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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36)화 (36/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36화

“소저, 간밤에 평안하셨습니까.”

엽운이 얼른 련에게 다가와 포권하며 인사했다. 련도 양손을 마주 잡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는 덕분에 푹 잤는데…… 두 분은 그다지 숙면에 드시지 못한 듯합니다.”

“하하! 네 말을 곱씹느라 날밤을 새웠다. 아니지, 이제는 스승이라 불러야 하려나.”

가르침을 준 이를 일러 스승이라 부르길 망설여선 도사라 할 수 없는 법이라며 태허가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셨다간 제가 할아버지께 혼날 거예요.”

“누가 누굴 혼을 낸다고?”

등 뒤에서 단목천기가 불쑥 모습을 드러내며 말했다. 련을 혼내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두 쪽을 낼 기세였다. 흉흉한 안광이 얼굴의 흉터와 어우러져 보통 사람이었다면 오금이 떨렸을 법했다.

“제가 련아를 보고 스승이라 부르겠다 했더니 그만 련아가 사양하지 뭡니까, 어르신.”

“스승은 무슨…… 아직 별호도 없는 조막만 한 새끼 오리 같은 애를 두고 무슨 소리야?”

“오리요? 이렇게 어여쁜 손녀딸에게 무슨 막말을 하십니까?”

“매번 입술을 삐죽 내밀고 꽥꽥거리니 오리지.”

“할아버지…….”

련이 미간에 힘을 모으고 단목천기를 올려다보았다. 련을 앞에 세워 두고 신나게 험담을 하던 단목천기가 움찔하더니 헛기침하며 시선을 피했다.

결국 그 자리의 모두가 안절부절못하기에 련은 엽운을 잡아끌었다. 앞으로 있을 금가장과의 비무에서 준비해야 할 것이 있으니 그와 함께 수련하며 집중하겠다는 련의 엄포에 어른들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 * *

“이제 걱정하실 것이 없겠습니다.”

태허는 두 아이가 검을 나누는 모습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시선은 아이들의 검끝을 향한 채다.

“무엇이 말이냐?”

“현성의 첫째가 저렇게 어마어마한 재능에 저런 다정한 성품까지 타고났으니 세상에 무서울 게 무엇 있겠습니까?”

“재능이라…….”

“세상에. 천고의 기재라 할 만합니다. 어르신, 제가 어르신보다 먹은 밥그릇 수가 적기는 하나…… 그래도 여태 저런 재능은 본 일이 없습니다. 제가 처음 현성을 만났을 때도 놀랍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세상을 떠나고 없는 단목현성을 떠올렸다.

압도적인 무재를 빚어 사람으로 만들면 그의 형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단목현성보다 더 빛나는 자는 본 일이 없었다.

어렸을 적에도 단목현성은 검을 쥐면 눈앞의 상대를 제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단목현성이 열다섯 살이 되던 해, 혈라곡이 들불처럼 일어나기 직전의 일이었다.

그가 자신보다 다섯 살은 더 많은 남직례성 남궁세가의 둘째 남궁경해를 단 일 합에 날려 버린 일이 있었다.

─ 다…… 단목현성! 승!

먼지구름이 일어나는 비무대 위에서 공허하게 울려 퍼지던 심판의 목소리가 아직도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그 일을 두고서 단목현성은 그냥 알겠기에 했다고 했었다.

─ 경해 형님이 어떻게 움직일지 눈에 보이던걸요? 하하. 어떻게 파훼할지 알 것 같아서 그냥 그대로 해 봤어요.

유쾌하고 가벼운 목소리로.

태허는 그때 ‘이거야말로 하늘이 내린 재능이다.’라고 생각했다. 이 남자야말로 재능이라는 걸 갖고 있는 것이라고…….

“세상에, 하늘 위에는 다른 하늘이 있음을 다시 배우게 되는군요. 저 애가 내공까지 쌓으면 감히 범접할 자가 있겠습니까?”

태허진인의 말은 격렬한 칭찬이었으나 단목천기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말을 삼켰다.

태허가 함께 지옥을 헤쳐 온 사이라곤 해도 손녀가 내공을 쌓을 수 없는 몸이라는 얘길 함부로 할 수는 없어 삼킨 말이 그의 폐부를 찌르는 듯했다.

이만하면, 이런 재능이면 내공을 쌓지 못하는 것까지도 갈음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리라 여겼으나 련이 내공을 쌓을 수 없다는 사실을 곱씹을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자네 눈에 그리 보이는가.”

“첫날 밤새 한숨도 자질 못했습니다. 련아가 보여 준 것과 말해 준 것들을 되짚고 소화하니 해가 뜨고 있더군요. 엽운 녀석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렇게 보면 단목련은 그린 듯이 완벽한 후계자였다. 세가의 장손, 하늘이 내린 재능, 다감하면서도 비범한 성품.

“그런데 이제 겨우 여덟 살이니…… 장래가 두려울 지경이지 않습니까.”

“세상사 어찌 될지 누가 알겠느냐. 흰소리 말거라.”

“어찌 그리 칭찬에 박하신지.”

태허진인은 단목천기가 좋은 말에 인색하게 구는 걸 보고서 련이 방자해질까 봐 걱정한다고 생각한 듯,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 웃음은 금방 멎었다. 련의 목검 끝이 유영하듯 움직이더니 엽운의 검을 쳐 내는 것에 성공했던 것이다.

