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50)화 (50/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50화

‘생각해 보면 그래도 꼬박꼬박 병문안을 오긴 했었네.’

단목성이 자신에게만 냉대한 건 아니었지만 따스하지도 않았기에, 단목비 역시 단목성에게는 다소 냉랭하게 굴었다. 그 탓에 사촌들 사이가 온건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도 마지막엔 비아를 지켜주려고 했지…….’

단목성 혼자서는 그들을 감당할 수 없다는 걸 그녀도 알았을 텐데.

“그런데 쟨…… 누구야?”

그때 단목성이 슬쩍 눈길을 기울였다.

련이 움찔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새하얀 고양이 백련을 쓰다듬고 있던 화륜이 눈을 깜박거렸다.

련은 단목성이 굳이 물어볼 만도 하긴 하다고 잠시 생각했다. 단목성은 화륜이 련의 하인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붉은 기가 도는 새카만 머리카락, 갸름한 얼굴에 어린데도 또렷한 이목구비하며 그들의 대화에 관심이 없어 심드렁한 눈빛인데도 그 눈동자에 서려 있는 총기 같은 것이 저 소년으로 하여금 어느 명문가의 소공자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어, 륜아는…….”

“우리 아기씨 하인이에요.”

련이 소개말을 머뭇거리는 사이에 화륜이 냉큼 대답했다. 련은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말하는 화륜의 태도만 보면 조금도 하인 같지 않았지만, 이 자리의 누구도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련은 재차 화륜의 이름을 소개했다.

“화륜이야, 우화륜.”

“저는 단목비입니다!”

옆에서 누이들의 대화에 끼고 싶어 하던 단목비가 냉큼 손을 번쩍 들고 외친 바람에 장내에 웃음이 번졌다.

그사이에 련은 슬쩍 심안을 굴려 보았다. 당장 부채를 펼쳐 볼 수는 없지만 간단한 정보는 허공에서도 어렵지 않게 읽어 낼 수 있었다.

단목성

특성 : 대나무 / 표리부동 / 앞만 바라보는

낙성십이검 : 2성

무한보 : 3성

자질과 오성 : 중-상(中-上)

고민 : 낙성십이검이 이해되지 않음, 먹다가 두고 온 당과, 세가의 앞날

도움말 : 도를 써 보면 어떨까요?

련은 마른침을 삼켰다. 특성에 어떻게 절개의 상징인 대나무와 표리부동이 같이 있을 수 있지?

‘거기다 도는 무슨 얘기야?’

자질과 오성이 ‘중-상’이면, 엄청난 재능은 아니어도 본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무림인으로 한평생 살 만했다. 거기에 제대로 된 무기까지 쥐면 더욱 그렇다.

‘전생에서도 단목성이 도를 잡았다는 얘기는 없었는데…….’

어쩐담?

이건 말을 하기도 민감한 문제였다. 단목세가에 도법이 없진 않겠지만 여긴 검이 주력인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 냅다 검 말고 도를 써 보라고 하면?

누가 들어도 다음 대 가주 자리를 견제해서 하는 말이라고 여길 것이다. 특히나 단목현요는 더욱.

련이 그렇게 고심하는 걸 보고 련이 낯을 가린다고 여긴 단목성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련이 너, 금가장네하고 비무 했다며?”

마치 못마땅한 듯 굳은 목소리여서 련이 눈동자를 굴렸다.

“어쩌다 보니까…… 네가 했어도 쉽게 이겼겠지만 말이야.”

“금가장이 그렇게 대단하지 않아서 다행이네.”

단목성이 그녀의 말을 듣다가 팔짱을 끼고서 말을 이었다.

“비무는 어떻게 했는데?”

“금가장 녀석이 이렇게 생긴 도를 썼는데…….”

여기까지 얘기하던 련은 반짝 떠오른 생각에 눈을 빛냈다.

도에 관한 얘기를 근사하게 해 주면 단목성의 관심이 이쪽으로 쏠릴지도 몰랐다.

“진짜 멋있더라고! 굉장했어. 이렇게 날렵하게 얍얍 움직였거든? 얍얍! 슉슉! 하고.”

련은 근처에서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다 손을 요리조리 움직여서 비무 당시 금종하의 움직임을 재현했다.

“흐으음.”

“이렇게 휙 휘두르니까 진짜 빠르더라고! 도는 한 번도 안 배웠는데 대단하구나! 했지.”

단목성은 성의있게 듣고서는 그 나이대 아이답지 않은 냉철한 결론을 냈다.

“너 오랫동안 아팠다더니 그래도 이런 걸 이길 정도는 되는구나. 하지만 진정한 무림인이 되기 위해서는 계속 수련해야 해.”

“아…….”

련은 당황했다. 이렇게까지 금가장의 도법에 관심이 없을 수가 있나?

“너 지금 어떤 교두한테 배우고 있어?”

“어? 나, 난…….”

련은 마른침을 삼켰다.

세가의 아이들은 다 제 부모에게 검을 배우지만, 련은 그럴 상황이 되지 못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무공을 제대로 익히지 못하셨으니까.

그러니 세가에서 검법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 다른 교두에게 배웠으리라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난 할아버지가 가르쳐 주셔서.”

“……태상가주님이?”

“으응.”

