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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31)화 (3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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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31화

* * *

“일단 제일 먼저 필요한 건 부채.”

“부채…… 요?”

강립이 눈을 깜박거렸다.

“응. 그리고 그 집 도보(刀譜). 금우도법이랬지?”

도보를 구해 달란 요구는 오히려 이해할 만했기에 강립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 문파나 세가의 비전 무보(武譜) 같은 건 한 식구라 하더라도 쉽게 볼 수 없는 것이지만, 역사가 깊어진 곳의 기초적인 무보(武譜)는 어렵잖게 구해 볼 수 있었다.

속가제자가 많아지고 방계가 뻗어 나가기 시작하면서 그 무공을 쓰는 사람이 많아지면 당연한 수순이기도 했다.

단목세가의 낙성십이검만 해도 세가 소속 표사들에게까지 모두 가르쳐 주는 검법으로, 항주 저잣거리에서는 적당한 돈만 주어도 구할 수 있을 터였다.

“부채는 흰색에 아무 무늬도 그림도 없는 걸로.”

“섭선이 좋으십니까?”

“아무것도 없는 흰색 부채면 다 좋아.”

련은 그렇게 대답하며 금가장에서 보냈다는 서찰을 접었다.

아마 금가장의 누군가가 대필해 주었을 번듯한 서신이 접히면서 겹쳐 있던 선경의 글자도 흩어졌다.

‘매번 소매 펼쳐 보고 허공 보고 거울 보는 건 가독성 떨어져서 안 되겠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게 부채였다.

이제 고작 여덟 살짜리가 부채 펼쳐 놓고 있으면 그건 그것대로 조금 우스워 보이겠지만, 그렇다고 백지인 서찰을 들고 다니는 것도 좀 이상한 일 같으니까.

다음 날, 총관 강립이 흰 백옥을 둥글게 깎아 만든 백옥 부채와 새것인 듯 반듯한 서책 하나를 가지고 왔다. 부채는 만송상단에서 보낸 선물 중 하나였는지 무척 진귀해 보였다.

장인이 깎아 만든 백옥 부채 : 영력 용적 3

지금 영기를 담으실 수 있습니다.

‘아니, 이 부채만으로 영기를 좀 담을 수 있다고?’

“아! 정말 좋다.”

매번 흔들리는 옷소매, 자신의 얼굴이 비쳐 보이는 거울 위에나 글자를 띄워 보다가 이렇게 반듯한 곳에 보려니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그 부채가…… 그렇게 맘에 들어요?”

곁에 있던 화륜이 다소 떨떠름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물건에 큰 욕심을 보이지 않던 련이 이렇게까지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는 일은 드물었다.

련은 그런 화륜을 흘끗 쳐다보며 당당하게 부채를 펼쳐 들었다.

“흐음.”

부채의 흰 면 위로 글자가 사르르 올라왔다.

화륜

특성 : 천마파순(天魔波旬) / 일부 동기화에 실패했습니다.

무공 : 일부 동기화에 실패했습니다.

자질과 오성 : 일부 동기화에 실패했습니다.

고민 : 일부 동기화에 실패했습니다.

‘역시 아무것도 안 뜨는…… 응?’

하얗고 둥근 부채 위로 익히 아는 글자들만 자리 잡아갔다. 그러다 낯선 단어가 눈에 띄었다.

‘천마……?’

자신이 아는 그 단어가 맞나 싶어서 부채를 눈 가까이 바짝 가져다 대고 다시 봤지만, 글씨가 바뀌는 기적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진짜 맘에 드나 봐.”

“아, 아니, 아니 너…….”

지금껏 죄다 동기화 실패만 뜨다가 처음으로 특성에 단어 하나가 보였는데 기껏 나온 단어가 천마라고?

련은 아연실색한 얼굴로 화륜과 부채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함께 있는 동안 화륜에게 범상치 않은 구석이 있는 것은 알았지만, 그래도 나쁜 아이는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해 왔는데 그 생각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만 같은 말 아닌가.

“뭐야? 왜 그러는데요? 방금 전까진 그렇게 좋아했으면서…….”

화륜이 련의 곁으로 다가와 하얗기만 한 련의 백옥 부채를 들여다보았다. 매끈하고, 투명하게 희기만 할 뿐인 부채였다.

“아, 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직! 아직 어려서 그런 걸지도 몰라.’

그래, 그럴 것이다.

련은 침울하게 금가장의 기본 도보를 펼치며 생각했다.

화륜이 천마의 자질 같은 걸 가지고 태어났다면 그걸 바꿀 시간이 좀 더 있어야 할 것이다.

련이 그렇게 내심 생각하며 부채를 내려놓고서 금가장의 도보를 세 번쯤 다시 봤을 무렵이었다.

“제가 대신 싸워 줄까요?”

련은 고개를 들었다. 화륜은 품에 백련을 안은 채 난간에 기대어 바깥 풍경을 보면서 발끝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련의 곁에 앉아만 있는 게 지겨운 것인지 나른한 표정으로 턱을 괴고서.

련은 저 멀리 서 있는 무사 정영을 한번 흘끗 보곤 다시 화륜을 쳐다보았다. 여기의 대화가 들릴 것 같진 않았다.

“누구랑? 금종하랑?”

“네.”

“누가?”

“제가요.”

“어떻게? 넌 무공 배우기 싫어해서 아무것도 안 배웠잖아.”

“그래도 보고 들은 게 있으니까요.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어요.”

“보고 들은 게 있는 걸로 따지면 당연히 내가 더 세겠지? 아기 화륜보다는?”

