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40화
* * *
비무대 위, 련의 맞은편에 선 금종하는 체격이 좋은 소년이었다. 함께 있으니 병석에서 털고 일어난 뒤로 제법 튼튼해진 련이 무척 가녀려 보였다.
‘대체 뭐 먹고 큰 거야? 세상에 좋은 건 다 주워 먹었나?’
련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겉으로는 티 내지 않고 진지한 표정으로 상대를 쳐다보았다.
금종하 역시, 곱상한 도련님 같은 얼굴 위로 미간에 힘을 잔뜩 준 표정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태허진인이 섰다. 그가 단목천기의 손님으로 와 있기는 하지만 곤륜파 장문인의 사형이나 되는 인사이니 진행을 맡기로 했다.
아무런 차질 없이 비무가 착착 진행되어 가는데, 왜인지 금종하는 조금 당황한 눈으로 련과 자신의 부친을 번갈아 쳐다보는 것이었다.
‘뭐야?’
그의 부친 금적걸은 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비무에 집중하라는 뜻인 것 같았다.
“이는 서로 배움을 얻고자 하는 비무이지 생사결이 아닌즉, 살초를 써서는 아니 되고 비겁한 수를 써서도 아니 된다. 상대를 농락하지 말고 정정당당히 실력을 맞대도록.”
엄중한 경고와도 같은 말이 묵직하게 비무대 위에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소년과 소녀가 자신의 목검을 움켜쥐고 서로 마주 보았다.
련은 금종하의 얼굴을 바라보며 자신이 그간 공부한 금가장의 도법을 떠올렸다.
‘금우도(金迂刀). 두텁지 않은 도를 주로 쓰기 때문에 베기 중심으로, 반동을 이용해서 휘몰아치는 도법.’
관객들도 가득 들어찼다.
련은 이번 비무에서 제대로 이기면 이것도 청련수 판매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가 살짝 몸을 떨었다.
너무 좋아서였다.
‘여기서 더?’
련의 눈동자 위에 떠오른 별들이 반짝 빛을 냈다. 질 수 없는 비무다. 심안, 조화, 필요할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정화까지 끌어올리고 숨을 들이켰다.
그와 동시에 금종하가 팔을 번쩍 들고 움직였다.
“하아압!”
하지만 금종하의 팔은 련이 아닌 다른 쪽을 향하는 듯이 보였다. 심안이 반짝반짝 빛났다.
‘멀리 둘러서 먼저 도착하는 칼. 휘두르는 힘을 많이 실을수록 강하기에 상대는 엉뚱한 곳으로 향한 도를 예상치 못한 때에 마주하게 되는 도. 숙련될수록, 경험이 쌓일수록 압도적으로 강해질 수 있는…….’
련은 부드럽게 몸을 비틀었다. 금종하의 눈동자가 흔들리다 손에 쥔 도의 방향을 틀려 애썼다.
‘멀리서부터 오기 때문에 방향을 틀기 어려운 것이 단점이지. 숙련자가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말은 즉 숙련되기 전에는 효율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뜻.’
상대를 관찰하여 예측하는 지혜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는 도법이다.
련은 금종하가 힘껏 비트느라 제대로 힘이 실리지 않은 목도를 받아치고는 그 옆으로 발을 디뎠다. 련의 소맷자락이 펄럭이며 교묘하게 금종하의 눈길을 가렸는지 그가 움찔했다.
‘그리고 공격에 특화. 방어에는 취약!’
그래서 한번 수세에 몰리기 시작하면, 빼어난 감각이나 큰 희생 없이는 돌이키기 어려운 게 단점이라면 단점이었다.
“흐, 흐압!”
련의 검이 날렵하게 움직이며 금종하의 사각 곳곳을 위협적으로 찌르기 시작했다.
‘허어! 저것은……!’
태허진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한 것을 꾹 참았다. 옆을 흘끗 보자 엽운 역시 몹시 놀란 눈으로 두 사람의 비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중이었다.
곤륜파의 무도는 험한 산세를 뛰노는 신선의 형상을 닮아 있다. 그래서 곤륜의 검이 극의에 달하면 공격하는 내내 땅에 발 한번 디디지 않게 된다.
그 긴 체공 시간 동안 몸을 제어하기 위해 곤륜파의 검수들은 거의 모든 수단을 사용하기에, 그들은 자신이 입고 있는 옷자락까지도 손발처럼 움직일 줄 알았다.
방금 련이 보인 움직임, 아주 조금 팔을 움직여 가볍게 나부끼는 옷자락으로 상대의 시선을 방해하고 유도하는 방식은 곤륜파 검수들의 장기였다.
그저 옷깃 조금 흔드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무리 작은 동작이라도 상대를 속이고 의도대로 움직이게 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눈앞에 호흡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무기가 오갈 때 그러는 건 더욱 힘들다.
그런데 련이 해낸 것이다! 금종하는 련의 움직임에 그대로 속아 넘어갔다.
칼끝은 덧없는 곳을 향하고 자유로워진 소녀가 두 걸음만으로 금종하의 뒤에 섰다. 금종하가 다급하게 움직였다.
‘저 소년의 힘만은 정말 대단하군!’
몇 번이고 도의 경로를 비틀어 상대에게 향하고자 하는 의지만은 칭찬할 만했다.
하지만 금우도법이라는 것이 정작 금종하의 체격과 힘에 어울리는 무공은 아닌 것 같았다. 태허진인은 그렇게 잠시 생각했지만 얼른 털어 냈다.
