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33화
* * *
“엽운 도사님이 싫으니?”
잠투정을 하던 단목비였으나 누이가 토닥여 주는 손길에 맥을 추지 못하고 푹 고꾸라지듯 잠들었다.
련은 화륜도 침전에 데려다주곤 똑같이 해 주려고 했지만, 화륜이 새침하게 구는 통에 그만두고서 다른 걸 묻는 중이었다.
화륜은 조금 움찔했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누이가 아무 생각 없이 그 녀석도 동생으로 들이면 어떡해요?”
“태허진인님 제자인데 내가 어떻게 그래? 그리고 엽운 도사님은 나보다 두 살 많은데. 륜아 너보단 네 살이나 많다.”
“아, 그랬지…….”
“그랬지?”
“아녜요. 어쨌든 그 사람을 싫어하는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데 왜 그렇게 눈도 안 마주치고 쌀쌀맞게 굴어.”
“……그 사람들한테만 그런 건 아녜요. 상단에서 사람이 온 것 말곤 여기에 손님이 온 게 처음이잖아요.”
“사람 만나는 게 낯설어서 그래? 앞으로는 많이 올 텐데.”
화륜은 뭐라고 대답할지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가 결국 포기한 얼굴로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련이 뭐라고 말하기 전에 빠르게 말했다.
“그렇다고 저한테 다른 벗이 필요하단 얘긴 아니에요.”
“벗…… 앗.”
딱 그 얘기를 하려던 참이었던지라 련은 살짝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친구도 좀 있고 그런 게 좋지 않을까. 심심하지 않아?”
“누이랑 비아랑 있으면 심심할 틈이 없어요. 글자도 외워야 하고 백련이 밥도 줘야 하고 누이가 밤중에 도사님하고 노는 것도 말려야 하는데요?”
“엄청 바쁘네…….”
“그러니까요.”
* * *
련은 심호흡하곤 부채를 들어 올렸다.
처음엔 대련 상대가 생겼다고 마냥 희희낙락하기만 했는데, 당장 낮부터 엽운과 한 판 붙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금가장에 지면 안 되는데 곤륜파에 지는 건 괜찮을 리 없잖아.’
물론 친애의 정도가 전혀 다르긴 하지만, 그렇다고 곤륜파가 한 가족인 것은 아니다.
설령 같은 가족이라고 하더라도 장손이 쉽게 져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같은 항렬의 남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덕분에 새벽에 눈 뜨자마자 세가 안에 있는 곤륜파 관련 서적을 모조리 탐독한 차였다.
‘금가장 상대하려다가 이게 뭐야.’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멈출 순 없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부채가 말해 준 논검(論劍)을 해 보기로 한 것이다.
[논검을 진행합니다. 준비되셨습니까?]
‘준비? 준비씩이나 해야 하나? 공부는 좀 했는데…….’
[주의를 집중하십시오.]
련은 잠깐 고민하다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주의를 집중하십시오.]
‘어쩌란 거야?’
눈이라도 감으란 건가? 그러면 부채가 안 보이는데. 련은 부채를 노려보다가 숨을 모아 뱉고는 눈을 꾹 감아보았다.
[정신을 집중할 수 있는 심결을 운용하면 논검의 효과를 증진시킬 수 있습니다.]
그랬더니 어두워진 시야에 푸르스름한 글자가 떠오르는 게 아닌가. 련은 놀라서 눈을 떴다가 얼른 다시 감았다.
‘정신을 집중할 수 있는 심결? 내공을 쌓는 심법하곤 다른 건가?’
[단목세가의 유성환결이 있습니다.]
‘그건 안 배웠으니까 당장은 일단 논검부터.’
[논검을 시작합니다.]
그와 동시에 글자가 지워지며, 붓으로 그린 듯이 어설픈 사람의 형태가 나타났다. 하나는 련 자신의 생김새를 닮았고 다른 하나는 엽운을 닮았다.
‘아니, 논검이라더니 거의 모의 실행 같은 거였어?’
[어떻게 움직이시겠습니까?]
하지만 놀람을 즐기고 있을 새는 없었다. 련은 얼른 집중력을 다잡았다.
‘내가 선공? 일단…… 낙성십이검 첫 번째 초식으로…….’
생각하기가 무섭게 작은 련이 검을 들고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작은 엽운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태청검 제1초식 변형으로 검을 막아 내고 왼손으로 시야를 방해]
‘낙성십이검 제3초식으로 거리를 먼저 확보하고 제4초식으로 찌르기.’
[운룡대팔식 제 일식으로 뛰어올라 찌르기를 피하고 태청검 제8초식으로 내려치기]
‘앗, 다시, 다시. 제4초식으로 찌르면서 거리를 벌려 운룡대팔식에 대비하고 착지를 방해.’
련은 눈을 감고 있었지만, 만약 뜬 채였다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을 것이다. 생각대로 먹물 그림이 요리조리 움직이는데 의외로 재미가 있었다. 련은 점점 더 논검에 몰두했다.
[운룡대팔식 제2식으로 뛰어오른 뒤……. ]
* * *
“밤이라도 샌 거예요? 눈이 빨개요.”
“그게…… 대련 공부에 집중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
처음 한 번 논검을 해 봤을 때 머릿속에서 종이 쳤다. 실전이 이것과 완전히 똑같진 않겠지만, 혼자서 대국을 하는 것과 둘이서 함께 하는 게 같을 턱이 없지 않나.
‘벌써 이렇게 좋은데, 유성환결을 운용하면서 하면?’
