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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38)화 (38/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38화

련이 이 정도로 힘을 쓰는 것만으로도 순청련수의 효능이 다른 약들을 상회하고도 남았다.

그리고 그 사실이 진청령수의 수요에 부채질을 한 것이다. ‘순청련수도 이렇게나 쓸만한데, 그럼 진청련수는 얼마나…….’라고 생각하게 되어서.

진청련수에는 그만큼 공이 더욱 들어갔다. 조화를 쓰면서 정유들 사이를 더욱 어우러지게 만들고 여분의 영기를 더 집어넣는다.

영기를 최소한만 남겨놓고 전부 다 쓰고 나니 세가 안에 남았던 정유도 바닥나고, 달이 떠오른 뒤였다.

영기 : 11/100

‘등산을 한번 해야 하나?’

산에는 다신 안 가겠다고 다짐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 싶었다.

“포장 다 된 건 내일 새벽에 유성표국을 통해서 만송상단에 보낼 거예요.”

“우리 표국에서 운송한다고?”

단목현우가 조금 놀라서 돌아보았다. 운송 업체 선정은 본래 민감한 문제로, 내키는 대로 바꿀 수 없는 영역이었다.

“네! 유성표국이 좀 작으니까 우선 세가에서 상단으로 가는 운송만 우리가 맡아서 하기로 했어요. 위운 고모랑도 얘기했고요.”

“그거 정말 잘됐구나!”

“보낸 마차에 재료로 쓰일 정유를 받아오면 딱 될 것 같아요.”

“내일도 이렇게 일해야겠지?”

“오늘 오후 나절만 작업했으니까 내일도 그 정도면 되지 않을까요?”

련이 개운하게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요 며칠 금가장, 비무, 대련, 이런 생각만 하던 게 싹 날아갔더니 마음이 산뜻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련은 자신이 다소 안일하게 생각했음을 받아들여야 했다.

* * *

오래도록 정체되어있었던 세가에 이렇게 많은 물류가 오가기 시작한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그 덕에 세가의 식솔들이 모두 나와 정유 단지가 착착 쌓이는 형상을 구경했다.

“우와, 정유가 정말 끝도 없이 들어오는구만.”

“이걸 우리 약당에서 다 만들어서 내놓는다고? 청련수인가 그거지?”

“그게 그렇게 죽여준답디다.”

“뭐? 진짜?”

“이걸 쓴 저쪽 도련님이 장원 급제를 했다잖습니까, 장원 급제. 장.원.급.제!”

“아, 그쪽…….”

“아니 그럼 대체 뭔 생각을 하는 거요? 이 새벽부터?”

“내, 내가 과거 시험을 치를 것도 아니잖소.”

“아이 씨, 진짜…….”

“왜 무안을 주고 그러오. 댁은 과거 시험 칠 거요?”

“아니 과거 시험을 안 쳐도 뭐 무공 익히는 데도 도움이 될 거 아뇨. 청련수가 마시면 과거 시험 답안지가 보이는 물약도 아닌데.”

“마시는 건가?”

“돌겠네.”

가솔들이 우르르 모여 정유 단지를 약당 안으로 옮겨왔다. 새벽부터 난리 법석이라 일찍 일어난 련도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중 유성표국의 표마차와 동행한 만송상단의 장궤 한 사람이 련을 알아보곤 얼른 다가왔다.

“아기씨. 저는 아가씨 밑에서 일하고 있는 장궤 조정봉이라 하옵니다.”

귀밑머리가 하얀 중년 남자가 련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와. 아침부터 수고가 많아.”

“아이고, 좋은 일인걸요. 저희 아가씨께서 최상급 정유로 준비했다고 말씀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표마차에 다 실을 수 있을 만큼만 운반해 왔으니 모자라거든 언제든 상단으로 연통 주시면 다시 재료를 보내드릴 테니 다른 일은 걱정 마시고 제작에만 힘써주시면 된다고…….”

“만드는 건 어렵지 않은데, 이게 정말 이만큼이나 필요…… 하대?”

련이 산처럼 쌓이고 있는 정유 단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젯밤 잠들 때는 오늘도 한나절만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차곡차곡 들어차는 정유 단지를 보고 있자 조금 아득해지는 면이 있었다.

“오늘 새벽에도 일주일 치는 보냈는데…….”

“아유, 그건 오늘 오후 해 떨어질 때면 전부 동이 날 겁니다요.”

“진짜?”

“그럼요. 요즘은 멀리서도 찾아서요. 물건이 들어오면 먼저 연락 좀 달라고 뒷돈을 찔러주는 의각도 있답니다. 물론 저희 아가씨께서는 그런 건 일절 취급하지 않으시지만요.”

어제 오후 내내 만든 게 오늘 반나절이면 끝난다는 얘기를 듣자 초조함이 올라왔다. 련은 얼른 만들어 다시 보내겠다며 조정봉을 배웅해 주었다.

조정봉은 련이 직접 배웅해 주자 무척 감격한 듯이 몇 번 절을 하고는 상단으로 돌아갔다.

그와 동시에 련은 세가 안에서 청련수 제작에 동원할 수 있는 사람들을 추려냈다.

단목현우야 약당주이기도 하고 련과는 가까운 사이라 이 일을 함께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웃어른들을 모시는 건 안 될 일 같았다.

‘남은 사람 중에서 손끝 여물어 쓸 만하고 제조법을 유출하지 않을 만한 사람…….’

그렇게 한정하자 정말 동원할 만한 사람이 몇 없었다.

