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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34)화 (34/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34화

아무래도 태허진인의 눈에 들어 온전히 그의 제자가 되고픈 마음에 온 힘을 다하느라 그런 듯했다.

검에 실어 형상화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빠르게 움직이는 검세와 보법이 심상치 않다.

그런데.

‘이게…… 되네?’

련은 자신이 모아서 흘려보낸 기세가 바닥에 거센 흠을 만드는 것을 흘끗 보았다.

물론 바로 엽운의 검이 날아왔기에 잽싸게 막아 내야 했지만.

검의 움직임과 속도가 더 빨라져도 예측하고 유도한 방향으로 이끌어 상대하면서, 넘치는 힘은 흘려보내는 식으로 상대하기를 대여섯 차례가 넘었을 때 련은 문득 생각했다.

그럼 이 기세를 실어 그대로 받아칠 수도 있나?

그 생각과 동시에 련의 목검이 기묘한 각도로 움직였다. 그리고 엽운의 검이 목전으로 다가오는 그 순간 바로, 똑같지만 정반대의 움직임으로 그 기세를 걷어 냈다.

콰아앙!

태허진인은 눈을 치떴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에게 어린 소년 소녀의 대련이란 거의 손장난 비슷하게 느껴질 법도 했지만, 그것이 자신이 제자처럼 생각하는 엽운과 죽은 벗의 딸이라 그런가 감회가 새로웠다.

그래서 태허진인은 지금과 같은 모습을 볼 거라고는 예상은커녕 기대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조그만 소녀가 먼저 선공을 하는데 그 검로가 제법이었다. 마치 곤륜파의 검을 아주 오래 본 듯이 잘 아는 것 같았다.

조금 놀랍기도 했다. 예상하지 못한 대련이었을 텐데 그새 차근히 준비했다는 사실이, 그리고 서책으로 본 것이 전부일 텐데 이렇게 상대해 낸다는 사실이.

그러나 둘의 합이 더해질수록 태허진인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몸을 들썩거려야 했다.

몰입하기 시작한 엽운이 내공을 운용하기 시작했다는 사실도 알아차렸지만 말리지 못했다. 련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 검을 받아 냈기에.

소녀의 검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분명 눈으로 보고 난 뒤 판단하는 것이 분명한데도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매끄럽게 이어졌다.

성긴 듯한 은하수에 끊어진 곳이 하나 없듯이 련의 검 또한 그랬다.

‘기세를…… 흘려 내?’

태허진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련의 검과 엽운의 검이 만난 순간 아주 미세하게, 그 검로에 실린 힘이 흩어지는 게 보였다.

냇물이 바다에 닿으면 흩어지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몇 번만 더 보면 대체 어떻게 된 모양새인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는데, 그 순간 소녀의 눈동자가 반짝 빛나더니 엽운의 검을 상대하는 검이 묘하게 움직였다.

오랜 수련으로 예지에 가까운 감각을 발휘한 단목천기와 태허진인이 동시에 날아든 것도 그 순간이었다.

콰아앙!

두 사람이 각자 아이를 감싸기가 무섭게 둘의 목검이 산산조각 나며 비산했다.

“엽운!”

“련아야!”

단목천기가 한 팔로는 련을 감싸고 다른 한 팔을 부드럽게 휘둘렀다. 폭발하듯 터진 목검의 파편이 우뚝 허공에 멈추어 섰다가,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듯이 되감기더니 천천히 바닥에 내려앉았다.

‘허공섭물……!’

이것이야말로 신기에 가까운 내력 운용이었다. 좌중에 경악이 번지는 가운데, 단목천기가 놀라는 태허진인을 보고 짓궂게 미소 지었다.

“그보다 아이들이 많이 놀란 모양이군. 두 사람 다 괜찮으냐?”

“네, 네…… 저는 괜찮은데, 엽운 도사님은 괜찮으신지요?”

선경에서 몇 번이나 논검을 했지만 이런 결말은 없었던지라 련도 굉장히 놀라서 당황이 역력한 얼굴로 엽운의 안색을 살폈다.

무인의 신체 바깥으로 표출된 내력을 자신이 반대 방향으로 받아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아서 시도를 해 본 것은 좋았는데, 무기가 그 내기의 움직임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터져 버릴 줄이야!

엽운의 뺨에 난 한 줄기 생채기가 붉었다.

“내공은 쓰지 말라 일렀거늘 어찌 성급히 일을 쳤느냐, 엽운.”

“죄…… 죄송합니다. 제 마음이 급해 그만…… 죄송합니다, 소저.”

엽운이 얼른 양손을 맞잡고 사과했다. 그 모양새를 가만히 보고 있던 단목천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번 일은 자네 아이가 아니라 이 녀석이 사과를 해야 할 것 같군.”

“먼저 내기를 운용해 빌미를 준 것은 엽운이니…….”

“그렇다고 보란 듯이 그것을 받아쳐 이 사달을 만들어? 단목련, 얼른 사과하지 않고 무엇 하느냐?”

련은 군말 없이 양손을 맞잡고 고개를 푹 숙였지만, 태허진인은 입술을 모으고 꿈틀거렸다.

단목천기의 말을 잘 들어 보면 어투는 꾸중인데 내용은 자랑이었다. ‘우리 손녀가 이런 것도 해냈다!’라는.

비무에서 기운차게 상대방을 날렸다는데 이게 자랑이지 꾸중인가?

