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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45)화 (45/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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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45화

“……태허진인의 마음을 알아챘느냐?”

“아…… 네. 굳이 제자가 아니라고 하시면서도 엽운 도사님을 무지 아끼시는데 엽운 도사님도 굉장한 자질이 있으시니까 그런 게 아닐까 하고…….”

남의 고민을 조금 알 수 있다 보니 이 얘기를 남이 입 밖으로 꺼냈던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었다.

“그렇군…….”

“그런데 그게 꼭 좋은 생각인지는 전 잘 모르겠지만요…….”

“흠. 넌 어찌 생각하기에?”

“엽운 도사님은 태허진인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싶으신 것 같더라고요. 처음부터 태허진인님께 이끌려 곤륜파로 들어갔대요.”

“그래, 그랬지.”

“마음속으로 이미 깊이 존경하고 있는 분이 계신데 괜히 다른 스승님을 모시게 되면 번민만 생기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태허가 타고난 기질이 자유롭다 보니 한 곳에 박혀 제자를 가르칠 겨를이 없어 그런 마음을 먹은 듯하더구나.”

“지금도 엽운 도사님이 잘 따라다니고 있는데도요?”

“이제 엽운 도사를 문파의 동량지재 중에서도 핵심으로 삼으려고 하니, 돌아간 뒤부터는 가능하면 곤륜산 안에서 키우려는 게지. 조직이라는 것이 그렇다. 신선들 되겠다고 모였다지만 그래도 사람 사는 것인데 다를 게 있겠느냐? 얼굴 한 번 더 본 사람에게 더욱 마음이 가는 법.”

“아…… 그게 그럴 수도 있겠네요. 전 그냥, 엽운 도사님이 정말 자질이 뛰어나시니까…… 실력으로만 따지면 장문인 되는 건 걱정이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좋은 분이기도 하시고.”

단목천기는 자신이 아직 열 살도 되지 않은 어린애에게 너무 어려운 얘기를 했다 싶으면서도, 단목련이 잘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는 않았다.

단목천기는 조용히 수긍하는 련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 대단하다는 기재를 어째 매일 매일 가르칠 만하더냐?”

“네? 제가 가르…… 가르치다니요.”

련이 화들짝 놀라며 부정했다. 단목천기는 그 모양새를 보고 작게 웃었다. 작은 아이가 양쪽으로 둥글게 땋아 묶은 머리가 파르르 흔들렸다. 나비의 날갯짓 같았다.

“엽운 도사가 겉으로 보기에는 유순해 보여도, 너와 붙기 전까지는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는 녀석이니만큼 보통 자존심이 센 것이 아닐 텐데. 네 얘기라면 끔뻑 죽으며 새겨듣더구나. 내 말 틀렸느냐?”

“에이. 그동안 벗이 없었대요, 엽운 도사님이요. 제가 처음으로 사귄 벗이니까 친하게 지내는 거예요.”

“그럼 너와 벗이 되고 나서부터 놀랄 만큼 일취월장한 것도 없던 벗이 생겨서란 말이야?”

“마음이 편해지면 성취가 느는 법이죠!”

“그럼 이번에 금종하에게 깨달음을 준 것은? 그 아이도 너와 벗이 되었더냐?”

거의 울면서, 코와 뺨까지 빨개져서는 돌아갔는데 그 꼴을 보고서 누가 친구니 벗이니 할 수 있을까.

련도 그 사실을 알기에 무안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단목천기는 단정하게 앉아서는 눈만 내리깔고 있는 손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보이더냐?”

“…….”

지칭하는 말은 없었지만 두 사람 다 무엇을 얘기하는지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단목천기가 조용히 말을 덧붙였다.

“네가 나에게도 가르침을 주지 않았더냐.”

천고의 기재라 하더라도 또래 아이에게 도움이 되고 길을 알려준 것과 과거의 천하제일인이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게 한 건 격이 다른 문제다.

“그 길이…… 그 검로가, 그 방향이 네 눈에는 보이더냐?”

련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조용히 그리고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 끄덕.

“허…… 그게 다 보인단 말이지……. 다 알겠다는, 말이지.”

끄덕.

련은 한 번 더 끄덕이기만 했다. 단목천기는 눈을 내리감았다가 조용히 뜨고서 탁상 위로 손을 내밀었다. 잠깐 머뭇거리던 련이 그 손 위에 손을 올렸다.

화상 흉터뿐만이 아니라 각종 자상으로 얼룩진 그의 손 안에서 련의 손은 작고 희고 앳되기만 했다.

단목천기가 헛웃음 지었다.

“어찌 무림인이 자기 손목을 이리 쉽게 내어줘.”

“아.”

련은 민망한 표정으로 미소지었다. 단목천기가 그 손등을 어루만졌다.

“내가 훑어봐도 되겠느냐?”

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단목천기가 손을 교묘하게 움직여 련의 손목을 감싸 쥔 채 눈을 감았다.

어두운 밤, 두 사람이 마주한 자리를 밝히고 있던 촛불이 아주 조금 흔들리는 사이에 먼 곳 처마에 매달린 등불들이 연이어 훅, 훅, 훅 꺼졌다.

풀벌레들이 일시에 울음을 멈추었다.

