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28화
“제가 피리를 잘 불게 되면 숙부께선 비파를 연주해 주실 거죠?”
“비파 연주는 우리 집에서 내가 제일이란다.”
거기까지 얘기한 단목현우는 갑자기 내년이 되면 련의 생일잔치를 어떻게 할 것인지 줄줄 늘어놓기 시작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설관희까지 거기에 동참했다.
절강성 제일가는 숙수를 불러다 음식을 하고, 악단은 누구를 부를 것인데 비파는 단목현우가 직접 연주해 줄 테고, 생일 선물은 그날이 올 때까지 비밀, 전등마다 종이를 오려서 만든 꽃을 붙여서 밤까지 빛나게 만들고야 말겠다며.
련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자신이 깨지 않았던 지난 세월 동안 세가의 그 누구도 생일잔치는 하지 못했다.
어린 단목비는 누이도 못 하는 생일잔치를 할 수 없어서 그게 뭔지도 몰랐고, 가장 재기발랄한 시기였을 단목현우는 그 시간을 어둠과 침묵 속에서 보냈으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조카의 생일날 전등에 붙일 종이꽃을 직접 오리겠다며 웃음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련 자신이 그 꽃을 천 송이 만 송이 오려 주고 싶은데도, 단목현우는 련의 마음도 모른 채 눈을 접고 웃으며 련을 번쩍 안아 들었다.
그 와중에 피리가 떨어질 뻔해서 련의 아련하던 눈동자에서 눈물이 쏙 들어갔다.
“우와아악!”
“우, 우와아악!”
* * *
저녁 내내 견위운은 말이 없었다. 그 대신 하인 종 씨가 거의 모든 말을 대신했다.
‘우와’부터 ‘맙소사’까지 그 사이에 수십만 자가 더 들어갔지만 그 동안에도 견위운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러나 종 씨는 그런 주인의 태도에도 서운해하지 않았다. 그런 걸 느낄 겨를이 없었다.
“와. 세상에, 저는 제가 살면서 장원 급제 하신 분을 뵙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장원 급제는 선계에서나 내려주는 것인 줄 알았는데.”
‘단목련은 어떻게 알았지? 우연인가?’
“작은 도련님이 매일 방탕하게 노는 척만 하신 거겠죠? 어휴, 주인 어르신이 매번 얼마나 속을 끓였는데 이렇게 멋지게 장원 급제를 하시다니.”
‘그런 우연이 있을 수 있나? 나한테 그런 조언을 에둘러 해준 꼬마가 위학의 장원 급제에 그 상품을 다 걸었는데, 위학이 정말 장원 급제를 한 게…… 이 모든 게 우연이라고?’
순간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아가씨, 그런데 향린적까지 보낸 건 좀 넘치지 않았을까요? 보통 보물이 아닌데 주인님께서 아시면…….”
견위운은 그제야 대꾸해 주었다.
“아버지가 아시면 뭐라고 하시겠어? 동생의 장원 급제를 이렇게나 기뻐해 줬으니 기특하다고 하시겠지.”
“그건…… 그러실 것 같지만요.”
하인이 약간 민망한 목소리로 수긍했다.
얼마 전 견위정을 포함하여 그의 도박장 친구들이 전원 길거리 시정잡배들에게 얻어맞아 의원 신세를 진 일이 있었다.
그 무리들한테 돈을 빌려서 도박을 한 모양이라나. 한 번만 더 도박과 술에 손을 대면 그땐 손목을 잘라버리겠다며 제법 무섭게 협박을 받은 것 같았다.
견위정 패거리의 부모 중 반은 그 잡배 놈들을 찾아서 죽여 버리겠다고 길길이 날뛰었고, 나머지 반은 가슴 아파하는 한편 은밀하게 기뻐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어찌나 호되게 혼이 났는지 주사위만 봐도 소스라치더라는 것이다.
견위정은 그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타박상을 입은 채 몸져누웠고, 제 도박 친구들이 다 도망친 바람에 딱히 어울려 놀 친구가 없어서 집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견언조는 그 꼬락서니를 보고서 한숨을 한번 쉰 다음, 견위운에게 그녀가 임시로 맡고 있었던 표국 관리 권한을 완전히 넘겨주었다. 본래는 견위정이 관리하던 것이다.
‘이것도 그 애의 말대로 됐어.’
평소에 이성적이고 냉랭하기만 하던 둘째가 첫째의 장래를 걱정해 일부러 손을 썼다는 걸 안 견언조는 심경이 복잡한 와중에도 다소 감명을 받았던 것 같았다.
“어떻게 아가씨가 하신 일인 줄 바로 알아채신 걸까요?”
“상단 안에서 아버지 몰래 뭔가를 하는 게 어렵지, 아버지가 아시게 하는 게 어렵겠느냐?”
하인 종 씨가 그도 그렇겠다며 방긋방긋 웃었다.
“어르신도 어지간히 기쁘신가 봅니다.”
“사람이 너무 좋아도 뒤로 넘어간다는 걸 눈으로 봤지.”
심복이 떼어 온 방을 보고서 못 믿겠다는 듯이 눈만 크게 떴던 견언조가 반쯤 뒤로 넘어갈 뻔했다.
지금도 밖은 잔치를 열어두어 가솔들이 즐길 수 있도록 해둔 차였다.
