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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39)화 (39/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39화

“이 빈 병들은 따로 놔두라고 하셨죠?”

‘그런데 왜 나를 저렇게 보지……?’

묘하게 즐겁지 않은 눈빛이었으나 여태껏 타고난 재능을 감추지 않고 살아온 엽운은 한 번도 보지 못한 시선이라 그게 바보 보듯 흘겨보는 눈이라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응, 그건 따로 빼놓을 거라서. 이 단지들은 상단으로 보내지 않게 잘 챙겨줘.”

“네.”

소년이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단목련이 손등으로 소년의 뺨을 쓸었다.

아주 어리고 작은 짐승을 아끼듯 하는 것이었는데 두 사람의 키가 엇비슷하여 단목련이 손을 더 뻗어야 했다.

시종일관 크게 감흥이 없는 표정으로 일관했던 하인 소년이 그 순간만은 조금 부드럽게 풀어진 표정을 지었다.

“그럼 아침 식사를 하고 시작할까? 지금 새벽부터 얼마나 들어왔는지 확인하느라 바빴으니까…….”

엽운은 솔직히 밥 먹는 것보다는 단목련의 이런 일들을 빨리 해치우고 무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 바람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 * *

공기가 차갑고 맑은 아침.

련과 금종하의 비무가 약속된 날이 밝자 세가의 장원 바깥에서부터 사람들이 모여 시끌시끌했다.

‘새하얗게…… 불태웠다.’

도중에 등산도 한번 했다. 영기가 부족해져서였다.

‘살다 살다 영기가 부족한 날이 올 줄이야.’

솔직히 영기 때문에 죽을 만큼 고생하다가 진짜로 죽은 지난 생을 생각하면 조금 억울할 정도였다.

‘그때도 알았다면…….’

련은 부질없는 가정을 해 보다 그만두었다.

어찌 된 일인지는 몰라도 자신에겐 기회가 한 번 더 생겼고, 지금 잘하고 있으니 된 일이었다.

‘이번 달 말에 바로 정산을 하기로 했지.’

보통은 분기별로 정산을 하는데, 아무래도 액수가 너무 커질 것 같다며 만송상단에서 이번 달에 한번 정산을 하자는 의견을 전해 왔다.

정산을 미루기 두려울 정도의 돈이라고 생각하니 오싹할 정도로 좋으면서 진짜 오싹해지긴 했다.

‘이 정도 속도로 한 달은 더 만들어야겠지?’

사람이 부품이 된다는 게 어떤 건지 지독하게 배운 지난 일주일이었다.

‘하…… 지금 금가장이랑 비무 같은 걸 할 때가 아닌데.’

이 시간에도 청련수를 만들어 넘겨야 하는데. 련은 아쉬움을 곱씹다가 생각을 털어 냈다.

‘이렇게 된 거, 오늘은 금가장하고 대련하고 꼭 엽운 도사님이랑 논검해야지…….’

련의 바쁜 일이 끝나면 공부를 도와달라고 말했던 엽운 역시 지난 일주일 내내 약당의 부품이 되었다.

사실 중간쯤부터는 련도 면구스러워서 몇 번이나 내보내려고 했지만, 엽운이 고집을 피운 데다가 태허진인도 껄껄 웃으며 이런 일도 해 보아야 한다며 허락한 바람에 노동에 시달렸던 것이다.

다 같이 일을 하고 있으니 엽운도 련에게 뭘 묻질 못하고 일주일이나 지나갔으니 오늘은 꼭 보은을 할 셈이었다.

“그런데 진짜 좀 시끌벅적하다.”

“여기저기서 사람들 다 모였나 봐요. 재밌는 일이라고요. 만송상단에서도 왔대요.”

화륜이 대답했다.

고작 아이들의 비무이지만, 요 몇 년간 큰 움직임이 없던 항주에서는 이것도 큰 사건이었다.

오죽했으면 만송상단의 견언조도 얘기를 듣고서는 헐레벌떡 달려왔겠는가.

“바쁠 땐데 어떻게 오셨지?”

“청련수 일은 견 장궤한테 전부 다 맡겼다는 게 정말인가 봐요.”

상단에 대장궤는 견언조 한 사람뿐이고, 견씨 성을 가진 일반 장궤도 한 사람뿐이었다.

상단 일을 밑바닥에서부터 거든 견위운만이 견 장궤라고 불리고 있었다. 견위정은 얼마 전 길에서 굴러 제법 다쳤다나.

“이 비무에서 지면 큰일 나는 거 아니에요?”

“지면 뭐 어때.”

사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조금은 긴장이 됐던 게 사실이지만, 사람이 태산을 보고 나면 작은 언덕은 어려워하지 않는 법이다.

‘일주일 동안 너무 열심히 생업에 종사했더니 그 외의 일들은 별거 아닌 것 같고…….’

사람이 죽지 않고 먹고사는 일이 중하면 더 중했지, 무가에서 이기고 지는 일에 일희일비해서야 어디 큰 인물이 되겠는가?

“오…….”

“이번에 지면 다음에 이기면 되지.”

“이번에 이기면요?”

“다음에 또 이겨야지. 박살을 내야지.”

련이 주먹을 꽉 쥐고 말했다. 화륜이 웃음소리를 흘렸다.

‘금가장…….’

경항대운하를 끼고 바다로 이어지는 장강, 서호라는 아름다운 호수를 가진 절강성 항주는 예로부터 지역 패주의 자리를 비운 적 없는 곳이다.