별이 떨어졌다면 그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침묵 속에서 단목천기의 힘이 조용히 련의 혈도를 돌았다.

아이가 정신을 찾지 못하고 앓는 동안 수십 번이고 훑어본 혈도였다. 그때는 아무리 봐도 알지 못했던 것이 지금은 느껴졌다.

만년설을 인 태산을 앞에 둔 것처럼 압도하는 힘.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것처럼 자신을 휩쓸려 드는 강맹한 힘이 이 작은 몸 안에서 휘몰아치고 있었다.

단목천기가 눈을 뜬 순간 다시 풀벌레가 울기 시작하고 촛불이 한번 일렁였다.

눈앞에 손녀의 눈동자가 있었다. 별이 뜬 듯이 반짝이는 빛을 가진 눈동자.

“이 힘이…… 이 영기(靈氣)가 나를 치유한 것이로구나.”

련은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힘 때문에 네가 내공을 쌓을 수가 없는 거였고.”

“네…….”

“사람의 몸에 어찌 이런 힘이…….”

탄식인지 감탄인지 모를 소리를 흘리던 단목천기가 문득 뭔가를 깨닫고는 표정을 싹 굳혔다.

“네가 만든 청련수의 효험이 그리 좋다더니 그것도 네가 지닌 영기 덕이더냐?”

“네.”

“그리하면 약당 일은 이제 그만두도록 해라.”

“네? 하, 할아버지?”

“자식 손자 피 팔아 제 배를 불리는 조부가 어디 있단 말이냐?”

단목천기가 나직하게 말했다.

조부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싶었다. 련은 얼른 양손을 흔들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일단 이게 피는 아니고.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사실 이 힘이 너무 많이 쌓여도 안 되거든요. 제가…….”

“힘이 쌓여도 안 된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단목천기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련은 살짝 긴장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영기가 너무 강하다 보니까 이게 계속 쌓이는데, 많이 쌓이면…… 제가 몸이 아파요.”

“……아파?”

“네…… 그래서 제때제때 써 줘야 해요.”

“어찌, 어떻게 아프단 말이냐?”

단목천기가 다급하게 물었다. 련은 여기서 적당히 둘러댈까 하다가 그냥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괜히 괜찮다는 말로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했다가 단목천기의 걱정만 부추기게 될 것 같았다.

“많이 심하면 피를 토한다거나…… 열이 난다거나…… 몸살 같은 걸 앓거나……. 그렇긴 한데 적당히 쓰기만 하면 건강하니까요. 금종하도 이길 정도로요!”

련은 그렇게 말하며 검을 휘두르는 시늉을 해 보였다.

단목천기는 련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얼굴이 파래졌다가 하얘졌다가 왔다 갔다 하더니 마지막엔 힘이 쭉 빠진 표정이었다.

“……정말 그 힘을 써야만 건강할 수 있다는 게야?”

“네. 그러니까 청련수 사업은, 말하자면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어휴. 문자도 읊어? 네가 다 컸구나.”

단목천기는 혀를 차곤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안 쓰면 몸이 상한다는데 이걸 뭐라 하겠는가?

그러다 그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내당주…… 네 어미가 꼭 그처럼 앓았는데.”

“네?”

“잔기침을 달고 살았다. 열이 오르내리는 게 매일의 일상이었고. 심할 때는 피를 토할 때도 있었다지. 대단하다는 명의를 데리고 와도 낫질 않았어.”

련이 아는 지금의 모친을 보고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무공을 익힌 분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처럼 병약한 사람도 아니었는데.

“그러다 너를 가졌을 때 난리도 그런 난리가 아니었지. 몸도 안 좋은 사람이 아이를 가졌으니…….”

련은 거기까지 듣다가 조금 의아하다고 생각했다.

단목현성은 그래도 세가의 장자이고 어머니는 그의 부인이었는데, 단목천기의 말을 들어보면 아예 그들 부부가 아이를 가지리라 기대도 하지 않은 듯한 눈치였다. 어찌 그런 혼사를 진행했을까?

“그런데 너를 가지고서부터 사람이 놀라울 만큼 건강해지기에 모두가 너를 복덩이라고…….”

단목천기는 거기까지 말하다가 말끝을 흐렸다.

단목련이 위지청의 태내에 있었을 때야 모두가 복덩이라고 불렀으나 그 아이가 태어나던 때 세가가 통째로 습격을 받는 사건이 있었다.

정확히 그 결과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 이후에 단목련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알게 되었고 단목현우는 폐관 수련에 들어갔으니, 그녀의 탄생에 불행이 깃든 것은 아닌가 곱씹는 사람도 있었다.

“어머니한테는 말씀드리지 말아 주세요, 할아버지.”

그러나 지금 련에게 중요한 건 자신이 과거에 복덩이로 불렸는지 아닌지가 아니었다.

병약하던 사람이 아이를 낳고 도리어 건강해지는 기적을 보았는데 그 아이가 자신과 똑같은 행색으로 아프단 얘기를 듣고 제정신일 어머니가 있겠는가.

그러지 않아도 칠 년이 넘는 시간을, 아이가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아야 했던 사람인데…….

“……알았다. 말하지 않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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