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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35)화 (35/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35화

그렇게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태허가 미간을 매만졌다.

“지렛대로 돌을 튕겨 올리듯이…… 검이 목검이 아니라 장인이 만든 것이라면…….”

태허가 뭐라 뭐라 중얼거리는데, 련은 그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태허진인의 깨달음

현재 행운 수치 : 13/120 (2▲)

혼자서 이리저리 곱씹으며 초조한 듯 놀라운 듯 입술을 달싹이던 태허진인이 서둘러 물었다.

“하면 검을 맞댈 위치도 상정하여 휘두른 것이냐?”

“네? 네. 검로에 있어서 산골짜기 같은 부분에요.”

“산골짜기?”

“음, 아까 보여 주셨던 초식대로면…….”

련은 팔로 검을 대신하여 움직였다. 부드러운 바람 소리가 팔을 타고 흩어졌다.

“딱 이 순간에 검의 이 정도 위치에 맞대어서 검로의 운용에 실린 내기를 그대로 퍼 올리듯이.”

“……남의 내기를 다루기는 어렵지 않으냐? 특히나 아직 엽운의 배움이 깊지 못해 말이 내기지, 그저 힘의 발산이나 다름없었을 텐데.”

“그건 힘껏, 잘해서…….”

“힘껏, 잘…….”

“…….”

“…….”

“…….”

* * *

단목천기와 함께 꾸준히 체력 단련을 해 오긴 했지만, 남들 보는 곳에서 다른 사람과 대련을 해 보는 건 처음이었다.

애써 침착한 척했는데도 긴장이 됐는지 련의 온몸이 뻐근했다.

거기다 중간부턴 태허와 계속 말을 주고받느라─이쪽이 진짜 논검이었다─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중간중간 계속 차를 마셨는데도.

유모가 호들갑을 떨며 찜질할 것과 간단한 요깃거리를 가지러 간 사이에 소년 두 사람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맥없이 널브러져 있던 련이 반짝 몸을 일으켜 세웠다.

“륜아야, 비아야.”

“누이이!”

단목비가 칭얼거리며 그녀에게 몸을 던졌다.

“둘은 오늘 뭐 하고 있었어?”

련의 물음에 단목비는 하루 종일 뛰놀았던 것, 누이를 따라잡기 위해 글공부를 열심히 한 것, 화륜의 놀림에도 개의치 않고 그와 티격태격했던 이야기들을 줄줄 늘어놓더니 련이 몇 번 쓰다듬어 주지도 않았는데 고꾸라지듯 잠에 빠졌다.

련이 침상에서 나와 단목비 위로 이부자리를 덮어 주는 사이에 화륜은 그 뒤에 서서 주위를 한번 슥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련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종이의 얇은 두께를 가늠하듯 자신의 펼친 손을 좁혀 그 틈새로 련을 쳐다보았다.

“뭐…… 뭐야?”

“하루 사이에 비쩍…… 말랐네요.”

“말이 심하다, 우화륜.”

“우…… 화륜이요?”

“앗.”

련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가렸는데, 화륜은 진심으로 의아하고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그의 없던 우씨 성이 어디서 갑자기 나타났는지.

“아니, 진짜 아무것도 아니야. 나 혼자 생각만 하던 건데…….”

“혼자 무슨 생각을 했는데 제가 갑자기 우화륜이 돼요?”

련은 몹시 창피해하고 동시에 미안해하면서 머쓱하게 말했다.

“엊그제 숙부와 함께 시를 하나 지었거든.”

“아. 약당주님이 우리 집에 천재가 났다며 좋아하시던.”

“그 얘기는 하지 마. 창피해 죽겠네. 우리 숙부는 내가 숨만 쉬어도 천재라고 하잖아.”

“어쨌든 그래서 무슨 시를 지으셨는데요? 그때도 창피하다고 저한텐 얘기도 안 해 줬으면서.”

련은 얼굴까지 발갛게 붉히고서는 소맷자락에 얼굴을 묻어 애써 열을 식히며 말했다.

“월영부용적운려(月影芙蓉積邌)…… 소조우야대우래(蕭條雨夜待雨來)…….”

달그림자 아래 연꽃 피어 그사이 비구름 천천히 흘러가는데

비 내리는 쓸쓸한 밤, 그 비가 오기를 기다리네.

“……비가 오는 밤에 비가 오길 기다린다고요?”

“그러니까! 진짜 기다리는 비는 지금 오고 있는 비가 아니라는…… 세상의 많은 것들 중에서 자신이 원하는 걸 분명히 아는 게 중요하다는……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련이 창피함으로 얼굴을 새빨갛게 만드는 사이에 화륜이 시를 곱씹었다.

“그 ‘소조우야’의 ‘우’예요?”

비가 오는 쓸쓸한 밤의 비.

“아니지, 바보야! 기다리는 비의 그 ‘우’지.”

“흠.”

지금의 화륜이 가진 것은 ‘화륜’뿐이다. 부모도 성씨도 아무것도 없는 이름뿐.

본래 마천교에서 교주의 눈에 닿아 천화륜이 될 거였지만, 그가 마천교로 떠나지 않는다면 그 성씨도 없던 일이 된다.

그렇다면 그에게 새로운 성이 있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뭐가 좋을까 생각을 하다가 때마침 자신이 지은 시 속에 있는 ‘우’라는 글자에 마음이 가서 입 안에서만 굴려 보던 것이었는데…….

“아, 음…… 이 글자는 사람 성으로 쓰지 않나? 어쨌든 혼자 생각만 했던 건데.”

