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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44)화 (44/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44화

그 비무 끝에 단목현성의 딸이 휘청이던 순간 그날의 악몽이 그의 정수리를 꼬챙이로 꿰뚫는 것만 같았다.

백도 무림의 일가로 지켜야 하는 도리와 협이라는 것이 아픈 아이까지 비무대 위로 내모는 것이냐고, 그래야만 하는 거냐고 외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금적걸은 단목현성의 위패를 가만히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위패는 아무 말이 없다.

벼락이 치거나 갑자기 땅이 흔들리거나 그를 비난하는 귀곡성이 울려 퍼지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했다, 사당의 향 사르는 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금적걸은 목구멍으로 치닫는 많은 말들을 삼켰다.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도 삼켰다.

가족과 보낼 한 뼘의 시간을 태워 스스로를 증명하는 데 모두 쓰고서 어찌 후회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원망하지 않으십니까.”

금적걸이 물었다.

누구를 원망하느냐는 말이 생략된 질문에 위지청은 한 걸음 앞으로 나와 향을 사르곤 그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삶에 어떻게 원망이 없겠습니까. 그래도 괜찮습니다.”

위지청은 누굴 향한 원망인지도 말하지 않았다. 오래도록 향이 불탔다.

* * *

“전화위복이 이런 것이겠습니다.”

견언조가 박수까지 치면서 말했다.

이번 비무에 참관했던 견언조는 참관 내내 긴장하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애쓰다가, 련이 여유 있게 이긴 다음부터는 웃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그리고 금가장 사람들이 돌아가고 난 뒤, 련과 련의 하인이라는 소년과 곤륜파의 소년 도사 세 사람이 안뜰 한편에서 노닥이는 모습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정말로 신선이 데리고 있다가 놓아준 것이 아닐까요?”

“또 무슨 소리를 하나, 자네.”

단목천기는 시답잖은 소리를 한다는 투였으나, 눈을 내리감고 묵묵히 다문 입술 새로도 뿌듯한 기색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금적걸이 제 외동아들을 어떻게 키우는지 아십니까? 그 나이 아이들이 먹을 만한 영약은 아마 금가장에서 다 빨아들였을 겁니다.”

“그런가?”

“아직 심법을 깨우치지 못해서 그렇지, 안에 든 것만 따지면 작은 용이라 합디다.”

그런 소년을 상대로, 련은 마치 사범이 어린아이를 가르치듯 손쉽고 간단하게 이긴 것이다.

단목천기는 가슴을 가득 채우는 뿌듯함을 애써 가다듬으며 헛기침했다.

“그래서 신선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하는 것인가? 그보다 자네 셋째 얘기나 해 보게. 이제 회시를 치르러 간다지 않았나? 자네가 이런 데 와서 노닥거릴 시간이 있나.”

“시험은 그놈이 치지 제가 칩니까? 저야 돈이나 대주면 그만이지요.”

말은 그렇게 해도 견언조의 광대가 한껏 치켜 올라갔다.

그냥 향시에 급제하기만 해도 대대손손 영광으로 삼을 일인데 장원 급제라니!

자식에 대한 칭찬이라면 천 번을 들어도 기쁜 법 아니겠는가.

“그리고 정말 덜컥 회시에도 붙으면 이걸 또 어찌할지. 이 녀석이 항주를 떠나서 북경에서 관리 노릇을 하겠다고 하면 헛돈 쓴 것이나 다름이 없는데, 이놈이 그런 걸 생각이나 할지도 의문이고요.”

엄살 섞인 자식 자랑에 단목천기가 껄껄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련아에게 북경에도 숙부가 생긴다니 좋은 일이지. 자네는 그 애가 뭘 한다 하든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두게!”

“아니, 어르신만 좋고 말 일입니까?”

견언조는 한껏 자식 자랑을 즐기고는 천천히 허리를 폈다. 의형과 자식 얘기를 하는 건 무척 즐거웠지만 목적은 그게 아니었다.

“하여 청련수 매출이 급증했습니다.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듣기는 했다. 손녀딸이 신나서 그 물건을 만들어 납품하느라 일주일 내내 바삐 움직이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단목천기는 헛기침만 하며 모르는 척했다.

“상방의 작은 물건이 많이 팔린다고 세가가 들썩일 일이겠느냐.”

“상방의 작은 물건이 아니라 이 세가에서 아기가 직접 만든 것 아닙니까. 그 작은 물건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팔린다니까요. 이거 항주 부호 순위가 바뀌게 생겼습니다.”

“그 정도라고?”

“이래서 무림인들하고는 돈 얘기를 할 수가 없다니까…….”

견언조는 장난스레 혀를 차고는 금방 진지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청련수를 마셨더니 내공이 일 갑자나 늘었다는 얘길 들었다고 하면 온 세상 무림인들이 다 달려들지 않겠습니까?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 정도의 영약인 셈입니다. 당연히 어마어마하게 팔리지요.”

“하지만 그게 정말 그런 효과가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없기는요? 제 아들이 이걸 쓰고 장원 급제를 하였지 않습니까. 정신을 명료하게 만들어 주고 잡생각을 없애 주고, 잘 때는 잘 자게 해 주고 깰 때는 잘 일어나게 해 주는 약이 세상에 또 있습니까?”

