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47화
태허진인 역시 그 사실을 간파했는지 작게 헛기침했다.
“그, 그럼…… 고맙게 받으마.”
단목련과 엽운이 서로 아쉬워하는 사이에, 그 단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단목천기 역시 어렵사리 눈길을 돌렸다.
‘저걸 바르고 운기조식을 하면 도움이 될 거라고?’
내공이라도 늘어난단 이야기인가?
순간 얼마 전 견언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 청련수를 마셨더니 내공이 일 갑자나 늘었다는 얘길 들었다고 하면 온 세상 무림인들이 다 달려들지 않겠습니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달려가서 자신부터 청련수를 쓰고 운기조식을 해 보고픈 단목천기였으나, 애써 자세를 바로 하고는 태허진인과 작별 인사를 이어갔다.
“그래, 남직례까지 간다고? 남궁세가에도 들르려 하나?”
“예. 남직례 양주가 바로 이 위이니 왔을 때 찾아가지 않으면 경해가 곤륜산에 비둘기 떼를 보낼지도 모릅니다.”
태허진인은 그렇게 말하곤 몸을 살짝 떨었다. 남궁세가의 소가주인 남궁경해는 침착하고 냉정하여 달리 철혈검이라는 별호까지 가진 남자였지만, 친인들에게는 종종 깊게 잠재워 둔 혈기를 선보이곤 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목도하면 만 리나 떨어져 있는 곤륜산에 전서구를 수십 마리 보낸다거나 하는 식으로.
“남궁세가에서 련이 금가장 꼬맹이를 업어 쳤다는 얘길 들으면 옳다구나 한번 붙어 보자 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태허진인은 말끝을 흐렸다. 소가주 남궁경해에게도 아들이 둘 있다.
그들 역시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출중한 재능과 집약된 세가의 힘을 바탕으로 어려서부터 그 천재성을 뽐내는 중이었고, 태허진인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아이들과 련의 비무. 겉으로 보이는 조건만 따지면 련의 패배가 당연하겠으나.
태허진인은 눈치를 보는 듯한 미소를 그리며 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있지, 련아야. 너무 심하게는 하지 말거라.”
“네?”
“허튼소리 말고 갈 거라면 해가 다 뜨기 전에 가시게. 마차를 준비해 두었으니 타고 가면 될 것이야.”
“아니, 도사한테 무슨 마차를 준비해 주십니까.”
“그래. 네가 도사지 근두운 타고 다니는 신선이더냐? 말로 할 때 타고 가거라.”
“제가 허공답보도 못한다고 이리 괄시를 하시다니.”
태허진인은 그리 툴툴거리고는, 소맷자락에 손을 쑥 집어넣어 뭔가를 꺼냈다. 련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웬 옥이냐? 그것도 그렇게 커다란.”
조금 놀라기는 단목천기도 마찬가지였다.
태허진인의 손에는 어른의 주먹보다 조금 더 큼직한 옥 한 덩이가 들려 있었다. 그가 우쭐거리는 표정으로 말했다.
“곤륜파 나오는 길에 주워 왔습니다. 새하얀 색인데 군데군데 초록 물이 들어서 꼭 쌓인 눈 틈새로 이끼가 고개를 내민 듯이 청아한 맛이 있지 않습니까? 곤륜산 치들은 다들 투박하고 거칠어 아름답게 다듬을 줄 모르고 적당히 둥글게만 다듬은 것입니다만.”
태허진인은 그렇게 말하곤 씩 웃으며 련의 손에 덥석 그 옥을 쥐여 주었다.
“항주에는 이름난 장인들도 많으니 그들에게 맡겨서 예쁜 팔찌로 만들어 끼거라.”
그러나 련의 귀에는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곤륜산 정기를 머금은 옥 : 영력 용적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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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도 아니고 5도 아니고 10도 아니고 무려 21!
“괜히 청련수를 준다고 해서 내놓는 거 아니냐? 그런 거면 필요 없다.”
“처음부터 련아 주려고 했던 겁니다.”
“그래도 어찌 이런 큰 물건을…….”
“제가 그래도 장문인의 사형인데 옥 한 덩이도 맘대로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태허진인은 그렇게 말하곤 련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었다.
“알았지, 련아야? 꼭 예쁘게 다듬어 쓰거라. 다음번에 만날 때는 옥팔찌를 하고 오련.”
“이…… 이대로 그냥 쓰면 안 되나요?”
태허진인은 련의 말을 듣고 잠깐 멍했다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당연히 안 되지. 아까워하지 말고 예쁘게 깎아 쓰려무나.”
“아니 정말로…….”
련의 진심은 태허진인에게까지 닿지 않았다. 태허진인 옆에 서 있던 엽운이 수줍게 미소 지으며 련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간 많이 배우고 갑니다, 련 소저.”
련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자신도 엽운에게 많이 배웠지만, 엽운과 태허진인이 알아서들 깨달음을 얻고 알아서 행운 수치를 쌓아 주어 얼마나 고마웠던가?
태허진인이 껄껄 웃음을 터뜨리며 엽운의 머리를 격렬하게 쓰다듬었다.
“언젠가 인연이 되면 또 봅시다.”
두 사람은 세가의 식구들에게 차례대로 인사를 하고는, 마지막으로 련의 뒤편에 조용히 선 화륜을 쳐다보며 살짝 미간을 모은 채 고개를 몇 번 갸웃하다가 다시 단목천기를 향해 포권하고는 세가를 떠났다.