련이 배시시 웃으며 하는 말에 그제야 화륜이 고개를 돌리고 련을 쳐다보았다. 왜인지 몹시 답답해하는 표정이었다.

“그 금가장 도령보다도요?”

“그건 잘 모르겠으니까 지금 이렇게 공부를 하는 거지.”

“만약 싸우다 지면 어쩌려고 그래요?”

“지면 지는 거지.”

“아우, 답답해.”

화륜은 마치 어른처럼 가슴을 치며 말했다. 련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지만 화륜은 결국 시큰둥하게 굴던 태도를 버리고 빠르게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하지만 련은 손을 내저었다.

“내가 금종하한테 지면, 나보다 약한 륜아는 당연히 지지.”

“전 안 질 수도 있어요.”

“어떻게?”

“어떻게가 중요한 게 아니고요.”

“그럼 지금 나를 이길 수도 있어?”

“당연히…….”

뭐라고 말하려 했던 화륜은 마치 커다란 독의 바닥에 구멍이 뚫려 물이 다 빠져나간 것처럼 기력이 쇠한 표정이 되어 어깨를 늘어뜨렸다.

“됐어요. 누이 마음대로 해요.”

“우리 륜아, 이 누이가 질까 봐 걱정해 준 거야?”

그런 화륜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천마 어쩌고라는 특성을 본 것에 대한 걱정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련은 보던 책을 덮고는 방긋 웃으며 화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화륜은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녀를 뿌리치진 않았다. 그러곤 련이 자신의 마구 머리를 쓰다듬으며 흐트러뜨리는 걸 방치했다. 련만 신이 나서 활짝 웃음을 지었다.

‘그래! 장래에 뭐가 되든, 특성이란 게 뭐든, 다 무슨 상관이란 말이야? 사실은 이렇게 착한 애인데.’

기묘할 만큼 명석한 화륜은 가문의 장손인 자신이 이번 비무에서 패배하기라도 한다면 절강성에서 단목세가의 이름이 휘청이게 되리란 걸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하인인 자신이 대신 나가서 겨루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련은 화륜의 머리를 마구 헤집고는 꼭 끌어안아 주려고 했지만, 그것만은 화륜이 질색하며 도망쳤다.

련이 깔깔 웃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그날 저녁, 세가에 낯선 손님이 찾아왔다. 허름하고 유난히 소매가 펄럭거리는 장포를 입은 태허진인이라는 사람과 소년 도사라고 했다.

“태허진인? 누군데?”

련의 물음에 정영도 유모도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누군지 잘 모른다는 뜻이었다.

다만 그들이 아주 멀리서 온 것만은 분명했고, 그를 본 단목천기도 몹시 반가워하더란 것이다.

“사람들 말이 곤륜파 사람인 것 같다고…….”

련의 곁에 서 있던 화륜이 작게 멈칫했다. 련은 무슨 일이냐는 눈으로 돌아보았지만 화륜이 도리어 왜 쳐다보냐는 얼굴을 하기에 련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접객당으로 향했다.

접객당에는 이미 가족들이 모두 와 있었다. 안에 있던 위지청이 련을 보자마자 달려 나와 안아 들었다가 손님을 깨닫곤 민망해하며 내려놓았다.

“하이고, 내당주님께서 손에서 놓지 못하실 법도 합니다. 곤륜산이었으면 저 애를 보고선 모두들 선동이라고 제단 위에 올려놓고 받들어 모셨을 겁니다.”

손님, 태허진인이 위지청을 달래듯 너스레를 떨었다.

련은 꾸벅 인사를 하면서도 찬찬히 그를 살펴보았다. 지난 생에서는 찾아온 적 없는 방문객이었다.

“련아, 인사드리거라. 곤륜파의 태허진인이시다. 할아비의 오랜 벗이니라.”

“오랜…… 예? 벗이라뇨! 그리 말씀하시면 제가 받들기 어렵습니다, 어르신!”

태허진인은 화들짝 놀라서는 양손을 휘저었다. 소맷자락이 땅에 끌릴 만큼 길었던 터라 요란하게 펄럭거렸지만 탁상에 놓인 찻잔은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다.

“서로의 뜻을 알고 대업을 함께했으면 벗이지 무엇이겠는가?”

태허진인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련은 이 두 사람이 어떻게 된 사이인지 눈치챘다.

오래전, 단목천기가 선두로 나섰던 동정혈사 때 함께한 사이인 모양이었다.

“태허진인을 뵙습니다. 단목련이라 하옵니다.”

련이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꾸벅 인사하자 태허진인은 함지박만 한 미소를 그리며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네가 이렇게 컸다니, 세월이 빠르기도 하다.”

태허진인은 그렇게 말하면서 그리운 듯 씁쓸한 듯 분한 듯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현성의 딸이 나이가 몇인지 아는 사람조차 없다는 것이…….”

“그 얘기는 됐다. 이제 와서 해 봤자 무엇 한단 말이냐.”

단목천기가 앉아 있던 의자의 손잡이를 가볍게 내리치며 태허진인의 말을 끊었다.

“그보다 이리 오랜만에 어찌 예까지 왔는지.”

“하하…… 어느 날 새벽에 불현듯 한번은 어르신을 찾아뵈어야지 하는 생각이 들지 뭡니까. 그래서 왔지요.”

“곤륜산에서 예까지 만 리 길 이거늘, 고작 그런 이유로?”

“그러게 말입니다.”

“그 먼 길 찾아오지 않는다고 누가 책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도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태허진인은 스스로도 알 수 없다는 듯이 흐릿하게 미소 지었다.

“그런데 사람이 그러면 안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니까 별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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