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32화
“왔으면 재깍재깍 세가에 찾아들 것이지, 듣자 하니 밖에서 또 며칠을 보냈다 하던데.”
“아이고. 저도 그러려고 했는데 아니, 항주 오자마자 들린 소식이 어르신이 깨달음을 얻었다고 시끌시끌하지 않습니까? 이거 영 때가 이상한 것 같다 싶어서 망설이다 보니.”
태허진인이 머쓱한 목소리로 말했다.
단목세가의 가세가 기울어 간다고 모른 체하고 싶지 않아서 예까지 찾아왔는데, 정작 왔더니 단목천기가 커다란 깨달음을 깨달았다고 온 항주가 들썩거리고 있었다.
때가 너무 공교로워서 마치 그의 깨달음을 보고서 찾아온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예상하지 못한 이유였는지 단목천기는 잠깐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이윽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웃지 마십시오. 제가 얼마나 민망했는지.”
“먼 길 나서기 전에 내 깨달음을 예측하고서 예까지 왔다면 정말 곤륜산의 도사라 할 만하다.”
“아! 차라리 그렇게 얘기할 걸 그랬습니다.”
“허허허, 그보다 곁에 둔 아이는 누구냐?”
“제가 제자처럼 키우는 녀석입니다. 엽운아, 인사 올리거라. 하하하! 이 녀석이 있어서 제가 당당히 온 것이지요.”
맑은 눈을 한 선한 인상의 소년이 수줍은 듯이 조용히 손을 모으고 인사했다.
련은 뒤에 선 화륜의 기척이 움찔하는 걸 느꼈다.
‘륜아야?’
련이 흘끗 뒤를 돌아보았지만, 화륜은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제자면 제자지 제자처럼 키우는 건 또 무어란 말이냐?”
“하하…….”
태허진인이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지만 그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못하고 말을 돌렸다.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듣자니 금가장인가에서 단목세가에 비무를 청했다면서요?”
“아이들끼리 배운 걸 시험 좀 해 본다는 게 무슨 비무겠느냐? 대련이지.”
“하여간에 련아가 세가 밖에서 또래와 상대해 본 일이 없을 테니, 엽운 녀석하고 연습을 해 보면 좋지 않겠습니까? 곤륜의 검과 금가장인가 하는 거기의 도는 많이 다르기야 하겠지만서도.”
태허진인의 말에 단목천기는 턱을 쓰다듬으며 엽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엽운은 다소 낯을 가리는지 귀까지 새빨갛게 붉히며 어쩔 줄 몰라서 눈만 내리깔고 있었다.
단목천기가 련을 흘끗 돌아보았다. 련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기대로 빛났다.
‘그렇군. 련아도…….’
그간에 찾아온 손님이라고는 만송상단의 견언조뿐이었으니, 또래 손님을 맞이한 것은 처음인 셈이었다. 친구가 없어서 고아인 화륜까지 곁에 둔 련 아니었던가.
이참에 서로 벗이 되면 그도 나쁘지 않으리라. 단목천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래서 정말 무슨 일로 온 것이야?”
“정말은요,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인사만 드리러 왔습니다. 달리 목적이 있었으면 항주 오자마자 바로 이리로 왔지 면구스럽다고 며칠이나 밖에서 전전했겠습니까?”
태허진인이 너스레를 떨며 하는 말에 단목천기의 눈동자가 조금 부드럽게 가라앉았다. 태허진인은 그 눈길을 피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이들과 다른 세가 식구들까지 모두 내보내고 단목천기와 단둘이 남은 차였다. 달이 휘영청 뜬 밤, 정원에 맑은 꽃향기와도 같은 청명한 향이 두 사람 사이로 스며들었다.
“어느 날 눈을 떴는데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흠, 무월검 어르신이 뭐 하고 계시더라?’”
아들의 장례를 치르는 단목천기의 등을 기억했다. 그 뒤로 몇 년이나 흘렀다.
그간 서로 잊은 듯 지냈던 건 후계자를 잃고 몰락해 가는 단목세가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곤륜산의 일 또한 쉴 틈이 없고 항주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그저 각자의 삶을 살아가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도 그럴 것이다. 자신의 삶과 일이 바빠서.
단목천기에 대해 떠오른 건 정말 우연이었다. 지난가을, 산등성이에 앉아 단풍을 내려다보는데 문득 떠올랐다.
아, 어르신은 잘 계실까?
못 뵌 지가 몇 년째더라.
그래, 그 장례식 이후로 찾아뵌 적이 없었지.
다른 누가 그분을 찾아간 적이 있던가?
이젠 아무도 단목세가 얘기를 하지 않는구나…….
왜 그런 생각이 든 것인지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더는 그래선 안 된다는 강렬한 감정이 그를 뒤흔들었다.
곤륜산은 중원 대륙의 서쪽 끝에서 마천교와 맞닿아 있고 단목세가는 동쪽 끝 항주에 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갑자기 단목세가에 인사차 방문하겠다는 그를 보고 장문인은 당혹스러워했지만 그래도 웃으면서 보내 주었다.
“그래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서 잡담이나 하러 예까지 왔단 말이야? 이런 실없는 인사를 보았나.”
