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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46)화 (46/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46화

“꼭이요. 다른 사람에게도요. 아무에게도…… 우리 둘만의 비밀이에요.”

“알았다니까. 뭐 맹세라도 해 주랴? 이 검이라도 걸어?”

단목천기가 자신의 애검을 손끝으로 툭툭 가리키며 말했다.

동정혈사에서도 함께한, 역사가 있는 검이었다. 그 검만 팔아도 단목세가의 저택을 새로 지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천하제일인의 비애가 깃든 애검이니 부르는 게 값일 테니까.

련이 반색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아니, 이게…… 알았다. 내 이 검을 걸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마.”

“저한테 줘 버리고 누구에게 얘기하고 이러시면 안 돼요.”

“안 그런다, 안 그래!”

단목천기가 너스레를 떨었다. 련은 그제야 마음 놓고 빙긋 웃었다.

단목천기는 아직 어리고 앳된 손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는 걸 보면서 천천히 말을 골랐다.

“련아야.”

“네, 할아버지.”

“네가 가진 그 영기는…… 인간이 천천히 정제하고 쌓아 올려 내공이라는 것으로 만드는 힘이다.”

“네? 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였으나 단목천기의 표정이 진지하기에, 련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한데 그걸 품고 있는 네가 내공을 쓸 수 없다는 건, 그에 상응하는 힘을 운용할 수 없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이지 않으냐?”

련은 뺨을 긁적였다. 그에 관해서라면 자신도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했었다.

“전…… 사람의 내공이라는 게 냇물 같은 거라고 생각했어요. 단전에 조그만 연못을 가꾸는 거죠. 그런데 저는 파도가 치고 있으니까 안 되는 것 같다고요.”

“그러나 그 냇물로 하려는 것은 물레방아를 돌리고, 물벼락을 쏟아 내고, 불을 끄는 것이다. 바닷물로도 응당 할 수 있어야 마땅한 것 아니냐.”

“어?”

조부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련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기울였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그 내공으로 무얼 하는가? 좀 더 빠르게 달리고, 검기를 쓰고, 더욱 나아가 검강을 휘두르는 것 아니던가.

내공으로 먹고 마시자는 것도 아닌데 바닷물이면 어떻고 냇물이면 어떤가?

‘어? 정말 아무 상관 없지 않나?’

“네 힘을 무리(武理)에 어울리게 할 방도가, 당장은 아무도 모를 테지만 어딘가에는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제야 드는구나.”

“……!”

“함께 방법을 궁구(窮究)해 보자꾸나.”

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단목천기는 그런 손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자신이 지난 세월 사그라뜨려 온 활력이 서서히 되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오래도록, 긴 시간을 그늘진 곳에 앉아 있었다. 일어설 이유가 없었다.

그의 손녀가 지금 그 이유를 찾아주었다. 단목천기의 눈이 강한 빛을 발했다.

련은 그와 눈을 마주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 * *

금가장으로 돌아온 금적걸은 단목련이 이번 비무에 대해 썼다는 종이를 보며 턱을 쓸었다.

“이게 그것이냐?”

“네…….”

대답하는 금종하는 기가 팍 죽은 얼굴이었다. 금적걸은 아들을 흘낏 바라보았다.

외동아들인 데다가 재능도 출중하여 아끼고 어여삐 여기기만 했다.

아들이 어딜 가서도 주눅 든 모습을 본 일이 없고, 드물게 심한 꾸중을 하더라도 한나절 지나면 쌩쌩해져서 대들던 아들이 비무 한 번에 며칠이고 기가 죽어 있다니.

“비무에 진 것이 그리 마음 쓰이느냐?”

“그게…….”

아버지의 악명은 오해일 뿐이라고 해명하고 싶었던 것인데 그 애에게는 자신과 달리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지하고 죄책감이 든 데다가, 어른들 몰래 한 두 번째 비무는 그의 마음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

거기다 두 번째 비무에서 단목련은 그를 거의 가지고 놀았다.

마치 부친 금적걸이 그에게 한 수 가르쳐 줄 때와 같았다. 그가 약한 부분을 두 번, 세 번, 네 번 귀신같이 파고들면서 후려 패고 땅바닥을 구르게 만들었으니…….

그 와중에 자신이 못해서 졌다는 내용으로 가득한 장문의 글을 받아 와야 했고, 돌아와서는 엉뚱한 사고를 친 것에 대하여─갑자기 단목세가와 비무를 벌였으니!─ 어머니 송영랑에게 꾸중까지 한가득 들었다.

당연히 금종하는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다.

하지만 금적걸은 아들의 표정에도 개의치 않고 종이 뭉치를 펼쳤다. 차라리 금종하가 조금이라도 어릴 때 이런 일이 벌어진 게 더 낫다고 생각하며.

단목련이 이번 해에 들어서야 겨우 여덟 살이 되었다더니 힘 조절이 미숙한 느낌이 역력하긴 했지만 의외로 정갈한 필체였다. 나이가 차거든 명필이라고 이름을 날릴 미래가 보인다 싶었다.

“흠…….”

대부분은 자신이 어떻게 금종하의 비무를 상대했는지 써 둔 것인데, 거기에 단목세가의 검법 얘기는 거의 없었고 금가장의 도법을 꿰뚫어 본 방법만 정리되어 있었다.

“크흠.”