단목성은 눈을 크게 떴다가,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곤 련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사촌이 아팠다고 하니까 태상가주이신 할아버지도 신경 써 줄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자신은 항주를 떠나 하남성에 있었으니까 어쩔 수 없었다고.

“저도 할아버지한테 배울 건데요!”

나란히 말을 듣고 있던 단목비가 양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그, 그래야지. 우리 비아가 천자문부터 다 외우면.”

“다 외웠어요!”

“진짜? 언제?”

련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요즘 잠깐 동생들의 글자 공부에 소홀한 사이 단목비가 다 외운 모양이었다.

“어…… 어제요.”

단목비가 슬그머니 손을 내리며 련의 눈을 피했다. 련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방긋방긋 미소 지었다.

“정말이지? 어제 다 외운 거지? 거짓말하면 이제 용수당 못 먹는데.”

“거…… 거의 다요.”

“거의가 무슨 뜻인지 알아?”

“천 개 중에서 오백 개…….”

련이 그 말을 듣고 웃는 사이에 화륜이 덧붙였다.

“그래도 칠백 개는 된 것 같아요.”

“조금 있으면 다 외우겠다. 그치?”

잠깐 그들을 바라보고만 있던 단목성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홱 돌리는데, 단목련이 그녀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성아, 나중에 모르는 거 생기면 너한테 물어봐도 돼?”

“나한테 왜? 태상가주님께 여쭤보면 되잖아.”

목소리가 매섭고 차가워서 웬만한 아홉 살짜리는 울면서 손을 놨을 것 같다.

“태상가주님은 내가 너무 배움이 늦어서 어쩔 수 없이 도와주시는 거니까…….”

“마…… 마음대로 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내가 공부할 때 시끄럽게 하거나 방해하면 안 돼!”

“알았어, 알았어.”

련이 눈을 접고 방긋 웃었다. 단목성은 고개를 돌린 채 바쁜 일이 있다며 먼저 자리를 피했다.

뒤돌아서서 바삐 걸어가는 소녀의 목덜미가 새빨갰다.

* * *

“그 집 도법이 그렇게 괜찮았어요?”

피리 연습을 마친 뒤 향린적을 깨끗하게 정돈하고 집어넣던 련이 고개를 들었다.

화륜은 백련을 살살 쓰다듬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련은 왠지 심통이 난 것 같은 그의 기색을 알아챘다.

‘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

“아까 성아한테 금가장 얘기 한 거 말하는 거야?”

“네.”

련은 조금 민망해하며 자신의 뒤통수를 매만졌다.

“성아한테는 검보다는 도가 더 잘 맞을 것 같더라고.”

“……그래요?”

“그래서 도법에 좀 관심을 가져 봤으면 하는 마음으로 칭찬을 좀 해 본 거지. 생각대로 되진 않았지만…….”

련의 말끝이 민망함으로 흐려졌다.

“흠, 도?”

화륜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고서 눈동자를 굴리며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갑자기 남의 집 도법을 가지고 칭찬을 하고 그런 거예요?”

“제일 가까이에서 본 도법이 그거니까.”

“전혀 효과 없는 것 같던데요?”

련은 정리하던 피리로 자신의 이마를 꾹꾹 누르며 애잔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보기에도 그랬어?”

화륜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이에게 진 사람 얘기를 해 봤자 무슨 관심이 생기겠어요?”

련은 고심했다.

“어떻게 하면 성아 관심을 끌 수 있을지…….”

그러곤 말끝을 흐리며 화륜을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에휴. 우리 륜아 관심도 못 끌었는데 어떻게 이번에 처음 본 사촌 관심을 끌겠어?”

그렇게 말하면서 한숨을 푹 내쉬고 피리를 내려놓자 화륜이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얼굴로 련을 쳐다보았다.

“아니…… 누이…… 이마에 자국 났어요.”

“그게 중요해 지금?”

“이마 한가운데에 동그랗게 반지 자국처럼 났는데도요?”

련은 손을 뻗어 이마를 매만지다가 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화륜은 뒤에서 끅끅대며 웃다가, 련이 갑자기 다가오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왜, 왜 그러세요?”

“나만 당할 순 없지.”

“당하다니! 누이가 스스로 했잖아요!”

“난 내가 직접 해야 했지만 넌 내가 해 줄게. 걱정하지 마.”

“아 정말!”

련은 도망치려는 화륜을 붙잡고는 그의 이마에도 동그랗게 자국을 내 주고 나서야 놓아주었다.

련이 큰 소리로 웃자 화륜이 허탈한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리곤 덧없이 자신의 이마만 매만지다가 돌연 말했다.

“안 배워.”

“뭐라고?”

“무공 안 배울 거예요!”

화륜이 외치고 몸을 홱 돌렸다. 련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배시시 웃고는 얼른 화륜 앞으로 달려갔다.

“너 무공 배우려고?”

지금 안 배운다고 심통을 부리는 게 무슨 뜻이겠는가?

배우려는 마음을 먹었다는 뜻이었다.

“대체 무슨 얘길 듣는 거예요? 방금 안 배울 거라고 말했는데.”

“와! 륜아야! 언제부터 배우게? 조금 있으면 비아도 배우기 시작하니까 그때 같이 배우려고? 그래, 그게 좋겠다! 같이 배우면 재밌을 거야.”

련 혼자서 북도 치고 장구도 치고 있으려니 화륜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