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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43)화 (43/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43화

“장주님, 태상가주님 앞이십니다.”

위지청이 조용히 말했다. 금적걸은 씨근거리는 습기 찬 숨을 다스리려 애쓰며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태상가주께서 감추고, 말하지 않으시고, 그러곤 제가 청한 비무에 현성을 내보내셨지요.”

“하! 가세가 기울어 가는 단목세가를 보고 사람들이 뭐라 수군거렸는지 이 내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한 글자도 잊은 적이 없지.”

동정혈사에서 있었던 일은 사람들 사이에 퍼져 나갔고, 당시 단목세가 가주이자 천하제일이었던 단목천기와 그의 장자 단목현성이 얼마나 큰 부상을 입었었는지도 모두 알고 있었다.

그 혈사가 끝나고서 세가 안에서 두문불출하기 시작한 단목천기를 두고 그의 부상이 낫지 않았다며 떠드는 사람들, 모습을 드러낸 단목현우를 보고서도 그가 여전히 아픈 게 분명하다는 은밀한 추측.

“다들 우리 세가가 몰락해 가는 걸 보면서 내가, 그리고 현성이 부상을 이겨 내지 못했노라 떠들었다. 그걸 너는 몰랐다고 말하는 거냐?”

“믿었습니다!”

금적걸이 입술을 악물었다.

“당연히 세상 사람들의 음해일 거라고 믿었단 말입니다. 현성은……. 그는 그렇게 약해질 사람이 아니니까…… 아닐 거라고…….”

세간에 떠도는 건 모두 헛소문인 게 당연하다고 믿었다.

단목천기가 그를 보며 탄식을 흘렸다.

“그래서? 자네가 아무것도 모른 채 비무첩을 넣었는데, 현성이 혈라곡과의 전투에서 아직도 낫지 못했단 얘기를 했어야 했다고? 그 몸으로 련아가 태어나던 날 있던 습격을 막아 내느라 피를 토하고 나날이 죽어 가고 있으니 자네와의 비무를 피해야 했다고? 무슨 얘기를 해도 사람들은 단목세가의 몰락을 점치고 비겁하다 손가락질했을 게야!”

“그 손가락질이 그리 두려우셔서 이젠 현성의 딸마저 그런 식으로 내모십니까!”

“장주님!”

위지청의 목소리가 한 번 더 높아지자 그제야 금적걸은 입을 다물었다.

분기에 찬 금적걸은 젖어 들려는 눈매를 수습하기 위해 하늘만 쏘아보았다.

단목천기가 그런 금적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표정을 바꾸었다.

꾸며 낸 격노가 햇볕 아래 흩어지고, 세월에 마모되어 희뿌연 빛이 감도는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그간 그 약재들을 보내온 것인가?”

“……!”

겨우 분을 삭이곤 호흡을 고르던 금적걸이 움찔했다. 단목천기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약초꾼 서넛 둘러 간다고 못 알아낼 줄 알았더냐. 우리 세가가 망했다 망했다 해도 그 정도 힘은 있었느니라.”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모른 척하는 표정이 자못 어색했다. 단목천기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단목세가의 가세가 기울어 가는 시간 동안, 세가에 쌓여 있던 은원 역시 삭아 내렸다.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잽싸게 정산을 마쳐 손을 털고 떠났고 원한이 있는 사람들 역시 이때를 놓치지 않고 그들을 공격해 왔다.

시간이 지나 남은 은원도 이제 없다고 모두 여길 즈음 갑자기 몇몇 사람들이 세가에 진귀한 약재들을 떠밀기 시작했다.

은혜를 입은 사람은 없는데 갚는 사람만 나온 판이니 당연히 수상쩍다 여겨 파헤쳤는데, 그 끝에 금가장이 있었다.

눈매에 그늘이 깊어진 단목천기가 조용히 미간을 짚었다.

“……왜 아무 말 하지 않았느냐?”

“대체 무엇을 말입니까?”

“왜 그때 그 비무에서, 현성의 상태를 알지 못했노라고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느냔 말이다.”

금적걸이 처음으로 허물어진 표정을 지었다.

억울하고 분하고 원통하고, 그러면서도 동시에 죄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이 깃든.

탁상 위로 무거운 침묵이 지나갔다.

“……어찌…… 어찌 말을 한단 말입니까…….”

그가 정말로 그런 짓을 벌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한 세가의 후계자가 와병 중인 것을 알고 비무를 청하여 그 틈을 타 그를 살해할 결심을 하는 사람이었다면 차라리 그럴 수 있었으리라.

알지 못했노라 변명하고 그 장례식에 참석해 가슴 아파하는 모습을 보였으리라.

하지만 금적걸은 그러지 않았다. 그러지 못했다.

알았든 몰랐든 아들을 죽게 한 사람이 어찌 뻔뻔하게 그 장례식에 참석해, 아무것도 모르고 비무를 신청했을 뿐이었노라고 그 아비와 처와 딸에게 고백하겠는가.

그렇게 해서 죽은 사람이 돌아온단 말인가. 아니면 단목천기가 달리 마음잡을 곳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아니면, 그의 아이들에게 아비가 어쩌다 죽었는지 말해 줄 도리가 생긴단 말인가…….

