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41화
폐에 느리게 공기가 차는 듯이, 금적걸은 천천히 련을 움켜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하지만 창백한 얼굴에 빛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금적걸은 선 채로 지독한 악몽 속을 헤매고 있는 것만 같았다.
태허진인이 헛기침하며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러면서도 주위 사람들에게 눈짓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두 가문의 가솔들이 정신을 차리고 얼른 구경꾼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차이가 있다면 단목세가 사람들은 다소 우쭐한 표정을 하고 있고, 금가장 사람들은 한껏 풀이 죽은 표정을 애써 갈무리하고 있다는 것 정도일까.
“크흠. 련아, 괜찮으냐? 몸이 안 좋으면 얼른 의원을 불러오도록…….”
“아니, 아니, 아니요! 저는 괜찮아요! 집중했다가 긴장이 풀렸더니 힘이 조금 빠져서 그래요. 이런 비무는 처음이었거든요!”
련이 팔을 번쩍 들고 외쳤다. 멀쩡한 상태를 강력하게 피력하니 태허진인이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두 사람 모두 훌륭한 비무를 보였으니 상이라도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르신?”
그러나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그의 노력에도 두 가문의 대표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련은 옆을 흘끗 바라보았다.
자신보다 훨씬 더 아픈 것처럼 보이는 금가장주의 얼굴이 눈에 박혔다. 그리고 금가장주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얼굴도.
위지청의 눈길에는 금적걸을 향한 적의가 있지 않았다. 오히려 같은 것을 상실한 사람을 보는 듯한 동병상련의 감정이 느껴졌다.
“으윽……!”
그때 옆에 선 금종하가 억눌린 신음을 흘리며 비틀거렸다. 이번 비무에서 무리한 그의 다리에 쥐가 난 것이다.
“종하야!”
“도련님!”
가장 가까이 있던 련이 반사적으로 그를 부축했다. 금종하의 사지가 파르르 떨렸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 * *
금종하는 련도 멀쩡히 서 있는데 자신만 다리에 쥐가 났던 게 무척 수치스러운지 침상에 누워서 이쪽을 돌아보지도 못했다.
“허허, 잠깐 쥐가 난 것뿐이니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불려온 의원이 허허 웃으며 침을 좀 놔주곤 가져온 것들을 챙겼다.
련은 의원이 탕약도 달여 주고 금종하의 팔다리에 뜸도 떠 주며 오래 함께 있어 주길 바랐지만 의원은 미련 한 점 없이 돌아갔다.
그가 내실을 나가자 남은 사람들 사이에 지독하게 어색한 침묵이 시작되었다.
입을 꾹 걸어 잠근 금씨 부자, 왜인지 조용하고 은은한 표정의 위지청, 금적걸을 쏘아봤다가 걱정스런 얼굴로 자신을 봤다 하기 바쁜 단목현우, 깊이 생각하는 얼굴로 묵묵히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단목천기까지.
거기에 더해 남의 집 가정사에 끼게 된 셈인 태허는 자리를 비켜 주려고 했으나 련의 간절한 눈빛을 받고 자리를 지켜야 했다.
그러나 련은 곧장 후회하게 되었다.
“음…… 어쨌거나 건설적인 비무가 끝났고 금 공자도 큰 부상은 아니라고 하니 지난 비무를 복기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
“…….”
분위기가 두 배로 싸늘해졌다.
금종하의 얼굴이 분함으로 화르르 불타는 사이에 련은 이마를 꾹 짚었다. 태허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기만 했다.
‘아이고, 도사님…….’
도가 문파에서야 서로 한 판 붙고 나서도 허허거리면서 함께 비무 복기도 하고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거긴 신선 되겠다고 모인 사람들이니까!
하지만 여기는 세속의 한가운데 아니던가. 하물며 엽운조차 자신과 대련 끝에 바로 승복하지 못했는데. 이 상황에서 비무 복기를 해 본들 누구 귀에나 들어오겠나.
“……흠, 진인의 말씀이 옳습니다.”
“네?”
“네?”
“아, 아버지!”
그런데 금적걸이 거기에 찬동하고 나섰다. 금종하가 배신감 어린 표정으로 제 아비를 돌아보는 사이에 이번엔 금적걸이 아니라 단목천기가 목소리를 냈다.
“지필묵을 가져오너라. 금 공자가 팔에 쥐가 났으니 지금 나누는 얘기는 련아 네가 정리하면 되겠구나.”
이대로는 꼼짝없이 양가 어르신들 사이에 둘러싸여 서로 두들겨 팬 이야기를 복습하게 생겼다.
련의 두뇌가 비무할 때보다 더 빠르게 팽팽 돌아갔다.
“그…… 그럼, 그건 금 공자와 둘이서 할게요!”
“뭐라?”
단목천기의 눈썹께까지 번진 흉터가 꿈틀했다. 련이 강경하게 말했다.
“무림인은 다른 사람에게 자기 무공에 관한 걸 함부로 말하지 않잖아요.”
“네 무공은 나로부터, 금 공자의 무공은 금가장주로부터 비롯되었거늘 그런 얘기를 해?”
“존경하는 부모님과 조부모님께서 제 겉을 빚어 주셨으니, 속은 스스로 쌓아 가겠습니다.”
