다. 스스로의 존재 전후로 모든 걸 바꿔 버리는 사람.

본인의 실력이 아니라면 운의 흐름이, 그게 아니라면 시대의 방향이 향하는 사람.

“역시 아기씨가…….”

“잔치 준비 하란 말씀이세요?”

초일이 들뜬 표정으로 되물었다. 설관희는 인상을 팍 찌푸린 채 고개를 내저었다.

“무슨 소리야? 그런 짓은 꿈도 꾸지 마라. 그보다 바깥에 하인 녀석들은 왜 저리 소란스러워? 태상가주님께서 지금 깨달음을 얻고 계신다 하지 않았느냐! 얼른 가서 조용히 하라 일러라.”

내쫓긴 초일은 밖에 나가서 하인들과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더니 도리어 놀란 얼굴을 하고서 안으로 들어왔다.

“보니까 관리들이 여기저기 방을 붙이고 있는 모양입니다.”

“무슨 방을?”

“이번에 향시 있었잖아요! 그 합격자 명단이요.”

“그게 우리 세가 녀석들하고 무슨 상관이라고…….”

여기까지 말한 순간 설관희는 깨달았다. 재경각에는 글자를 아는 하인들이 제법 있었다.

그들이 붙은 방에서 아는 이름을 보았으니 소란이 일어난 것이다.

그들이 아는 이름 중에서 저 방에 적혀 있을 인사란…….

초일이 천진하게 입을 놀렸다.

“아니 글쎄, 만송상단 상단주님의 셋째 도련님이 떡하니 향시에 장원 급제를 하셨답니다! 그래서 다들 수군거리느라…… 설 각주님? 괜찮으세요?”

순간 설관희가 비틀거린 바람에 초일이 놀라서 다가왔다.

설관희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폭죽이 미친 듯이 펑펑 터지는 꼴을 가만히 내버려 둔 채 멍하니 밖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너라.”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 방을 떼 오라고! 만송상단 셋째 도령이 장원 급제했다는 그 방을 하나 떼서 가져오란 말이다!”

초일이 화들짝 놀라서는 귀를 틀어막고는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곤 어느새 뒷면이 다소 너덜너덜한 방을 가지고 돌아왔다.

“허…….”

초일의 말대로였다. 셋째 견위학의 이름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목록의 가장 앞에 있었으니까!

‘정말로 견위학이 장원 급제를 했다고?’

방을 쥔 설관희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세가의 재정을 다루는 일이었기에 설관희 역시 청련수 판매가 어떻게 되는지 들은 바가 있었다.

단목련이 청련수 담당으로 만송상단 대장궤 견언조의 셋째 아들을 찍으며 그가 급제하기만 하면, 그가 쓰던 청련수가 불티나게 팔릴 테니 더는 바랄 게 없다고 했다던가.

그 얘길 들었을 때도 정말 놀랐다. 그 말은 견언조의 마음을 사기에 충분했을 것이고 또한 셋째는 어찌 되었든 과거를 치러야 하는 몸이니, 청련수는 결국 견언조가 직접 담당하게 되었을 것이다. 단목세가의 직계와 하는 거래를 아무에게나 맡길 수는 없으니까.

그것만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셋째가 정말로 장원 급제를 하다니? 그럼 그가 쓰던 청련수는 이제 정말…….

“아기씨는 어디에 계시느냐?”

“네?”

“련아 아기씨 말이다!”

“아기씨는, 어, 오늘은 약당주님께…….”

하지만 설관희는 곧장 련에게 달려갈 수 없었다. 만송상단의 사람이 우르르 찾아왔기 때문이다. 마치 혼이라도 나간 듯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그들 역시 자신들의 셋째 도련님이 이런 성과를 낼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 * *

“모두 만송상단에서 네게 보낸 선물이라는구나.”

“저한테요?”

련이 얼떨떨한 얼굴로 반문했다. 창고에 착착 쌓이는 물건들을 관리 감독하고 있던 재경각주 설관희가 련과 단목현우가 온 것을 보곤 얼른 달려왔다.

“아기씨! 약당주님, 오셨습니까.”

“련아 선물이 왔다기에 보러 왔습니다. 만송상단 사람들은요?”