하지만 단목천기와 태허진인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련은 민망한 얼굴로 엽운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잘못했다 싶었다. 상대가 집중해서 저도 모르게 쓴 힘을 좋다고 받아치려 들었으니…….

‘목검이 이렇게 부서질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하지만 수확이 있었다.

상대가 내공을 가지고 있어도 역공이 가능하단 뜻이니까. 비록 자신에겐 한 줌의 내공조차 없더라도.

“하지만 어떻게 이렇게…….”

그러나 련이 희희낙락하며 깨달음을 곱씹는 사이에, 엽운은 승복하지 못했는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당혹과 수치심을 가득 담은 채 대련을 한 비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련은 저 표정을 알아보았다.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었구나.’

태허진인은 그를 데리고 여러 가지 경험을 시켜 주려고 하면서도 제자라곤 하지 않았다.

곤륜산으로 돌아갔을 때 그가 장문인의 제자가 될 수 있게 해 주려는 것이다.

그 정도로 재능이 출중하니, 어디 나가서 또래와 붙어 져 본 적이 있을까? 검을 배운 이래로 승승장구하기만 했을 터다.

“이…….”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지 엽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가 하염없이 입술만 달싹거렸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이럴 리가…… 뭔가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 다시 해 보면…….”

“엽운!”

그때 태허진인이 나직하게 엽운의 이름을 불렀다.

자신의 손과 련을 번갈아 쳐다보던 엽운이 퍼뜩 정신을 차린 듯, 더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훌륭한 대련이었다.”

“하, 하지만…….”

“하지만?”

엽운은 이것이 ‘훌륭한 대련’이었다고는 인정할 수 없는 것 같았다. 한참이나 입술을 달싹이던 엽운이 어렵게 운을 뗐다.

“제가 패배했습니…….”

“언제부터 네게 승리가 당연한 것이었느냐?”

태허진인이 지금까지의 허허실실한 태도를 버리고 날카롭게 말했다.

엽운은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옆에서 단목천기가 그를 만류했다.

“진인은 아이를 너무 다그치지 말게.”

“어르신.”

태허진인이 목소리를 죽였다. 단목천기가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전음입밀이었다.

─ 자네도 당연히 엽운이 련아를 이겨 그 애에게 가르침을 줄 거라 생각하지 않았더냐?

옳은 말이었기에 그도 대꾸할 말이 없었다.

“모든 패배에 순순히 수긍해서야 무인의 자질이 있다 하겠느냐? 분한 마음을 가지는 것 또한 자질이라 할 수 있겠지.”

태허진인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엽운은 붉어진 눈가를 애써 훔쳐 내고는 허리를 똑바로 폈다. 자신이 부끄러운 짓을 했다는 자각이 뒤늦게 들었다.

“조…… 좋은 승부였습니다, 련 소저. 제가 부족한 모습을 보였어요. 사죄…… 드립니다.”

이번에는 련이 더욱 머쓱해졌다. 깨끗하게 졌다고 박수 치는 사람만 있으면 여기가 사람 사는 곳이라고 할 수 있겠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손을 내저어 주자 엽운은 자신이 보인 태도가 더욱 창피해진 듯했다.

그 분위기를 타파하듯 태허가 헛기침을 세게 하곤 련에게 다가왔다.

“커험! 흠흠. 그런데…… 조금 전에 대체 어떻게 한 것인지 물어도…… 되겠는지…….”

아주 조심스러운 말투였다. 눈이 빨개졌던 엽운도 귀를 기울였다. 련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에 엽운 도사님이 쓰신 마지막 초식의 검로 끝에…….”

“태청검 마지막 초식이다. 이렇게 움직이는 것 말이지.”

태허가 손을 가볍게 움직였다. 바람을 따라 소맷자락이 가볍게 일렁거렸으나 엽운과는 다르게 거칠게 펄럭거리지 않고 부드럽게 가라앉았다. 련이 얼른 고개를 끄덕이곤 말을 이었다.

“음, 대단한 검법인 것 같아요. 보법은 구름 위를 노니는 용 같으면서 검법은 그 구름에서 내리치는 낙뢰 같기도 하고 산등성이를 타고 흐르는 계곡물 같기도 하고…….”

련은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문득 떠오른 감상부터 읊었다.

엽운이 태청검이나 운룡대팔식 모두 이제야 배우기 시작한 게 분명했지만, 그런 그의 검끝으로도 곤륜산의 풍경이 느껴졌다.

“아! 그래서. 그 검로를 따라 일어난 내공도 딱 그런…… 산세를 타는 느낌이라서요.”

느낌이라고 표현한 건 엄밀히 말해서 엽운이 검에 내기를 실은 것, 즉 검기를 쓴 건 아니기 때문이다. 검법의 이치를 따라 자연스레 기세가 일어난 것 정도였을 뿐.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듯이. 계곡물이 아래로 흐르고 꼭대기 위의 돌은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것처럼. 이걸 다시 돌려보내려면 사실 어렵죠. 등산도 힘든 것처럼. 그래서 전 음, 지렛대로 돌을 튕겨 올리는 것 같은 느낌으로…….”

“……지렛대?”

“네. 검이 지렛대라고 생각하고, 맞붙은 지점을 중심으로 저는 조금 멀리서 힘을 가해서 기세를 돌려보낸다는 감각……? 검보다 검병 쪽에서 힘을 주면 좀 더 적은 힘으로 돌려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목검이 터질 줄은 몰랐어요…….”

태허가 입을 떡 벌렸다가 다물었다가 하길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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