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49화
“그래서…… 그렇다고…… 결과가 정해져 있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잖아요, 아버지!”
“내실을 다지는 것이 우선이란 얘기를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느냐?”
우리가 뭐가 부족해서요, 단목현요는 그렇게 외치고 싶었지만 부친의 엄한 눈빛 앞에 결국 고개를 수그렸다.
“……새로이 제자를 받을 예정이다.”
그 말에 여태 분한 얼굴로 고개를 수그렸던 단목현요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녀의 눈이 곧장 돌변하여 기대로 반짝반짝 빛났다.
“한동안 제자는 안 받는다고 하셨잖아요?”
“상황이 바뀌었으니까. 이제 방계에 청간을 보내고 준비를 해야겠지. 그걸 네가 할 수 있겠느냐?”
“당연하죠!”
얼굴이 환해진 단목현요가 외쳤다. 단목천기가 혀를 찼지만 단목현요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의욕적으로 몸을 일으켰다가, 문득 떠오른 게 있어서 도로 주저앉았다.
“볼일 끝났으면 나가거라!”
“여쭤볼 게 하나 더 있어서요.”
“또 쓸데없는 거나 물어보려 그러는 게지.”
“쓸 데 있지요. 절강성에 소문이 다 퍼졌던데요. 아버지가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고…….”
그 얘기가 정말이냐고 묻는 딸을 보며 단목천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걸 이제야 물어?”
“정말…… 정말이에요?”
“보면 모르겠느냐?”
“봐서 알 정도면 제가 사신단 단주를 하죠!”
“자기 그릇은 어찌 저리 잘 알꼬.”
단목천기의 말에도 단목현요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했다.
“진짜 깨달음을 얻으신 거예요? 아버지께서 다시, 다시 천하제일인……!”
“그 이름은 무림 맹주에게 주었으니 놔두거라. 내게 힘이 있으면 허명이야 갈대에 이는 바람 같은 것.”
단목현요가 제 입까지 틀어막았다.
“아버지! 설마 예전보다 더 강해지신 거예요? 설마, 혹시, 부상도?”
“저 철없는 것 데리고 사느라 자네가 노고가 크다.”
“아, 아닙니다. 아버님.”
석반안이 얼른 고개를 내저으며 빙긋이 미소지었지만, 부친의 엉뚱한 힐난에서 도리어 긍정을 읽어 낸 단목현요는 자신의 마음을 숨김없이 기뻐했다.
“금가장에 다시 가요, 아버지.”
“……뭐라는 거냐?”
“다시 가서 그 자식들을 그대로 다 깨부수고 이 항주의 주인이 누구인지 두 눈에 똑똑히…….”
반쯤 흥분해서 아무렇게나 말하던 단목현요는 부친의 형형한 눈빛을 받고 도로 주저앉긴 했지만 그 얼굴에 서린 빛이 꺼지지는 않았다.
“부인…… 그래도 아버님 앞인데 조금만…….”
“상공께서 그 자식들 면상을 여태 못 봐서 그래요. 진작 다 조져 놨어야 했는데.”
“그 일은 잘 끝났으니 두 번 다시 꺼내지 말거라!”
“아버지이이.”
* * *
오랜만에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 단목현요는 단목천기와 만나서 무슨 얘길 했는지 안색이 좋아 보였다. 련은 구석에서 부채를 살살 흔들었다.
‘흐음.’
단목현요
특성 : 작약과 같은 / 사랑으로 보듬는 / 후천적 장녀 / 자존심 강한 / 비익조
낙성십이검 : 8성
무한보 : 7성
유성진결 : 5성
자질과 오성 : 중-중(中-中)
고민 : 세가를 부흥시키는 방법, 사신단 자리를 차지할 방법, 새로운 제자를 들이는 차례와 방법, 성에게 해 줄 것들
도움말 : 어깨에 억지로 올린 것들을 내려놓으면 어떨까요?
련은 눈을 동글게 떴다. 조금 의외였다.
‘비익조…….’
이 특성은 여러 명에게서 본 적이 있다. 한 명의 배우자와 일생을 같이하는 사람에게만 붙는 특성이었다.
가문의 영달만을 위해서 결혼한 것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부부간에 신뢰가 깊은 듯했다.
‘그건 그렇고 사신단 자리는 뭐지? 아, 이맘때쯤 무림맹에서 사신단 창설하던가?’
이것 역시 단목현요가 어떻게든 단목세가에서 한자리 차지하게 하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었다.
“련아야, 비아야. 오랜만에 보는구나.”
단목현요가 조금 낯설어하는 얼굴로 남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녀의 곁에는 단목성이 도도하고 새침한 표정으로 둘을 쳐다보다가, 아버지 석반안의 손길에 떠밀려 앞으로 나섰다.
길고 매끈한 직모를 잔머리 하나 없이 높게 올려 묶은, 언뜻 보기에도 차가워 보이는 인상의 소녀였다.
단목현요가 낮게 헛기침하며 말했다.
“성아가 1월에 태어났고 련아가 2월이랬으니 별반 차이 나지 않긴 하구나. 서로 친하게 지내렴.”
단목성은 도도한 고양이 같은 눈매로 고개만 까딱했다.
“……안녕, 련아야. 안녕, 비아야.”
“련아, 비야. 성아와 함께 어울려 놀려무나.”
석반안이 부드럽게 웃으며 남매에게 노리개를 하나씩 쥐여 주었다.