련이 또박또박 하는 말에 금적걸이 웃음인지 한탄인지 알기 어려운 소리를 흘렸다. 단목천기도 고개를 내젓곤, 어른들을 데리고 자리를 비켜 주었다.
다만 거처를 지킬 무사들과 보필할 또래 하인들과 엽운까지 자리에 남았다. 서로 나이대가 비슷하고 비무를 참관했으니 함께 얘기를 나누는 게 좋지 않겠냐는 뜻에서였다.
련은 행여나 누가 사고를 칠까 봐 도가 출신 엽운을 남겨 놓았다는 걸 알아챘지만 아무 말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안뜰의 커다란 탁상에 소년과 소녀가 멀찍이 마주 앉았다.
“이래도 괜찮아요?”
련 곁의 화륜이 먹을 요리조리 들여다보며 금종하 쪽으로 눈짓했다.
영민한 화륜은 금가장과 단목세가 사이의 관계, 즉 련의 부친이 어쩌다 죽게 되었는지를 알아챈 듯했다.
금종하는 머리 꼭대기까지 열이 오른 채 제 하인과 속닥이느라 화륜의 말은 듣지 못한 눈치다. 련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다고 이걸 어른들 다 있는 데서 하기는 창피하잖아.”
“으음.”
그 얘기가 아닌데…….
그러나 화륜은 더 말하지 않고 련이 손에 쥔 먹을 빼내어 슥슥 갈았다. 련이 스스로 갈겠다고 다시 손을 뻗었지만 화륜은 거의 정색하면서 련의 손을 피했다.
화륜의 손이 몇 번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금방 먹이 부드럽게 갈렸다.
“으으음.”
“으음.”
그 와중에도 자신보다 한 뼘은 작은 아이에게 패배한 비무를 복기해야 하는 금종하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혼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감탄이 역력한 표정을 지었다가 애써 근엄한 표정을 연출했다가 화가 나기라도 한 것처럼 인상을 썼다가, 요리조리 표정이 변했다. 팔이 아니라 얼굴에 쥐가 났대도 믿을 만했다.
“솔직히 내가 좀 방심해서 봐준 거지 처음부터 제대로 했으면 이길 수 있었어!”
금종하가 대뜸 말했다. 련은 눈을 가늘게 뜨고 금종하를 쳐다보는데,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단정한 자세로 옆에 앉아 있던 엽운이었다.
“왜, 왜 웃어?”
그 웃음소리에 금종하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서, 곁에 선 하인이 안절부절못했다.
“아니 뭐…… 이길 수 있다고 하길래.”
먼저 패배해 본 사람의 관록과 우월감이 살짝 드러나는 엽운의 표정을 본 금종하는 그의 눈을 피하곤 조금 기죽은 목소리로 외쳤다.
“아, 아니면 단목련 너 무슨 속임수라도 쓴 거 아니야?!”
“무슨 속임수?”
금종하의 머릿속이 맹렬하게 돌아갔다.
“어어, 전음으로 어른들한테 어떻게 대응할지 듣고 했다거나…….”
체격이 건장해도 이제 겨우 열 살 된 어린애가 생각해 낼 수 있는 속임수에는 한계가 있다.
“말이 되는 이야기야, 그게?”
비무 도중에 전음으로 훈수를 듣고 그걸 실천하는 건 솔직히 어지간한 고수라도 못할 짓이지만 금종하는 격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도저히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래! 그런 게 틀림없어! 어쩐지 네가 너무 빠르게 피하더라니! 우리 아버지를 항상 비난하더니 이런 비무 자리에서까지 비겁한 수를 써?!”
“도, 도련님…….”
하인이 안절부절못하는 사이에 련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다시 해?”
“뭐?”
“다시 붙어 보자고. 지금은 어른들도 없으니까.”
“그……!”
“겁나면 관둬.”
련은 그렇게 말하곤 붓을 손에 쥐었다. 금종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와!”
그 기세등등한 금종하의 목소리에 엽운이 오히려 좀 더 당황해서 련에게 속삭였다.
“련 소저, 너무 심하게 하는 건…….”
아무래도 금종하에게 동정심이 드는 모양이었다. 동병상련의 감정일지도 몰랐다. 련이 입술을 쭉 내밀고 엽운을 쳐다보았다.
“엽운 도사님은 누구 벗이지요?”
“당연히 련 소저의 벗이지요. 제 검 빌려드릴까요?”
“야! 뭘 소곤거려! 또 몰래 훈수라도 두는 거야?! 당장 튀어나오라고!”
* * *
금종하는 눈물로 얼룩져 퉁퉁 부은 눈으로, 련의 맞은편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머리는 산발이었고 얼굴엔 흙먼지가 젖었다가 말라붙어 얼룩져 있었다.
“복기해 볼까?”
“…….”
“아니면 한 번 더 대련해?”
“아, 아니야. 하자…… 복기하자…….”
화들짝 놀란 금종하가 얼른 말했다.
“어, 그러니까 세 번째 합에서…….”
그렇게 말하던 금종하가 슬그머니 입을 다물고는 련의 눈치를 살폈다.
“두 번째 합에서?”
“으음.”
“설마 첫 번째부터…….”
“처음부터 말해 줘?”
“아니…… 어…… 응……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