단목천기는 금적걸의 그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회한에 잠긴 듯 눈을 내리감았다.

“……그럼 자네가 말하지 않는데, 우리가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금적걸의 눈에 혼란이 번졌다.

* * *

금적걸은 몹시 낯선 얼굴로 사당 앞에 서 있었다. 단목천기와 위지청은 그 뒤에 한 걸음 떨어진 채 서 있었다.

“그이가…… 마지막까지 미안해한 여러 가지 중의 하나였어요.”

“무엇…… 이.”

금적걸이 뒤를 돌아보았다.

“괜한 욕심을 부렸다고…….”

위지청은 아련한 눈으로 사당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는 남편의 위패가 잠들어 있다.

위지청이 단목현성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세상에 대한 비틀린 냉소와 음울한 다정함만 남은 사람이었다.

그러던 그가 마지막 순간에는 그녀를 보면서 눈을 한껏 접고 봄날 꽃처럼 부드럽게 웃었더랬다.

떠올리면 그리워서 떠올리지 않으려고 했더니 기억에서 흐려지는 것 같아, 애써 떠올리면 다시 그리움뿐이다.

“금 장주께서 보낸 비무첩은…… 장주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피하려면 할 수 있었지만, 그이가 꼭 그 비무를 하고 싶어 했어요.”

도장을 이끄는 양친을 둔 또래 청년, 자신을 한 번도 이긴 적 없었으면서도 끈질기게 도전해 오는 금 장주의 첫째 아들을 단목현성은 기억하고 있었다.

한때 눈부시게 빛나고 분명하게만 보였던 자신의 앞날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희미하고 흐릿해져 가는 시간 속에서, 단목현성은 무언가를 증명할 기회가 닥쳤을 때 그걸 손에 움켜쥐기로 했다.

“그 사람에게는 시간이…… 없었어요.”

금적걸의 표정에 금이 갔다.

단목현성이 열다섯 살이 되던 해 그는 아버지 단목천기를 따라 혈라곡으로부터 사람들을 지키려고 했다.

그리고 그 결과 남들은 가장 찬란하게 꽃을 피울 시기에 단목현성의 시간 위에서는 서리가 내려앉았다.

하지만 단목현성은 그 얘기를 입 밖으로 낸 적이 없었다.

그는 남들에게 동정받는 걸 끔찍하게 여겼다.

그러다 마침내 그 겨울마저 끝자락을 보이기 시작했을 때.

이젠 정말 무엇도 어떻게도 할 수가 없다는 걸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 아무것도 모르던 금적걸이 비무첩을 보내왔다.

“그래서 그 비무가 끝나고, 많이…… 많이 미안해했어요.”

단목현성이 가장 미안해했던 상대는 위지청과 단목련, 그리고 단목비였다.

위태롭게나마 가족과 함께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시간을 태워 스스로를 증명하고자 했으므로.

그리고 그다음으로 그가 미안해했던 건…….

“금 장주가 앞으로 괜한 죄책감만 느끼게 될까 걱정이 된다고…….”

단목현성이 먼저 나서서 금적걸을 변호한들 사람들은 그저 단목현성의 아량에만 감탄할 것이고, 금적걸은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에서 다친 사람에게 비무를 청하고는 실수로 죽게 한 허술한 무공의 삼류 무사가 되고 만다.

힘이 없는 협은 스스로를 상하게 한다.

연약한 상대에게 정의를 떠맡긴들 함께 가라앉을 뿐이라, 침묵하는 금적걸을 두고서 단목세가에서는 먼저 가타부타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 * *

금적걸은 단목현성의 위패를 처음 보았다. 향을 태워야 하나 합장을 해야 하나 고민했으나 그만두고서 위패에 새겨진 이름만 한참 바라보았다.

단목현성의 생전에, 지금보다 젊어 어리다는 말이 더 어울렸을 금적걸은 단목현성에게 많은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를 영영 앞지르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에 가까운 열등감, 부모의 기대를 등에 짊어진 첫째로서의 동질감, 이 절강성에서 결코 단목세가를 이길 수 없으리라는 패배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한 번은 그를 이기겠다는 열망, 그리고 모든 걸 집어던지고 평범한 벗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자인 못할 바람까지.

그래서 청년 금적걸은 자신의 도에 전진을 보자마자 아무것도 모른 채 비무를 신청했던 것이다. 단목현성을 이길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는 희망을 가지고.

그러나 그 비무 끝에 단목현성이 죽었을 때 그 희망은 산산조각 났고 원치 않았던 죄책감과 오갈 데 없는 원망이 휘몰아쳐 그를 괴롭혔다.

하소연할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단목세가는 아무것도 몰랐다는 그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고, 그의 독수를 눈여겨보고 다가온 자들은 돌아설 것이며, 그의 비겁한 손속을 경멸하는 자들은 그가 거짓말까지 한다 여길 테니까.

그렇게 여기까지 왔다.

자신이 단목세가라는 이름은 듣기도 싫어하는 꼴을 보고서 자신의 어린 아들이 이런 짓을 저지르기 전까지, 금적걸은 살아생전 이 장원 안에 발을 들일 날이 올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의 딸과 자신의 아들의 비무에서 몇 년 전 그날의 그림자를 다시 보리라고도, 상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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