“그런다고 모두 장원 급제를 할 수는 없지 않나.”

“그거야 쓰는 사람 탓이지요. 그리고 그 이전에 청련수는 본디 만병통치약으로 소문이 돌고 있었습니다. 저희 상단 서기나 장궤들은 이미 이걸 상자째로 사 두었습니다.”

견언조는 청산 유수였다. 단목천기는 고개를 내젓곤 말을 돌렸다.

“……값이 비싸고 진귀해져 으레 포기하는 자들도 늘 법한데 아직도 많이 팔린다고?”

“그러니 시중에 풀린 순청련수까지 판매가 치솟은 것입니다. 진청련수는 세도가에서 눈에 불을 켜고 사들이고 있고요. 련아의 말이 옳았습니다.”

─ ‘청련수를 썼더니 장원 급제를 했다’고 하면, 청련수 한 병에 금전 한 냥을 가지고 오겠다는 사람들도 있을 거 아니겠어요?

견언조는 처음엔 제게 청련수 한 작에 은전 다섯 냥을 얘기하던 이화전장 대행수가 바로 어제 사람을 보내 금전 한 냥으로 올려 부른 일을 떠올렸다.

이 모든 게 위학에게 청련수를 맡긴 련의 판단 덕분이었다. 자신의 첫째와 둘째가 아닌, 상방의 일을 하지 않을 셋째에게 맡겼던.

이제 그 소녀가 금가장주의 후계자를 꺾었다.

견언조는 그를 성공적인 상인으로 이끈 날카로운 감이 저 소녀를 주목한다는 걸 알아챘다.

소녀의 천진한 얼굴은 제 어미를 똑 닮았지만, 웃음소리를 들을 때면 그가 본 어린 단목현성이 문득 떠오르곤 했다.

하늘은 하나를 앗아 가면 하나를 주는 것인가…….

“흠. 청련수 일은 장원 급제까지 하고 온 셋째가 대단한 것이고 근래엔 자네 둘째가 부지런히 뛰어다니던데, 왜 그걸 자네가 생색을 내나?”

“자식들 일이 제 일이지요.”

견언조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자신의 둘째를 떠올렸다.

매사에 일 처리가 분명하고 냉철해서 무슨 일을 맡기든 알아서 잘하기에 크게 신경을 쓰지 못했는데, 근래에 첫째와 셋째를 나름대로 챙기는 모습에 다소 감명을 받았다.

그러면서 다시금 첫째 생각을 하자 가슴이 답답해지고 만다. 둘째가 제 오라비 사람 만들겠다고 흑천련 인사들까지 동원하는데 첫째랍시고 있는 것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으니…….

견언조가 둘째 생각을 곱씹는 사이에 단목천기가 말했다.

“그렇다고 련아를 붙잡고 헛바람 넣지는 말게.”

견언조가 눈썹을 홱 치켜올렸다.

“무슨 헛바람 말씀이십니까? 설마 청련수가 좀 잘 팔렸단 얘기를 한다고 련아가 오만방자해지기라도 하겠습니까? 형님은 아이를 너무 엄하게 키우시려는 경향이 있으십니다.”

단목천기는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말고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지금 당장은 금종하도 꺾은 련이지만 그 아이는 내공을 쌓을 수가 없다.

그 탓에 련이 행여나 너무 섣부르게 세가의 일에서 손을 떼고 상단의 일에만 관심을 가질까 봐 걱정이 된다는 얘기는 차마 할 수가 없었다.

돈을 벌고 생계를 유지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야 잘 알지만, 지금의 사태를 보아하니 단지 운이나 우연이라 하더라도 손녀가 재주가 있는 것도 알겠지만, 그래도…….

“아.”

“음? 왜 그러십니까?”

단목천기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그제야 자신의 마음이 어디로 쏠려 있는지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 * *

달이 떠오르고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리는 밤, 련은 단목천기가 갑작스럽게 불렀다는 얘기를 듣고는 보고 있던 장부를 내려놓고 그의 처소로 향했다.

“무리하지 말래도.”

련은 배시시 웃기만 했지만, 단목천기는 련이 여태 자지 않고 들여다본 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생계를 유지하는 것은 고귀한 일이나 그게 급하지는 않다. 가장 중요한 건 너 자신이지.”

“할아버지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련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으이구. 일주일 내도록 청련수 만드는 일만 해놓고 무얼 명심을 한다고.”

“헤헤헤…….”

련은 천진한 표정으로 웃었지만 단목천기는 그러지 못했다.

재경각주 설관희에게서 이미 보고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련이 이번에 청련수로 벌어들인 돈으로 무얼 하려고 하는지를, 일목요연하게.

“……엽운 도사는 좀 어떻느냐?”

“엽운 도사님이요? 정말 똑똑한 분이시더라고요.”

갑자기 엽운 이야기를 꺼냈지만 련은 어렵지 않게 대꾸했다.

“태허진인님께서 왜 엽운 도사님을 장문인 어르신 밑으로 넣으려고 하시는지 알 것 같았어요.”

그만한 재능과 노력을 겸비하고 있으니, 장문인이 성심성의껏 길러내 당대의 곤륜파 대제자이자 차기 장문인으로 만들 욕심을 낼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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