금적걸은 미간을 모았다.

아들의 즐겁지 않은 표정이 이해가 될 것 같았다.

글은 어렵지 않은 단어로만 쓰여 있어─아마 천자문 범위 안인 것 같았다─ 쉼 없이 쭉쭉 읽혔는데 기묘하게 가슴을 탁탁 건드리고 가는 단어가 많았다.

“……아버지?”

금적걸이 종이를 세 번쯤 다시 읽는 동안 그의 눈치를 살피던 금종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허어어.”

“아버지? 왜 그러세요?”

금적걸은 오소소 소름이 돋은 팔뚝을 손끝으로 쓸었다. 그 바람에 종이가 바스락거리자 금적걸은 화들짝 놀라서 숨도 참았다가 겨우 내쉬었다.

사람이 단점을 지적받으면 기분이 상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이렇게 하늘 위에서 아래를 굽어보는 듯이 샅샅이 꿰뚫어 본 것을 보면 등골이 선득해지는 게 먼저였다.

지금 금적걸이 느끼는 감정이 그랬다. 금가장의 도법이 가진 색깔을 지우지 않으면서 더욱 크게 피워 낼 수 있는 길을 섬세하게 제시해 주는, 일견 다정하게까지 느껴지는 글이었다.

이 서신은 마치 금가장에 있지도 않은 우화등선한 선조가 나타나 금종하를 위해 하나부터 열까지 길을 안배해 주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어쩌면 금적걸 자신까지도.

‘제 아비 생전에 무슨 말이라도 들었던 건가?’

금적걸은 그렇게 생각했다가 시기가 맞지 않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때 단목련은 두 살이나 됐을 때니까. 그럼 단목현성이 문서라도 남긴 걸까. 그걸 외워서 쓴 것일까?

잠시 복잡한 생각이 머릿속을 파고들었지만, 글자들을 읽어 내려가는 순간 잡생각은 다시 흩어지고 몰입하게 되었다.

* * *

금적걸의 깨달음 1

금종하의 배움 2

현재 행운 수치 : 21/100 (3▲)

* * *

금가장과의 비무가 끝나고 이튿날, 태허진인과 엽운이 나란히 월영재 앞에 섰다. 이제 이들도 항주를 떠날 때였다.

“장강을 타고서 예까지 왔으니, 이제 운하를 타고서 위도 한번 훑어본 뒤에 곤륜산으로 돌아갈까 합니다.”

“좀 더 있다 가시지…….”

련이 자못 서운해하며 하는 말에 태허진인이 껄껄 웃으며 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옛말에 손님과 생선은 사흘도 길다 했거늘 너무 오래 있었지. 그리고 저 위로 여기저기 들렀다 곤륜산까지 가려면 몹시 바쁘단다.”

항주에서 곤륜산까지는 만 리 가까이 떨어져 있으니 걸음이 바쁠 만도 했다. 련은 내심 아쉬워했다.

살면서 자신이 거기까지 갈 일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사실 태허진인이 여기까지 찾아온 것부터가 정말 놀라운 일이기도 했다.

엽운 역시 아쉬움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좀 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요…….”

련을 바라보는 눈에서 미련이 뚝뚝 떨어졌다.

단목세가에 도착한 이후로, 엽운은 몇 년은 걸릴 성취를 한 번에 해낸 참이었다.

당과를 양껏 먹어도 이만치 달콤하지는 않을 것이고, 소를 한 마리 잡아다 전부 먹어 치워도 이만큼 배부르진 않을 터였다.

“정작 소저에게 아무 도움을 못 드린 것 같아서 죄송스럽습니다.”

“엄청 도움이 됐는걸요? 엽운 도사님이 오기 전까지 저는 단목세가의 검법밖에 본 적이 없었잖아요. 엽운 도사님이 아니었으면 금가장과의 비무도 준비하기 힘들었을 거예요.”

“그 준비는 사실 거의…… 으음.”

거의 안 했지 않았나?

청련수만 주야장천 만드느라. 하지만 눈치 있는 도사답게 엽운은 말끝을 흐렸다. 련도 얼른 화제를 돌렸다.

“이거 선물로 드릴게요. 진청련수예요.”

제법 큰 단지였다.

“예? 이 귀한 걸…….”

엽운도 당황하고, 태허진인도 놀라서 거절하려고 하는데 단목천기가 그런 태허진인의 손을 잡아 눌렀다.

“아이의 마음이니 받아주게.”

“그래도요.”

태허진인은 사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것이 진통 효과와 더불어 문사들이 학업에 집중하게 해주는 약이라는 걸 바람결에 들어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직접 사용하기에도 마땅찮은 고가의 물건이니, 돈을 주기가 저어되어 이걸 팔아서 여행길에 보태라는 뜻일 텐데…….

“이걸 관자놀이에 조금씩 바르고 매일 조석으로 운기조식을 해보세요.”

그때 련이 그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이 말을 덧붙이며 엽운의 품에 단지를 안겨주었다.

“예? 운기조식이요?”

“도움이 될 거예요. 이제 우리 세가에도 새로 제자를 받으면 다들 쓰게 할 거고요.”

엽운이 흘끗 태허진인을 쳐다보았다. 단목련은 허튼소리를 하거나 자신을 과시하는 법이 없는데, 이 소녀가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으면 그건 정말이란 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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