그 먼 길, 하루에 다섯 시진씩 걸어도 석 달 열흘을 걸어야 하는 길을 그저 인사 한번 하러 들렀다고 하니 단목천기가 의아해하는 것이 당연하다 싶으면서도 태허진인은 자신의 마음을 그보다 더 잘 설명하지 못했다.
아직 잃지 않은 사람에 대한 회한과도 같은 마음이 쓰리게 물결치는 까닭을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겠는데, 이걸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제가 마음먹은 건 꼭 해야 하는 성미라서 말이지요.”
“어이고.”
단목천기에게 힘이 남아 있었더라면.
오래전 혈라곡을 상대할 때 그가 모든 걸 불사르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아들과 그가 모두 건재했더라면, 그에게 서신을 보내고 이렇게 찾아와 매해 만나는 것이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방법 중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듣기로는 지금이 곤륜산이 한창 바쁠 때 아니더냐. 마천교의 교주가 제 후계를 물색하기 시작했다던데.”
“아, 그렇죠. 후계자를 찾으려고 교의 장로들이 교를 빠져나갔다고 하더군요.”
혈라곡을 상대하면서 흑도무림 흑천련, 백도무림 백도맹, 그리고 저 먼 마천교까지 모두 힘을 모았다.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동정혈사때는 새외의 북해빙궁까지 한 손 거들었으니, 지금의 무림은 긴 역사 중 그 어느 때보다 서로가 가까웠다.
그러나 아무리 가까워도 섞일 수는 없는 법. 서로 견제하고 경계하는 것 역시도 여전했다.
갑자기 마천교 안에서 마두들이 조용히 출두했다는 소식이 퍼지면 그들과 가장 바짝 붙어 있는 곤륜파에서 먼저 촉각을 곤두세우곤 했다.
마천교는 교 안이 아니라 교 밖에서 후계자감을 물색한다. 그래서 때가 되면 장로들이 인재를 찾기 위해 조용히 중원을 떠돌다가, 목적을 달성하면 돌아가곤 했다.
“뭐 그렇다곤 해도 그에 관한 것이야 곤륜산에서 알아서들 하겠지요. 제가 언제 뭐 그런 것에 끼어든 적 있습니까?”
“장문인도 속이 말이 아닐 것이다. 자네가 이리 밖을 쏘다니고 다녀서야.”
“그게 다 장문사제 좋으라고 하는 겁니다요.”
태허진인이 껄껄 웃었다. 단목천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보다 어르신. 어떻게 가르침 한 번만 내려 주시겠습니까?”
“자네를 잡아도 곤륜산의 눈총만 받을 텐데 뭐가 좋아서?”
“아이고, 그러지 마시고요. 여기서 만 리나 떨어져 있는데 눈총을 주어도 닿기나 하겠습니까? 그리고 어르신, 저 우습게 보지 마십시오.”
허송세월하지 않았노라, 태허진인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단목천기가 씩 웃으며 느긋하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울어도 자네 줄 당과는 없네. 우리 련아 먹여야 해서.”
* * *
“엽운 도사님?”
“도사라니요, 아니, 아직 아닙니다. 말씀 편하게, 편하게 하세요.”
소년은 가엾을 정도로 뺨을 새빨갛게 붉히고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련은 짓궂게 미소 짓긴 했지만 엽운을 더는 놀리지 않았다.
엽운
특성 : 마음이 변치 않는 / 날아오를 / 대나무 /
운룡대팔식 : 2성(4성)
태청신공 : 1성
태청검 : 3성
자질과 오성 : 상-하(上-下)
고민 : 사제의 연을 맺는 방법.
도움말 : 사제 간에 증명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엽운의 상태를 보고서 조금 놀랐다. 곤륜파의 검법이 벌써 3성이나 익혔다는 것도 놀랍지만, 저 나이에 벌써 내공심법을 깨쳤다는 건 보통 재능이 아니란 얘기였다.
‘내공이라니. 조금 부럽긴 하다. 그런데 운룡대팔식 2성 옆에 4성이 같이 쓰여 있는 건 뭐지?’
련은 그와 비슷한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단목현우나 단목천기의 성취도 그렇게 적혀 있었다.
‘한번 도달은 했지만 완벽하게 정복하지 못했거나…… 부상 같은 문제로 그 경지를 내보이지 못할 때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더욱 놀라웠다. 엽운은 어쨌거나 저 나이에 운룡대팔식을 4성까지 엿본 것이다.
“그쪽은…….”
련과 인사를 마치고 몹시 어색해하던 엽운이 련의 뒤에 선 소년들에게 눈을 주었다.
“제 동생들이에요. 륜아야, 비아야. 인사해야지.”
련은 자신의 등 뒤에 나란히 몸을 숨긴 두 소년을 앞으로 끌어왔다.
낯선 사람을 보고서 신기한 표정을 짓던 단목비는 반가운 듯 방싯방싯 웃었지만, 화륜은 고개만 까딱했을 뿐이었다. 그러곤 련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누이. 벌써 밤이 늦었는데요. 이만 자러 가야죠.”
“아! 시, 시간이 벌써 이렇게. 제가 너무 붙잡아 두었습니다. 객당까지 안내해 주셔서 감사, 감사드립니다.”
소년은 얼굴이 새빨개져선 쩔쩔매면서도 련을 향해 인사했다.
하지만 련이 ‘내일부터 대련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말을 했을 땐 쑥스러워하는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기대로 빛나는 눈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