“태상가주께 좋은 소식이 있으신 줄 미처 몰랐다며 죄송하다고 그 선물도 가져오겠다고 황급히 돌아갔답니다.”

“그럴 것까지야…….”

단목현우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심 기분이 좋은지 소맷자락을 들어 입가를 가린 채 히죽 웃었다.

련은 산처럼 쌓인 것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런데 선물은 장원 급제 하신 그 숙부가 받으셔야지, 왜 저한테 보내셨대요?”

아무래도 선물을 줄 사람과 받을 사람이 뒤바뀐 것 아닌가?

재경각주가 어깨를 단단히 펴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야 아기씨께서 만들어 주신 청련수를 쓰고 그 댁 도련님이 이렇게 큰 덕을 보았으니 당연한 것 아닙니까. 지금 보낸 것도 소식을 듣자마자 급히 인사를 대신해 보내는 것이니 제대로 된 것은 나중에 다시 보내겠다고 하였습니다.”

보아하니 자기네들도 도련님 소식에 놀라고 얼떨떨해서 우왕좌왕하다가, 청련수 주인인 자신에게 감사 인사부터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련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쌓이는 상자와 보물들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장원 급제……!’

정말로 그가 장원 급제를 했다. 청련수를 쓰고 장원 급제를 한 사람이 나오고야 말았다!

앞으로 자신이 직접 만든 청련수 가격은 두 배, 세 배 이상도 뛸 것이다. 의각을 통해 공급하는 청련수 수요도 획기적으로 늘 것이다. 드디어 세가에 금전적으로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네가 만든 청련수가 참으로 신통하기도 하지. 어찌 그리 덜컥 장원 급제를 하는지.”

“정말로 청련수 덕이라기보다는, 사실 그 숙부가 아주 영명하셔서…….”

“위학 공자라고 해야지, 련아.”

“네?”

단목현우가 뜬금없는 소리를 하며 생각에 골몰하느라 삐죽이 나온 련의 입술을 꾹 눌러 주었다.

련은 들여다보던 자개 상자에서 고개를 들었다.

단목현우는 당연한 문제를 지적한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재차 말하면서 련이 바라보던 것을 슥 꺼내 주었다.

“네 숙부는 나고, 그 사람은 견 씨네 아들이니 견 공자라고 해야지. 이거 아주 예쁜 백옥 피리로구나.”

구렁이 담 넘듯 화제가 전환되었다기에는 단목현우가 구렁이를 직접 들어다 옮긴 듯한 꼴이었다.

련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숙부라고 불러서 심통이 난 것 같았다.

련은 속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이 피리를 한번 쥐어 보련?”

서늘한 백옥의 감촉이 손에 감겨 오며 눈앞에 글자가 떠올랐다.

영기 : 33/100 (12▼)

장인이 백옥을 깎아 만든 피리 : 영력 용적 12

‘와. 좋은 보석으로 만든 거면 다 되는 건가?’

옆에 서 있던 재경각주가 헛기침하고는 그 피리에 대해 설명했다.

“역시 아기씨 안목이 좋으십니다. 이번에 온 것 중에 그게 가장 값진 것인데, 향린적(香鱗笛)이라고 하는 피리입니다. 백옥을 깎아 만들었지요. 숨을 불어넣으면 월궁항아도 떨어뜨린다는 소문이 있는 보물인데 그게 만송상단에 있었나 보군요.”

련은 이게 가격이 얼마쯤 되는 거냐고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곁에 선 단목현우가 흡족한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목련을 다른 말로 향린이라 한다는 걸 알고 있느냐? 목련은 꽃잎이 모두 향을 낸다 하여 붙은 말이지. 네가 이 피리로 선율을 연주하면 선율에서도 향기가 나는 듯하겠구나.”

단목현우의 목소리에서 모종의 기대감이 느껴졌다. 피리가 영기를 머금는 걸 보고 흐뭇해하던 련이 조금 늦게 고개를 든 사이 단목현우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

“내가 큰형님만큼은 아니어도 피리는 연주할 줄 아니, 너에게 알려 주면 딱이겠구나! 모처럼 이렇게 좋은 피리도 생겼으니.”

그렇게 말하는 단목현우는 싱글싱글 웃는 얼굴이었다.

련은 죽은 자신의 부친에 대해 드디어 말할 수 있게 된 단목현우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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