또 그동안 세가 형편이 어려웠다 보니, 집안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의 몫으로 할당된 일이 많아 함부로 빼 올 수도 없었다.

련이 약당 앞 정원을 바삐 오가며 빠듯한 일손을 추려내는 도중이었다.

“좋은 아침이네요, 련 소저.”

“어……! 엽운 도사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리로 가도 될까요?”

“네네, 오세요!”

손에는 조그만 책자를 쥔 엽운이 슬쩍 약당의 담벼락 안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아침에 산책을 하면서 소저가 말씀해주신 걸 복습하고 있었는데 의아한 게 생겨서요, 주위에 말을 물으니까 약당에 계시다고…….”

련은 약간 민망해져서 배시시 웃음 지었다.

“약당에서 만들어 판매하고 있는 약이 있는데 이게 요즘 갑자기 수요가 늘었다고 해서. 제가 만들어야 하는 거라서 아침 일찍부터 나와 있었어요. 그런데 엽운 도사님이 궁금하셨던 건 뭔가요?”

질문이 무엇이든 얼른 답을 알려주려고 했는데, 엽운이 다른 얘기를 꺼냈다.

“일손이 부족하다고 하시던데. 혹시 필요하시다면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까요?”

“네?”

“거들기만 하는 거라면 저도 한 손 보탤 수 있을 것 같은데…….”

련은 처음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입술을 꾹 내밀며 그의 제안을 신중하게 생각했다. 정확히는 엽운이라는 사람을.

‘엽운. 곤륜파의 도사가 될 사람……. 무재가 뛰어나고 거기밖에 관심이 없지. 지금 도와주겠다고 한 것도…….’

련은 엽운의 마음을 간파했다.

지금 련을 붙잡고 빨리빨리 논검과 대련을 해서 성취를 높이고 싶은데, 련에게 급한 일이 있는 것 같으니까 그걸 서둘러 해결해 주고 싶어서 도와주겠다고 한 것이다.

‘청련수의 비율도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기도 하고.’

청련수에 대한 반응이 이렇게나 뜨거우니 가품이 나올 것도 이미 각오한 바였다.

세가에 들어오는 정유의 양을 역산하기만 해도 정보력이 있는 집단은 곧 알게 될 것이다.

아마 견위운은 그걸 위장하기 위한 작업도 했겠지만, 그것도 눈에 불을 켠 사람들 앞에서는 그렇게 오래가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다. 청련수의 핵심은 바로 자신의 힘이라는 것이다.

이건 유출이 되려야 될 수가 없는 항목이니 아무 걱정 없었다.

“하지만 손님이신데.”

“그와 동시에 련 소저께서는 제게는 스승이기도 하시잖아요. 돕는 게 당연한 일입니다.”

예의상 한번 거절도 해 보았더니, 엽운이 너스레를 떨어주었다. 련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엽운의 양손을 덥석 붙잡았다.

“진짜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정말, 정말 감사해요.”

* * *

엽운은 자신이 먼저 도와주겠다고 말을 꺼내긴 했지만, 기껏해야 단지를 포장해 쌓아 두는 일 정도를 거들 줄 알았다.

약당에서 약을 제조하는 일을 세가의 직계혈족이 한다는 게 놀라운 일이기는 해도 한동안 이 세가의 형편이 그다지 풍족하지 않았다는 얘기는 눈치로 들어 알고 있었기에 그러려니 하면서.

그런데 약당의 약실 안으로 들어가기가 무섭게 한쪽 벽에 커다란 종이가 붙어있는 걸 보았다.

동청유(冬青油) - 4할

박하유(薄荷油)와 박하순(薄荷醇)을 일대일로 섞은 것 – 3할

안수유(桉叶油) - 2할

장뇌(樟脑), 훈의초(薰衣草), 백단유(白檀油), 백리향유(百里香油)를 동일 비율로 섞은 것 – 1할.

바로 청련수의 비율이 적혀 있는 종이였다. 엽운이 답지않게 놀라 소스라쳤다.

“려, 련 소저! 저걸 제가 봤는데…….”

보통 이런 것은 세가의 기밀로 치부되는 것 아니었던가? 유출되면 구족을 멸하는.

“아. 아무래도 보면서 해야 헷갈리지 않고 정확하니까요. 괜히 옆 사람한테 물어보다가 서로 실수할 일도 없고요.”

“아니, 그…….”

“엽운 도사님이야, 우리가 남인가요? 도사님이 청련수 비법을 다른 곳에 얘기하진 않을 거잖아요.”

“물론 그렇지요!”

“저는 엽운 도사님을 믿어요.”

엽운을 숨을 들이켰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소녀의 눈동자 위로 별빛이 떠오르며 반짝반짝 빛났다.

저 눈빛을 배신하는 사람이 있다면 천하의 쓰레기요 불한당이라 불러도 모자람이 없으리라…….

“그, 그 믿음, 결코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엽운이 굳건하게 말했다. 련이 방긋방긋 웃었다.

소년 소녀가 아옹다옹하는 걸 멀찍이서 보고 있던 단목현우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누이.”

“어, 륜아야?”

그때 단목련의 하인이라는 소년이 다가와 말을 붙였다.

단목련과는 남매처럼 자라는 사이라고 언뜻 들었는데, 겉으로 보기에 소년에겐 여느 하인 같은 구석이 보이지 않았다.

비굴한 기색이 조금도 없으면서 이목구비는 뚜렷하고 콧대가 높아 오히려 여느 부유한 가문의 도련님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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