유성환결 같은 심결을 써서 논검을 운용하면 효과가 더 좋다는 건 선경이 공인해 준 바다.
새벽에 가르침을 청할 사람은 마땅치 않고 해서 련은 정영을 데리고 세가의 서고로 향했던 차였다.
정신을 집중하는 데 도움이 되는 심결이라는 게 아무래도 효과가 명확하지 않으니 그렇게까지 인기가 많지는 않았는지, 세가 서고에서도 책을 찾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영도 안쪽까지 들어갈 수 있어서 다행이었지.’
가주와 그 후계자만 들어갈 수 있는 가장 깊은 곳은 아니었지만, 정영도 바로 그다음 서고까지 들어갈 권한이 있었다.
그걸 보고 깜짝 놀라 했더니 정영은 다소 민망한 표정을 지었더랬다.
덕분에 둘이 함께 서고를 뒤져 간신히 유성환결의 구결이 적힌 책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걸 정영과 함께 익힌 뒤에 밤새 유성환결을 운용하며 논검을 돌렸다. 조금만 더 하면 완벽하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니까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하다가 날이 샜다.
비몽사몽인 와중에 행운 수치도 1만큼 올랐다.
예전에 정영에게 보법에 대해 일러준 것이 있었는데, 그가 유성환결을 배우더니 곧장 효과를 본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지면 무슨 소용이에요.”
화륜이 련을 흘겨보았다. 련은 빡빡한 눈을 문지르며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밤새 흥미진진한 놀이를 하다가 들킨 것처럼 무안하고 창피했다.
련은 잠깐 고민하다가 천천히 유성환결을 운용하며 영기를 일으켜 보았다.
‘여태 내 몸을 망치기만 한 힘이지만…….’
밤새 유성환결을 운용한 덕분에 찾아온 영감인지 이 영기를 자신에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신의 결이 하나하나 가지런해지면서, 자신의 영기가 청명하게 흘러들어왔다. 영기에 부딪혀 상처 입은 부위에서는 영기가 물러났고 피로하고 모자란 부분은 부드럽게 채웠다.
‘되네! 되잖아!’
영기를 조금 쓰면서 피로했던 몸이 스르르 풀어진다. 한잠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개운했다. 영기 자체가 많아서 생기는 문제는 어떻게 할 수 없겠지만.
“두고 봐. 이 누이가 얼마나 잘하는지 말이야.”
금방 기세등등해진 련이 하는 말에 화륜은 눈을 가느다랗게 떴지만 더는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그사이에 한껏 걱정스러운 표정의 위지청이 다가와 련의 양손을 꼭 쥐었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열심히 준비했으니까요.”
“이기고 지는 것이야 병가지상사라고 하나 그러다 다치기라도 하면…….”
위지청이 습기 어린 목소리로 하던 말을 삼켰다. 무가에서 장손이 다치는 일로 염려하고 눈물지어서야 도리어 부끄러운 일이었다.
“안 다칠게요. 그러니까 대련 끝나면 저랑 같이 바둑 둬 주세요.”
“그거야 네가 말만 하면 언제든 해줄 거란다.”
련을 낳기 전까지 계속 몸이 약했던 위지청의 유일한 취미는 바둑을 두는 것이었다.
무공을 제대로 익히지 못하고 싸움에도 나서지 못하는 게 평생의 한이었는지 위지청은 단아한 겉모습과는 다르게 상당히 공격적인 기풍의 소유자였다.
그간에는 맞수가 없다가, 요즘 딸과 한 점 두 점 두면서 즐거움을 되찾은 차였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 * *
“엽운. 내공은 쓰면 아니 된다, 알겠지?”
“예, 도사님.”
태허진인을 스승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엽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되었느냐?”
련은 자신의 어깨를 짚어 오는 할아버지의 손에 고개를 끄덕였다.
“부담 갖지 말고, 찬찬히 배운다는 생각으로 임하거라.”
“예, 할아버지!”
련은 연습용 목검을 쥔 채 엽운의 앞에 섰다. 엽운 역시 가볍게 긴장한 표정이었다.
“그럼 저부터 가겠습니다!”
련의 당찬 외침에 엽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련의 발이 스르륵 움직였다. 내공이 없어서 묘리의 끝까지 온전히 담아내진 못해도, 세가의 장로들이 보았다면 마치 검보에서 뽑아 온 듯한 자세라고 눈을 치떴을 터였다.
련의 목검이 궤적을 그리며 부드럽게 미끄러진 순간 엽운의 손이 움직였다.
따악!
목검과 목검이 부딪치며 매서운 소리를 내고 쥔 손을 진동케 했다. 그와 동시에 엽운의 소맷자락이 거칠게 펄럭거렸다.
타다닥!
가볍게 발을 놀린 엽운이 땅을 박차고 떠올랐다.
퍼러러럭!
‘생각보다 할 만한데?’
논검으로 몇 번이나 봤던 움직임이었다.
타아앙!
련은 엽운이 위에서부터 내리치는 목검을 비틀어 흘려 냈다.
그 바람에 엽운이 허공에서 완벽하게 균형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착지하려는 순간, 련의 목검이 날렵하게 그의 발목을 향했다.
타악! 타다닷!
가까스로 목검을 움직여 막아 낸 엽운이 그 힘을 이용해 몸을 한 바퀴 회전했다.
련은 예상한 곳으로 날렵하게 날아드는 소년의 검을 흘려 넘기며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엽운 도사가 내공을 완전히 제어하진 못하는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