다만 견언조는 심장이 너무 뛴다며 혼자 처소에 틀어박혔다. 하인 말로는 장원 급제가 적힌 방만 계속 보고 또 본다고 했다.
“우선은 질 좋은 피풍의를 한 벌 새로 만들어 동생에게 보내고, 지필묵을 새로 구해 죽림 서원에 보내야겠다. 동생을 이끌어준 벗과 스승이 있는 서원이니 그 정도 보은은 함이 마땅하겠구나.”
견위운이 냉철한 얼굴로 말했다. 하인 종 씨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곤 허리를 납죽 숙였다.
견위운의 눈동자가 한껏 들뜬 가문의 분위기를 훑었다. 모두가 신명 난 채 떠드는 가운데 그녀만이 차가운 눈동자로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청련수 판매량을 조절해야겠다. 당장 판매 중인 상급 청련수를 모두 회수해라.”
* * *
련은 며칠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월영재 주변을 돌며 산책을 거듭했다.
돌연 찾아든 영감 속에서 깨달음을 곱씹고 있는 단목천기는 운기조식을 거듭하며 세가 비전의 심결을 운용하고 있는 듯했다.
공기가 월영재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피부로 느껴지는 터라 련은 주위를 거닐며 그 공기 가닥가닥마다 영기를 부드럽게 불어넣고 있었다.
이 힘이 단목천기의 단전을 스칠 때마다 그의 상처를 온전히 치유하고 그에게 힘을 되찾아 주길 기원하면서.
“아기씨,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오늘은 산책 도중에 총관을 불러왔다. 월영재 주위의 기류가 말하건대 이제 곧 단목천기가 깨달음을 갈무리하고 심연에서 돌아올 때라고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총관은 거처 안의 기척이 변하지는 않을지 숨을 죽이며 련에게 다가왔다.
그사이 잠깐 걸음을 멈춘 련은 뜨악한 얼굴로 연못 위의 새끼 오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거 봤어, 강립? 이거 못생겼잖아…….”
“워, 월영재에 있는 오리는 청둥오리라 그렇습니다. 아이고, 그리고 아기씨, 이것은 못생겼다기보다는 색이 다양하달까요, 그런 것이지요.”
함께 온 총관 강립이 얼른 변명했다. 단목천기가 평소에 련을 일러 새끼 오리라고 놀리는 걸 아는 탓이었다.
“못생겼잖아!”
“……어…… 어릴 때는, 못난 것인 척을 해야 귀신이 잡아가지 않는다는 말도 있거든요. 태상가주께서 아기씨를 얼마나 아끼십니까? 작은 것 하나도 다 주의를 하시는…….”
“할아버진 귀신이 오면 귀신도 죽여 버릴 사람인데.”
“그게…… 사람 마음이 또 그렇게, 그렇지가 않고…… 그렇지요.”
련은 불만을 한껏 담아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연못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때 련의 마음을 알지도 못하는 오리들이 삐삐거리며 그녀에게로 다가와서, 어느덧 연못 가장자리는 오리들로 가득 찼다.
련은 그런 청둥오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옆에 있던 강립이 화들짝 놀라서 그런 련을 말리려 했다.
“아이고 아기씨, 연못에 두고 밥을 주는 오리라곤 해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사나운 놈들이니…….”
“응?”
청둥오리가 목을 반쯤 꺾다시피 하며 련의 손에 머리를 비비며 애교를 부려 댔다. 강립은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이 밥을 줄 때도 맹렬하게 굴기만 하던 놈들이 유순한 양처럼 굴고 있었다.
청둥오리는 자신의 새끼를 소개해 주기라도 하듯이 련에게로 아기 오리들을 떠밀었다. 얼룩덜룩한 새끼들이 우르르 련의 손으로 다가왔다.
련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 오리들과 손장난을 치다가 문득 고개를 들고 허공을 쳐다보았다.
“……할아버지가 일어나셨어. 가 보자.”
단목천기는 련과 식사를 했던 그 탁상 앞에 눈을 내리감은 채 조용히 앉아 있었다. 머리칼은 끝이 더욱 투명하게 세었으나 안색은 밝고,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빈방을 꽉 채웠다.
“할아버지!”
문이 드르륵 열리며 작은 소녀가 뛰어든 순간 단목천기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의 안광이 형형하게 빛났다.
“련아야.”
“몸은 좀 어떠세요?”
강립은 혼이 나간 얼굴로 눈치를 살피며 단목천기 앞에 미지근하게 식힌 찻물과 미음을 내려놓았다.
보통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거처를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솔들이 큰절을 하면서 깨달음을 경하드린다고 인사 올리기 마련이건만, 련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처소 문을 열어젖혀서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며칠이나 눈만 감고 계셨잖아요. 차 드세요, 할아버지.”
단목천기는 련이 내미는 작은 찻잔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입가에 댔다.
청명한 기운이 입가에서부터 시작해 천천히 내려가 몸 안으로 퍼져 나가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 기운이 자신의 왼쪽 허리의 오래된 상처 자국을 다정히 매만지는 것도.
그간에 희미하게 느껴왔던 것들이 모두 명확하게 보였다.
지금 눈 앞의 작은 소녀 안에서 쉼 없이 피고 지는 것들이, 그것을 품고 있는 가냘프고 여린 육신이, 그리고 그 모든 걸 감싼 별빛 같은 눈동자까지 선명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