이십여 년 전까지는 단목세가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면, 단목세가가 쇠락한 최근 빠르게 치고 올라오는 신진세력이 바로 금가장이었다.

금가장은 부드럽고 유려한 금우도법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 얘기만 들으면 금가장도 온화한 곳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오히려 항주에서 금가장은 손속이 잔인하기로 이름 높았다.

몇 년 전 단목세가의 대공자 단목현성이 현 금가장주와의 비무에서 사망한 이후부터.

단목현성은 어렸을 때부터 그 재능을 만천하에 뽐내며 이 항주에서 다시 한번 천하제일인이 나올 거라고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오래전 혈라곡으로부터 항주를 지키기 위해, 아버지와 함께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의 나이 약관도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혈라곡에서 마천교(摩天敎)의 보물이 잠든 곳을 노렸다. 마천교에서도 있는지도 몰랐던 사원 하나가 발굴되었던 것이다.

만 리 밖에서 마천교가 달려오는 사이에 그걸 지킨 건 단목현성을 비롯한 백도맹 사람들이었다.

그게 마천교의 것이라 해도, 혈라곡의 손에 들어가게 둘 수는 없었으므로.

그러나 마천교는 한발 늦었고 백도맹은 그 사원에서 혈라곡과 부딪혀, 마천교를 대신해 대가를 치렀다. 단목현성이라는 별이 꺾였으니까.

그 일로 마천교가 참전하게 되었으니 희생에 의미가 있었다고 떠드는 자들도 있었으나 감히 절강성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지는 못했다.

단목현성이 그때 입은 부상을 떨쳐 내지 못했는데 당시의 금가장주가 그걸 알고 비무를 청하여 죽게 만들었으니!

그 비무는 아직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딱 호사가들이 떠들기 좋아할 만한 내용 아닌가 말이다.

련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금가장 사람들은 단단히 굳은 얼굴로 묵묵하게 단목세가의 장원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련이 옆을 흘끗 쳐다보았다. 어머니 위지청과 할아버지 단목천기는 입을 꾹 닫은 채였다.

하지만 아들과 남편을 죽인 원수를 바라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머니……?’

당장 부채를 부치기에는 적절한 자리가 아니었던지라 련은 슬그머니 흙바닥을 흘끗 쳐다보았다. 바닥 위로 글자가 휘리릭 떠올랐다.

금적걸

특성 : 앞만 바라보는 / 활화산 같은 / 승부욕 넘치는 / 비익조

금우도(金迂刀) : 10성

금우신공(金迂神功) : 7성

유영보(柳泳步) : 9성

자질과 오성 : 중-중(中-中)

고민 : 이곳에 내가 다시 오다니 / 아들의 사고를 어떻게 해결하지?

도움말 : 마음의 벽을 내려놓고 대화를 나누어 봅시다. 오랜 오해를 풀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금종하

특성 : 앞만 바라보는 / 그늘 아래에서 자라는 새싹

금우도 : 3성

금우신공 : 1성

유영보 : 2성

자질과 오성 : 중-상(中-上)

고민 : 아버지의 오명을 벗기고야 말겠어!

도움말 : 새싹은 햇볕 아래에서 더욱 잘 자라는 법입니다.

‘어? 이번 비무는 금가장주가 저지른 짓이 아닌 건가?’

자신을 노린 금가장의 한 수인 줄 알았는데 그의 아들 금종하가 제멋대로 군 것인 듯했다.

‘아버지의 오명?’

그러나 그들 사이에 어떤 오해가 있다 해도 그걸 푸는 건 지금이 아니라 이 비무가 끝난 뒤일 것이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금가장주 금적걸이 단목천기를 보고 인사했다.

련은 그의 목소리에 약간의 당황이 서려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정확히는 자신을 보는 금적걸의 표정에서.

단목천기가 소맷자락을 휘날리며 대꾸했다.

“그간 무탈했나 보군, 금가장주.”

안면 있는 무림인들이 만나서 하는 인사라기에도, 원수 사이라기에도 너무 짧은 인사였지만 둘 다 개의치 않았다.

금적걸은 련에게서 눈길을 거둬들이고 말했다.

“저희 아들놈이 요즘 검을 좀 배운답시고 설치고 다니다 보니, 또래 중에는 겨룰 만한 녀석이 없어 예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받아 주셔서 감사하다 해야겠군요.”

단목천기의 눈썹이 꿈틀했다. 금종하 역시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분한 얼굴이었지만 아비의 눈짓을 받곤 입을 꾹 다물었다.

“배움이 깊은 자가 앎을 나누는 것은 도리요 의무라 당연한 일이네. 자네도 잘 알다시피.”

순간 금적걸의 얼굴이 시뻘게졌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의 발아래로 조용한 먼지가 피어오르는 건 막을 수 없었다.

“기왕이면 그 가르침을 관심 있는 모두에게 선보이면 어떻겠습니까?”

세가 장원의 대문을 열고 관중들 속에서 아이들의 비무를 진행하자는 얘기다. 구경꾼들은 이미 담벼락 밖에 한가득 모여 있었다.

단목천기의 눈썹이 하늘로 치솟을 때 련이 선수 쳤다.

“좋아요!”

“련아야.”

조금 뒤에 서 있던 위지청이 련을 조용히 불러 세웠다. 련은 괜찮다는 얼굴로 그녀를 보며 빙긋 미소 지었다.

사람을 다 모아 놓고 판을 벌이자니 오히려 련은 더욱 환영이었다.

금적걸이 련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비뚤게 입매를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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