태허가 허둥지둥 두 아이 사이로 달려가서 조금 전 동작을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 떠들어 대는 동안, 단목천기는 말없이 고요히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를 매단 채.

* * *

엽운은 생각보다 훨씬 더 의욕이 넘쳤다.

‘내…… 내 비무를 도와주러 온 거 아니었나?’

약간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이건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건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방식을 고안해 보았는데 어떠한가, 무공을 수련하는 게 힘들지는 않으냐…….

‘아니, 그보다 비무 졌다고 자존심 상해했잖아.’

조금 놀라서 쳐다보자 그 눈빛이 머금고 있는 의미를 알아챈 엽운이 몹시 부끄러워하며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사실 말이 통하는 벗을 처음 사귀어봅니다……. 너무 저만 너무 떠들었나요?”

“아아아…….”

련은 마음속으로 자신의 이마를 철썩 내리쳤다.

저 나이에 벌써 패배가 낯설 정도로 재능이 출중하고 명석하니 친구랍시고 또래를 사귀어도 서로 얘기가 겉돌기만 했겠지.

“아니, 아니에요. 저도 사실 벗을 사귀어본 적이 없어서.”

벗이라고 련이 인정해 준 것이 기쁜지 엽운의 얼굴에 화악 하고 빛이 돌았다.

‘엽운, 엽운 도사…….’

재능이 뛰어나고 향상심도 있으니 이대로 자라면 이름 높은 고수가 되었을 것인데, 곤륜파 사람이라 그런지 그녀의 기억에는 남은 게 없었다. 말 그대로 만 리나 떨어져 있다 보니 멀어도 너무 멀다.

그래도 저 빛나는 재능은 진짜다. 련이 조금 더 밀어준다면 어떨까?

‘태허진인님은 여기까지 찾아오는 분이잖아. 사람이 의리가 있단 말이지.’

그러니 그 밑에서 배울 엽운도 은혜를 잊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좀 신기하긴 하다. 왜 갑자기 찾아오셨지?’

지금 벌써 많은 게 변하긴 했지만, 지난 생에는 태허진인이 찾아온 적 없었다.

왜 지난 생에는 보지 못했는데, 이번 생에는 불현듯 단목천기가 생각났다는 이유로 찾아왔을까?

뭐가 다른 걸까?

“그럼 우리 벗이 되었으니까…….”

어제저녁에 나누던 담론을 이어 나가 보려고 했던 련이었으나 바깥쪽에서 인기척이 나자 말을 멈췄다.

조금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있던 화륜이 바깥쪽에서 말을 전해 듣고는 련에게 다가왔다.

화륜은 엽운을 약간 날카로운 눈빛으로 한번 쳐다보곤 련에게 속삭였다.

“누이, 만송상단에서 누이를 급히 찾아왔다고 하는데요? 마차도 없이 말만 타고 달려왔대요.”

“무슨 일로…….”

련은 놀라서 말을 잇다 말고 엽운을 돌아보았다. 엽운은 몹시 아쉽다는 표정을 하고서 몸을 일으켰다.

“어제 련 소저가 말씀해주신 걸 복습하고 있지요. 태허 어르신께서 도와주신다고 하셨으니 소저는 염려 마세요.”

“네, 엽운 도사님! 조금 있다 다시 뵈어요.”

그렇게 엽운이 자리를 뜨기가 무섭게 담벼락 바깥에서부터 두 사람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한 명은 지난번과 다르게 제대로 된 차림을 한 견위운이고, 다른 한 명은 그녀의 하인이었다.

발을 동동 구르며 한껏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던 하인은 견위운 뒤에서 애써 침착함을 되찾기 위해 심호흡을 거듭했다.

“위운 고모?”

‘뭐지? 상단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나를 찾아와서 얘기할 거면 청련수 문제밖에 없는데. 다음 주면 금가장하고 비무도 해야 하는데 지금 무슨 문제가…….’

“련아.”

여기까지 반쯤 뛰다시피 다가온 견위운이 나직하게 련을 불렀다. 냉철한 그녀의 얼굴이 조금 상기된 듯 보였다.

견위운이 잠겨 갈린 듯한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했다.

“청련수…….”

“네?”

“났다.”

“네?”

“대박…… 대박 났다.”

“……!”

견위운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와 동시에 련의 머릿속에서 금가장이라는 단어가 깨끗하게 지워졌다.

견위운이 지금 항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간략히 설명해 주었다.

그녀가 여기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건 련의 청련수가 말 그대로 폭풍같이 팔려 모든 곳에서 매진되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그 효과만으로도 항주부에서 나름 기세 좋게 팔리고 있던 청련수였는데, 견위학의 장원 급제에 한 팔 거들었다는 소문이 말 그대로 절강성을 휩쓸었다.

절강성뿐만이 아니라 견위학이 수학한 남직례성의 휘주부까지 그 인기가 강타했으니 이제는 부르는 게 값일 지경이었다.

“아무 데도……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고요? 재고가요?”

“약방이 전부 털렸다고 하더구나. 깨끗하게.”

견위운이 차가운 표정으로 ‘털렸다’고 말하자 약간 웃겼지만, 그녀가 주판을 튕겨준 걸 보고서는 웃음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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