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29화
“이 차도 네가 내린 것이로구나.”
“어? 어떻게 아셨어요?”
련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단목천기는 미음도 한 술 떠 보고는 혀를 찼다.
“세가의 장손이라는 녀석이 부엌에서 미음도 쑤고 찻물도 길고, 아주 바빴구만.”
“네?”
순간 강립이 어깨를 흠칫 떨었다.
‘아기씨가 장손이시긴 하지만…….’
왜인지 그 어감이 조금 강했다. 장손이란 본디 후계자의 후계자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단목련은 이전 소가주였던 단목현성의 첫째이니 아무 일 없었다면 자연스레 련이 소가주가 되었겠지만 지금까지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단목현성은 요절했고 련은 일곱 살이 될 때까지 자리를 보전하기만 해 왔으니, 세가 사람들은 굳이 그녀가 장손이라고 언급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지금 태상가주가 자신의 첫 손녀를 보고서 장손이라고 이르는 것이 평소보다 더욱 묵직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강립의 생각이 길어질 틈도 없이 단목천기가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몸짓에 따라 옷깃이 펄럭였다.
“련아 네가 준 깨달음이니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도 너여야 마땅할 일이다. 나가자꾸나.”
소녀와 총관이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따라나섰다.
월영재의 안뜰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단단하게 잘 다져 놓은 바닥 위로 단목천기는 자국 하나 내지 않고 걸어가 천천히 칼부터 뽑아 들었다.
련은 그의 기세를 피부로 느끼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고수의 깨달음은 이런 건가?’
단목천기가 명상만 거듭했던 며칠 사이에 대단한 훈련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닌데, 기세와 흐름이 그전과는 전혀 달랐다.
하늘이 아무리 높아도 더 푸른 날을 명징히 느낄 수 있듯 그녀의 눈에도 단목천기의 변화가 분명했다.
단목천기는 처음부터 천천히 검을 움직였다. 낙성십이검의 흐름이었으나 그녀가 알던 것에 비해 극도로 느렸다.
하지만 그 느림 속에 흐트러짐은 없었다. 별의 꼬리가 길게 이어져도 어디 하나 어긋나는 바가 없는 것과 같았다.
마침내 그가 묵직하게 마지막 초식을 마쳤을 때. 그의 앞에는 발자국이 하나도 남지 않았으되 열두 개의 칼자국만이 표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단목세가의 검수가 검을 휘둘렀을 때는 모두가 그 뜻을 알 수 있을 만치 분명해야 한다.
그 뜻이 분명하게 하늘을 울렸다. 련이 활짝 웃었다. 련의 눈에 먹으로 그린 글자들이 주르륵 떠올랐다.
단목천기
특성 : 무림을 지킨 / 힘줄 수집가 / 회한에 가득 찬 / 비익조 / 별의 궤적을 본(추가)
낙성십이검 : 12성(회복)
무한보 : 12성
유성진결 : 11성
자질과 오성 : 상-중 (上-中)
고민 : 단목련의 건강, 자신의 의무
이제 세가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 것이다. 분명 그럴 것이라고, 련은 직감했다.
* * *
손녀가 아직 눈도 뜨지 않은 이른 새벽, 단목천기는 아무도 없는 월영재의 뜰에서 검을 휘둘렀다.
몇십 년이나 그를 괴롭혀 온 허리께의 통증과 불안정했던 단전은 이제 더는 없다.
혈라곡의 독에 당한 그의 상처를 두고 오랜 세월 좌절했는데 그것이 씻은 듯이 나았다.
단목천기는 이것이 작은 범주의 환골탈태라는 걸 알아차렸다.
단목천기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자신의 검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검끝 너머로, 작은 소녀의 젓가락 끝이 그리던 검의 궤적을 떠올렸다.
그 궤적을 천천히 회상해 보았다. 등골로 전율이 일었다.
‘어찌 이런 것이 가능한가…….’
일평생 찾아 헤매던 검로가 어떻게 어린 손녀의 손끝에서 보일 수 있었나.
그 아이가 내밀던 차에 담겨 있던 청명한 기운. 공기를 맑게 하고 호흡을 편안히 달래 주던 기류.
‘그러고 보니 키우던 닭도 봉황이 됐다던가?’
그런 얘기야 당연히 헛소리로 치부했는데, 단목천기는 이제 그 얘기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아니, 오히려 모두 이해하게 되었다.
단목천기는 낮게 미소 지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제 조모를 닮은, 별을 박아 넣은 듯이 반짝이는 소녀의 눈동자가 눈에 선연했다.
‘천지신명이시여…….’
가슴이 빠듯해져 왔다. 그간 손녀가 월영재를 바삐 오가며 행했던 모든 일의 궤적이 향하는 바를 절로 깨우쳤으므로.
자신이 가진 힘 탓에 병약했고 그 힘으로 인해 내공을 쌓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련은 그 힘으로 어떻게든 가족을 돕고자 애써 왔던 것이다.
그가 깨달음을 좇는 시간 내내 주위를 맴돌고 그 힘으로 보탬이 되려 노력하면서.
“강립, 왔느냐?”
“가주님…….”
검을 갈무리하고 뒤를 돌아보자 감격에 찬 얼굴을 한 강립이 서 있다.