“맘에 들어요.”

“응?”

련은 고개를 기울였다.

“우화륜. 맘에 든다고요.”

소년은 그렇게 말하며 눈을 접고 사르르 웃음 지었다. 왼쪽 눈매 끝에 걸린 눈물점이 살랑 움직였다. 련이 눈을 크게 뜨고 끔벅거릴 찰나 문이 열리며 유모 장 씨가 들어섰다.

유모 장 씨가 련을 긴 의자에 앉혀 손발을 주물러 주고 바로 먹을 수 있게 식힌 차를 들이미는 사이에, 화륜은 곁에서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기만 했다.

* * *

엽운은 뺨에 난 생채기를 계속 매만지며, 무릎을 꿇고 앉은 자세로 오늘의 대련을 복기했다.

련과의 대련은 한 번뿐이었고 그 뒤로는 태허진인과 단목련의 논검이 이어졌는데 거기에 자신이 끼어들 새가 없었다.

‘분명 내가 도와주러 온 거라고 했는데…….’

단목련에겐 특별한 사정이 있어 검을 배운 지 몇 달도 되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가문의 검과 맞붙게 되었으니 없는 경험이라도 쌓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물론 그 과정에서 자신도 배울 게 있을 거라고, 태허는 얘기하긴 했다.

하지만 대련은 정신없이 끝났고 자신이 도움을 준 것인지도 분명치 않았다. 패배하는 쪽에서 도움을 줄 여지가 있었을까? 아마도 없었을 것 같다.

‘대체 어떻게 내 목검을 받아쳤지?’

처음에는 비무의 결과를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은 태허진인이 장문인의 후계자로 만들 결심을 할 정도로 출중한 재능을 가졌는데, 병약하다던 어린 소녀와 붙어서 재고의 여지 없이 패배하다니.

당장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을 정도로 수치스러웠다. 자신에게 졌던 동년배들은 다 아무렇지 않은 듯 굴기에 패배라는 단어에는 아무런 힘이 없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는 도무지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지만 산산이 부서진 목검이 그 결과를 증명했고, 나중에는 단목련의 말이 증명했다.

그 애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다.

‘대체 어떻게?’

자신이 대련 도중에 운용하며 흘렸던 내기는 검기 같은 대단한 경지가 아니라, 그저 가진 힘의 미약한 발산이었다.

쌓인 눈을 힘껏 털어 내듯 산란한 그 힘을, 단목련은 어찌 한데 모아 받아쳤을까.

엽운은 태허와 련이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지렛대를 쓴다는 느낌으로?’

작은 소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듯 말 듯 묘했다. 느낌이 올 듯 말 듯.

‘정확한 지점에 검을 맞대고 힘을 제어해서? 그런데 그래서 내기는 어떻게 한 거지?’

소녀가 그에 대해서도 말을 해 주긴 했다.

─ 힘껏…….

엽운은 자세를 무너뜨리곤 울상을 지었다.

힘껏.

그래, 힘껏 해야지. 그런데 어떻게 힘껏 하면 되는지까지 물어볼 염치가 없었다. 련도 일부러 숨기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냥 설명할 말이 그것뿐인 것이다.

‘힘껏?’

순간 엽운이 허리를 바로 폈다.

힘껏. 온 힘을 다해서.

정확한 순간에 정확한 지점에서 온 힘을 다해서.

엽운이 앉은 자리에서 천천히 팔을 움직였다. 그의 동작을 따라 소맷자락이 너울거리기 시작했다.

* * *

이른 새벽.

련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고 부채를 홀홀 흔들었다.

세가에 드나드는 사람이 생기자 정화할 거리가 많아진 것도 장점이었다.

그렇게 공기에 영기를 실어 보내던 련은 갑자기 부채 위에 먹물이 번지듯 글씨가 쓰이는 걸 보고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태허의 깨달음 2

엽운의 배움 3

현재 행운 수치 : 17/120(5▲)

간밤에 행운 수치가 쑥 올랐다. 도대체 밤새도록 둘이서 뭘 했길래…….

그리고 둘이 뭘 했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저 너머에서 두 사람이 보였다.

태허

특성 : 협을 되찾은 / 먼 길을 걸어온 / 영원히 부유하는 / 너머를 엿본

태청검 : 9성(10성) (▲1)

윤룡대팔식 : 12성

태청신공 : 10성 (▲1)

자질과 오성 : 상-하(上-下)

고민 : 단목천기에 대한 죄책감, 찾아온 때가 미묘한 것에 대한 민망함, 깨달음에 대한 고민

도움말 : 창공의 매도 가지에 앉아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엽운

특성 : 마음이 변치 않는 / 날아오를 / 너머에 손을 뻗은 / 대나무

운룡대팔식 : 3성 (5성) (▲1)

태청신공 : 1성

태청검 : 3성 (▲1)

자질과 오성 : 상-중(上-中)

고민 : 사제의 연을 맺는 방법, 은혜를 갚는 방법, 어제의 일에 대한 부끄러움

도움말 : 사제 간에 증명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 모두 밤새 수련이라도 한 것인지 눈 아래가 퀭했는데 눈빛만은 형형하게 빛났다.

‘얘길 나눈 건 검법에 관한 거였는데…… 그냥 얘기만 한 것뿐이었는데 엽운 도사님은 운룡대팔식까지 성취가 늘어? 태허진인은 어떻게 심법까지 올라간 거지?’

련은 진지하게 생각했다.

‘받아먹는 것도 재능이 있어야 가능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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