그중에 련의 것은 밀화(호박 중에서도 불투명하고 노란 것)를 불수감나무 열매 형태로 다듬어 세공한 진귀한 물건이었다.
불수 형태로 세공한 밀화 : 영력 용적 9
지금 영기를 담으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크지 않은 크기의 밀화인데 영력 용적이 9나 되다니 굉장한 상등품이었다.
석반안의 본가가 풍림전장이라 거긴 잡초보다 어음 종이가 더 많겠지만, 그래도 낯선 조카에게 선뜻 줄 만큼 가벼운 물건은 아니었다.
“고모부, 이건…….”
영력을 담을 수만 있으면 눈이 뒤집히는 련이라지만 이걸 선뜻 받기는 좀 부담스럽다.
누이가 멈칫거리자 단목비도 자신의 노리개를 쥐고 주춤거렸다. 련이 물건의 값어치를 알아봤다는 사실을 눈치챈 석반안은 조금 놀란 듯했다가 눈을 접고 미소 지었다.
“성아와 함께 고른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받아 주렴.”
석반안은 거기까지 말하곤 어른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련은 말없이 서 있는 단목성을 흘끗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허리춤에도 조그만 노리개가 달랑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것과 같은 밀화 노리개였다. 빤히 쳐다보자 단목성이 고개를 홱 돌려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아이들 사이로 어색한 침묵이 조용히 흘렀다.
‘단목성…….’
련은 아주 오랜만에 보는 사촌을 가만히 들여다보듯 살펴보았다.
자존심으로 꽉 찬 도도한 눈동자, 오뚝한 콧대 같은 것이 자랐을 때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련은 이미 죽은 뒤의 미래를.
— 단목비 너는 내 동생이기도 하다는 걸 부정할 셈은 아니겠지!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에 흘러내린 피가 강산을 붉게 물들이고, 뒤에서는 혈라곡의 괴인들이 들이닥칠 때.
비에 젖은 것인지 피에 젖은 것인지 알 수 없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단목성은 한쪽 눈을 거의 뜨지 못한 채였다.
그 순간 벼락이 치고 단목성이 몸을 비틀거렸다. 놀란 단목비가 단목성을 부축하려는데, 그 틈을 노려 단목성이 단목비의 점혈을 짚었다.
그와 동시에 부릅떴던 눈은 감기고 몸이 허물어진다. 세가의 무사들이 황급히 단목비의 몸을 붙들었다. 단목성이 단호하게 외쳤다.
— 소공자를 데리고 가라. 어서!
— 하오나 아가씨…….
— 살면서 한 번도 비를 이겨 본 적이 없었는데 오늘 처음으로 이겨 봤구나. 이거면 됐다. 가거라.
그치지 않는 빗속에서 다시 창궐한 혈라곡의 무리가 도착했고, 거기서 련이 본 건 붉은색뿐이었다.
련은 생각을 멈추고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음…… 하남성에서 있다 왔다고 했지? 거긴 재미있어? 무림맹은 어때?”
단목성이 자신의 옷자락을 한번 쓸어내리고는 련과 비를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뭐 이것저것. 다 크고, 높고, 번쩍거리고 그랬어.”
“이것저것?”
“시장도, 무림맹도 커. 사람도 엄청 많아서 어떤 가게를 가도 매일 줄이 길고.”
단목성은 하남성에서 자주 오갔던 무림맹의 풍경을 간단하게 묘사해 주었다.
련은 고개를 끄덕이며 단목성의 얘기를 귀 기울여 들었다.
단목성은 처음에는 련이나 단목비와 얘기를 나누기 싫은 듯 짧게 말하려 했지만, 련이 잠자코 들으면서 추임새 한두 마디씩 넣어주자 점점 더 얘기가 길어졌다. 나중에는 뺨이 조금 상기되기까지 했다.
그렇게 잠자코 단목성의 얘기를 듣다 보니 묘하게 느껴지는 게 있었다.
‘거기서도 친구가 없었나 본데?’
하남에서 제일 크고 이름 높은 문파는 소림이고, 가장 사람이 많은 곳은 개방이다.
두 곳 다 단목성의 또래 친구가 있기 어려운 곳이긴 하다.
“그래서 거기에 엄청 맛있는 월병 가게가 있는데 한 번에 여덟 개씩 담아서 팔거든. 금방 나왔을 때가 제일 맛있으니까…….”
팔까지 벌리고 설명하던 단목성은 련과 비가 집중해서 듣는 걸 눈치채곤 말을 멈췄다.
“아니, 다음에, 그러니까…… 다음에 내가 사 줄 수도 있어. 너흰 그런 거 먹어 본 적 없을 테니까 내가 사 줄게.”
단목성은 그렇게 말을 맺고는 또 고개를 돌렸다. 할 얘기는 다 했다는 듯이.
아마 아직 어린 단목성은 련이 지금 얼마나 거액을 벌어들였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련은 앳된 모습이 남아있는 단목성이 조금 낯설었지만 티 내지 않았다.
죽어서 이 시간으로 돌아오기 전에는 단목성과 딱히 대화할 일도 잦지 않았다.
련은 단목성이 병약한 자신을 한심하게 여긴다고 생각했기에 먼저 말을 건 일도 거의 없었다.
이따금 의무처럼 병문안을 온 단목성이 요즘 바깥에서 유행하는 일들에 대해 몇 마디 해주긴 했지만 그게 의미 있는 대화로 발전하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