그 역시 오랫동안 무림 세가의 총관으로 있었던 몸, 단목천기가 검을 휘두르는 모습만 보아도 그가 이전의 힘을 되찾은 것 그 이상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단목천기는 그 유난에 껄껄 웃곤 손을 내젓고 내실로 향했다. 몇 번이나 경하드린다는 말을 하고 나서야 강립은 그간 밀린 일들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흠. 그사이 위학이 기어코 장원 급제를 했단 말이냐?”
강립이 전한 첫 번째 소식은 견언조의 삼남, 견위학의 향시 장원 급제였다.
“예, 지금 항주 전체가 야단법석입니다. 아기씨께서 청련수를 만들어 준 덕분이라며 상단주께서 아기씨한테 벌써 이것저것 보내셨고요. 아! 그중에 향린적도 있어서, 약당주께서 피리 부는 것을 알려 주겠다며 즐거워하셨지요.”
강립의 말에 처음엔 코웃음을 치려 했던 단목천기였으나 단목현우가 기뻐하더라는 얘기에는 흐릿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향린적이라면 언조 놈이 귀해서 아끼는 것이라고 내게 보여 주지도 않던 것인데. 그걸 련아에게 내놨더란 말이냐?”
“그것도 급하게 보낸 것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허이고. 그 청련수로 장사할 생각에 머릿속에서 별이 튀고 있으니 그런 것이겠지.”
단목천기가 딴소리를 하듯 말했다. 강립이 빙긋이 웃었다.
“태상가주님의 경사에도 걸맞은 선물을 보내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게 제 아들의 경사에도 뭔가 내놓으란 말 아니겠느냐?”
“그냥 급제한 것도 아니고 장원 급제를 하셨으니 우리도 선물하는 기쁨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내당주께서 벌써 좋은 물건을 골라야겠다며 바쁘십니다.”
“그 밖에 별다른 일은 없었고?”
“예. 다만…….”
강립은 조금 망설이다가 말했다.
“금가장의 움직임이 조금 심상치 않은 것 같다 합니다.”
단목천기의 입가에 있던 미소에 쓴 기색이 서렸다.
“거기만 그렇겠느냐? 내게 무슨 성취가 있다는 것 같으니 항주에 있는 도장들이 모두 놀랐을 터.”
그 말도 옳았다. 지금 견위학이 항주의 문가(文家)들을 모두 뒤집어 놓아다면, 단목천기는 모든 무가(武家)들을 들썩이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니 항주에서 지금 단목세가를 제치고 가장 이름을 떨치고 있는 금가장 역시 술렁일 것이 당연한 일이다.
“하나 이제 그런 것은 걱정할 것 없다.”
단목천기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길 반복하며 손녀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별처럼 반짝이는 입자들이 유영하던 눈동자.
그 별빛 너머에는 무엇이 있나?
여명이 있다.
빛은 다시 떠올라 타오르게 될 것이다.
“그보다 이제 슬슬 하남성에 사람을 보내야겠구나.”
“하남성에…… 말입니까?”
하남성에는 흑천련, 마천교, 그리고 백도맹이 거대한 악 혈라곡과 맞서기 위해 만든 무림맹이 있다.
그리고 그 무림맹에, 지금 단목천기의 딸 단목현요가 남편과 함께 단목세가의 외당주이자 가주 대행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외당주에게 이제 돌아와도 되겠다 이르란 말이다. 그간 무림맹에서 고생이 많았으니 쉴 때도 됐다. 세가로 돌아오라고 해.”
강립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단목세가 외당의 당주는 둘째 단목현요다.
고생이 많았으니 쉴 때가 되었다는 얘긴 이제 가주 대행 자리를 내놓으란 뜻이기도 했다.
강립은 파란을 예감했다.
* * *
“하하. 그게 뭐 내가 잘나서 그런 건가? 매일같이 음주에 가무에 향락만 즐기는 줄 알았으니, 저 알아서 대체 언제 공부를 한 것인지 알 턱이 있나.”
견언조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한창 축하 인사를 늘어놓던 이화전장의 대행수 표정이 조금 끓었다가 겨우 가라앉았다.
이화전장 대행수는 먼 북쪽 산시성 출신으로, 휘주 상인들만큼 자식을 관리로 만들려 눈에 불을 켜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식이 여럿이고 그중에 한둘쯤 관직에 오른다면 그게 나쁜 일도 아니지 않은가?
마침 만송상단과 자주 거래도 하고 있으니 그의 아들과 함께 수학을 시켰는데 견위학이 덜컥 장원 급제 하는 동안 그의 아들은 대차게 낙방을 할 뻔했다.
그가 마지막에 지부대인을 따로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놀기는 둘이 나란히 놀았는데 하나는 장원 급제를 하고 하나는 간신히 낙방을 면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 얘긴가?’
놀았다곤 해도 이쪽 아들 역시 어려서부터 관리를 진로로 삼을 만큼 동네에서는 유별나게 명석한 아이였다.
“그래도 정말 대단하지요. 그런데 제가 듣기로는 그…….”
대행수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아들의 말에 따르면 견위학이 종종 피곤할 때면 미간이나 관자놀이에 톡톡 바르곤 하던 작은 물약이 있다고 했다.
조카처럼 아끼는 아이가 보내 준 거라며 공부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