남의 가문 후계자에게 그의 무공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실례였다.
그리고 이 순간 련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다.
‘이 녀석은 이런 거 말고 패도적인 게 훨씬 더 잘 맞을 것 같은데?’
몸이 좋으면 머리가 고생할 일이 없다더니 금종하가 딱 그 짝이었다.
“흐아앗!”
“읏!”
타아앙!
련은 정수리로 떨어지는 금종하의 칼을 가까스로 막아 냈다. 이리로 올 줄 알고 미리 대비도 했지만, 그의 힘이 원체 좋아서 막아 낸 손목이 징징 울렸다.
하지만 금종하의 시도도 여기까지였다. 련이 받아 낸 칼을 그대로 오른쪽으로 밀어내고 그가 비틀하는 사이 두 걸음으로 그의 뒤에 서서 목뒤에 검을 겨눴다.
“아……!”
금종하의 입에서, 그리고 보던 대중들의 입에서 동시에 탄식이 터졌다.
뒤가 잡혔으니 여지없이 패배였다.
련은 들썩이는 숨을 들이켜면서도 목검 끝이 흔들리지 않게 유지했다. 이마에 땀이 맺혀 머리카락이 달라붙었다.
도를 움켜쥔 금종하의 등이 파르르 떨었다.
금종하는 새빨갛게 터질 듯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려고 했지만 련의 목검 끝에 닿아서 움찔거렸다.
그와 동시에 태허진인이 가볍게 뛰어올라 비무대 위로 내려섰다. 옷자락 펄럭거리는 소리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태허진인이 련과 금종하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두 사람의 무기를 양손으로 잡고 내리누르며 외쳤다.
“승자! 단목련!”
“우와아아아!”
“와아아아아아!”
사람들이 다들 환호하며 요란하게 박수 쳤다. 거기서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건 금가장 사람들뿐이었다.
련을 홱 돌아본 금종하의 눈빛이 분함과 억울함으로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다, 다시 해!”
“뭐?”
“속임수를 쓴 거지!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네가 이길 수가 있어!”
사람들 사이에서 야유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금종하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다, 다시 비무…….”
“금종하!”
버럭 외친 것은 금적걸이었다. 그 살벌한 목소리에 야유하던 사람들까지 목소리를 죽였다.
금종하는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눈물이 차오른 얼굴로 금적걸을 바라보았다.
“비무는 끝났다.”
“하지만 아버지, 전 아버지를……!”
금적걸의 표정이 더욱 딱딱해지자 금종하는 그제야 입술을 다물었지만, 련을 노려보는 눈길에는 변함이 없었다.
련은 어깨 한 번만 으쓱하고 말 뿐이었다. 두어 살이나 어린 말라깽이한테 그래도 패배했으니 분할 만도 했다.
‘좀 더 실력 차이를 느끼게 해줄 수도 있었는데.’
련은 입술을 삐죽 내밀곤 타박타박 걸어 비무대 아래로 내려왔다.
“역시 승자는 단목세가로구만.”
“전통 있는 명문가를 이기기란 쉽지 않지.”
“그래도 나이가 몇 살이나 차이 나는데, 단목세가 첫째 아가씨가 저리 쉽게 이기시다니!”
“역시 대공자의 핏줄이 어디 가는 게 아니구만.”
“대공자께서 살아계시기만 했어도…….”
“그건 금가장주가…….”
“예끼, 이 사람! 들리겠네. 조용히 해.”
그런 말들이 점점 이어지다가 왁자지껄하게 뒤섞여 알아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 순간이었다.
련의 시야가 빨갛게 점멸하며 허공에 글자가 번쩍 떠올라 거의 외치는 것처럼 떠올랐다.
*주의! 영기를 10 이하로 떨어뜨리지 마세요!*
‘앗! 나도 알지! 아는데!’
조금 전까지 영기로 심안과 조화에 정화까지—정화는 쓰지 말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쓰면서 비무를 했는데, 처음부터 영기가 많지 않았던 터라 금방 동이 났다.
그리고 경고 문구와 함께 현기증이 어질하고 일어났다. 솔직히 기력이 달려 어지러워서가 아니라, 다 이겨 놓고 여기서 쓰러지면 얼마나 창피할까 하는 생각에 눈앞이 두 배로 아찔해질 찰나였다.
갑자기 양쪽에서 누군가가 팔을 붙드는 것이 아닌가?
그 거센 기세에 련이 잠깐 공중으로 떠오를 정도였다.
“련아……!”
“당신네들은!”
그러더니 옆에서 버럭 화를 내는 소리가 들렸다. 련은 천천히 균형감각을 되찾으려 애쓰며 소리가 들려온 쪽을 쳐다보았다.
오른팔을 붙잡은 건 단목천기였고 왼팔을 붙잡은 건 시퍼렇게 질린 얼굴의 금적걸이었다.
이마에는 식은땀까지 맺혀 있어서 누가 뒤에서 심장을 찔렀대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얼굴로. 남들이 봤으면 련이 금적걸의 아픈 딸인 줄 알았을지도 모른다.
“아이 상태가 나쁘면 비무를 취소했어야지요! 어떻게 당신네들은 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금적걸은 저도 모르게 울컥한 듯이 버럭 외치다가 말끝을 흐렸다.
단목천기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금적걸은 그 표정을 보고서 정신이 돌아온 듯했다.
“자네…… 지금 무슨 소리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