* * *
“일단 추가 급료부터 지급하고.”
“정말…… 그러시겠습니까?”
재경각주 설관희는 다소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재차 물었다. 두 번쯤 확인을 받은 사안인데도.
“응. 오늘 만송상단에서 정산 온 거 봤잖아. 나 부자 됐던데. 진짜 많이 부자.”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걸 보면 아직 어린애 같으면서도 결정하는 것을 보면 아이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니까요. 그게…… 그게 다 아기씨 돈이죠.”
“세가에서 번 돈이지.”
“아니죠. 청련수가 다 아기씨께서 만드신 건데요.”
설관희는 살다 살다 자신이 이런 말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작은 소녀는 의자 아래에 닿지도 않는 발을 달랑거리며 붓을 멈추지 않고 적어나갔다.
두 사람이 이미 한 차례 짜놓은 지출 계획을 점검하는 중이었다.
그런 련을 보는 설관희의 표정에는 극진한 면이 있었다.
세가 살림을 관리하는 처지에 돈을 벌어오는 사람이라면 그게 개라도 엎드려 절할 수 있는데, 가문의 장손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내가 단목세가의 장손이라서 만송상단 대장궤와 바로 연이 닿았고, 그래서 이번 향시에 장원 급제하신 위학 숙부 손을 빌려서 이만큼 판 거지. 단목세가 사람이 아니었으면 벌써 이만큼이나 벌진 못했을 거야.”
“그거야 시간문제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나중에 번 건 내가 알아서 다 먹을게. 그때 딴소리하기 없기.”
“아니…….”
“어려운 시기를 함께 버티다가 드디어 볕을 봤는데, 나 혼자 번 거니까 우리 집부터 고치겠다고 하면 난 엄청 서운할 것 같아.”
“그…….”
혀가 부러지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아랫사람이 서운해하는 것을 신경 쓰는 사람은 본 일이 없어서 더욱 당황스러웠다.
“고생했으면 보상이 있어야지. 천지신명이 보상을 안 해주겠다고 하면 내가 해 주려고.”
련은 그렇게 말하고는 뒤편에 쌓여 있는 궤짝의 뚜껑을 열었다.
그 순간 구름이 걷히며 햇볕이 들어 그 안에 가득 담긴 은괴의 빛을 반사했다.
순간 재경각주는 숨을 멈췄다. 빛을 받은 련의 모습이 정말 어린아이의 모습을 빌어 나타난 천지신명 같았다.
설관희가 속으로 빠르게 읊조렸다.
‘원시천존이시여, 옥황상제시여, 구천현녀시여…….’
“이거 한 궤짝이면 다 되는 건데 너무 걱정하지 마.”
“아…… 네, 넵. 넵! 말씀……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수련생들을 위한 숙소와 훈련장 보수하고. 약당 증축은 좀 빨리해야 할 것 같아.”
“사실 그걸 제일 먼저 하고 싶었습니다.”
세가에서 가장 큰돈을 벌어오는 곳이 약당이 되었으니, 재경각주 마음만 같아서는 약당에 금이라도 발라주고 싶었다.
“약당 인원도 좀 늘릴까 하는데.”
“그렇지요. 아무래도 혼자서 다 하시기는 어려울 테니까요.”
“그다음에는 하인들 숙소 보수하고…… 혹시 공사에 원하는 방향이 있으면 반영할 수 있게 의견을 좀 모아서. 알았지?”
“그렇게까지요?”
‘태상노군, 동방삭, 서왕모시여…….’
“그 사람들 전부, 내가 여기서 산 시간의 네다섯 배쯤 살지 않았어? 열 배 산 사람도 있는 것 같던데…… 그럼 거의 자기 집이잖아.”
그 얘기에서 설관희는 련의 나이를 재차 깨달았다. 열 살도 안 된 작은 어린애라는 사실을.
“그냥 어디로도 갈 용기가 없어서 계속 남아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련은 슬쩍 웃었다.
“그래서 다행이잖아.”
* * *
련이 설 각주와의 이야기를 마치고 재경각을 빠져나왔을 때였다.
멀리서 위지청이 달려왔다. 련에게 전할 소식이 있어서였다.
“련아야, 련아야! 얘기 들었니? 네 고모님이 항주로 돌아오신단다!”
련은 잠깐 멍한 상태로 고모가 누군지를 되짚어 보았다. 잠시 동안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아서였다.
‘단목현요!’
단목현성의 동생이자 단목현우의 누나로, 오라비와 같은 압도적인 무재가 있지는 않았지만 의욕은 충만했던 사람이라는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래서 단목현성이 죽고 금가장이 치고 올라오면서 단목세가의 입지가 흔들린다 싶으니 곧장 가주 대행을 달고 무림맹이 있는 하남성으로 달려가서 어떻게든 세가를 되살려 보려고 애썼던 것이다.
‘차라리 계속 가문에 남아 있는 게 더 나았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었는데…….’
지난 생에 단목현요는 계속 하남성에 있으면서 세가의 일은 대부분 단목현우에게 맡기려고 했다. 하지만 무엇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단목현우는 우울과 심마에 집어삼켜진 채였고, 단목현요가 하남성까지 가서 무림의 실세들과 연결고리를 만들어 보려고 한 일들은 모두 흐지부지되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