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52화
“물론 태상가주께서 그러자 하셨지만 그래도…….”
단목천기가 세가 안에서 태상가주라 불리는 건, 청년 단목현성이 곧 가주가 될 거라는 사실을 모두가 기쁘게 여겼다는 증거였다.
그렇게 한번 태상가주가 된 단목천기는 아들을 잃고도 다시 가주로 불리려 하지 않았다.
그 단목현성에 대자면 누군들 그 재능이 부족하지 않을 것이며, 하면 그 부족한 재능을 어디서 끌고 오겠는가.
가지지 못한 걸 꾸며 내려면 속을 헐어 내는 수밖에 없다.
지난 생의 단목성이 한 것이 딱 그 짝이었다. 련은 그 모습을 다시 보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보다 숙부.”
“으응?”
“바깥에 약초방 구경 가기로 했잖아요. 그건 언제 가요?”
“그건 진작 가려고 했는데, 네가 그 금종하를 쥐어박느라 앓아누운 바람에 미루어졌지 않으냐.”
“저 다 나았다고 했잖아요.”
“정말 다 나았는지 볼까?”
단목현우는 그렇게 말하곤 련을 양팔로 번쩍 들어 올려 무게를 가늠했다.
련의 품에 있던 하얀 고양이가 가르릉거리며 폴짝 뛰어올랐다.
“으음. 좀 묵직해졌나?”
“끄으응…….”
련이 손발에 힘을 주고 무게를 실어 보려 애쓰는 걸 보고 단목현우가 크게 소리를 내 웃었다.
“가자, 가자! 내당주님께 얼른 허락을 맡고 가자꾸나.”
단목현우는 련에게 호쾌하게 말했던 것에 반해, 내당의 당주 위지청과 마주했을 때 몹시 딱딱하게 굳어 긴장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 련아를 데리고 밖에요?”
“그 요 앞에, 네…… 네.”
사적으로는 가족이고 공적으로도 내당주와 약당주로 같은 직급이지만 단목현우는 좀처럼 그녀 앞에서 당당한 태도를 보이지 못했다.
아무도 그를 탓하지 않고 실제로 그의 잘못도 아닌데도, 단목현우는 련이 갓 태어났을 때 있었던 일을 마음에 담고 있었다.
그때 련이 입었던 상처는 흉조차 남지 않았는데도, 오히려 마음에 흉이 남은 것은 그였는데도.
“호위 인원은 충분히 데려가고, 또 동선은 외부에 알리지 않은 채…….”
“잘 부탁드릴게요.”
단목현우가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을 끊어 낸 위지청이 부드럽게 웃었다.
“성아도 있으니 함께 나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련아만 데려가면 서운해하지 않겠어요?”
“안 그래도 련아가 똑같은 얘기를 하더라고요!”
얼굴이 확 환해진 단목현우가 련의 배려심 넘치는 마음과 자신이 얼마나 공평하게 조카를 사랑하는지에 대해 조잘거렸다.
련이 글자를 깨우치는 속도가 정말 굉장했고 최근에는 멋진 시도 지었다, 거기에서 따와 화륜의 성도 붙여 주었으며 피리를 부는 솜씨도 남다르다, 못하는 게 없는 것 같다…….
“이러다 련아더러 구천현녀의 현신이라고 하시겠습니다.”
“헉. 그런 것일지도…….”
단목현우가 진지하게 응하려고 하는 걸 보고서 위지청이 얼른 손을 내저으며 그를 밖으로 떠밀었다.
“오늘은 외당주와 함께 새 제자를 어떻게 받을 것인지 하루 종일 논의할 것 같으니, 약당주께서는 우리 세가의 미래들을 잘 맡아 주세요.”
단목현우는 활짝 웃었다. 그러다가 ‘저만 믿으십시오!’라고 말하려고 하다가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한 채 조심히 다녀오겠다고 말끝을 어물거렸다.
위지청이 그런 단목현우의 뒷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단목현우가 련과 성을 데리고 외출한다는 얘기를 했을 때, 단목현요는 크게 개의치 않고 그러라 했다.
하지만 안뜰에 나란히 선 단목성과 단목련을 보자마자 도끼눈을 뜨고서 위지청과 단목현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곤 크게 한숨을 쉬고, 입술을 꽉 깨문 채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련아가 조금 춥지 않겠어요? 요 며칠 새벽에 서리도 앉았다는데.”
“오늘은 날도 그렇게 춥지 않고요, 충분히 따뜻하게 입혔는걸요? 련아보다는 성아가 더…….”
“아니, 아니, 아니!”
단목현요는 거의 비명을 지르고 싶다는 표정으로 황급하게 위지청의 말을 잘랐다. 그러곤 크게 인내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하남에서 내려올 때 가져온 새 피풍의가 있어요. 성아가 옷이 많아서 아직 열어 보지도 않은 옷인데, 련아에게 딱 알맞을 것 같아서요.”
련과 성은 키 차이가 제법 나서 결코 옷이 맞을 리가 없는데도 단목현요는 강경하게 말했다.
“그런 걸 받아도 될지…….”
“당연히 되죠! 련아야, 고모 따라오련.”
단목현요는 위지청이 사양할 것처럼 굴자 거의 련을 끌어안다시피 하여 처소로 데려갔다.
그리고 련은 그녀의 처소에서 원래 입고 있었던 거의 모든 옷을 갈아입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걸쳐 입은 것은 은빛 광택이 도는 흰 실로 자수를 놓은 피풍의였는데, 련에게는 조금 큰 것을 단목현요가 끈으로 이리저리 여미어 조금 큰 옷을 딱 맞게 만들었다.
련은 거울을 보고 스스로 좀 놀랐다. 간소하고 소박했던 차림새에서 완전한 귀공녀가 되어 있었다.
그사이에 단목현요는 남동생과 씨근거렸다.
“련아를 아까처럼 입혀서 내보내려고 했어? 내가 안 나와 봤으면 어쩔 뻔했냐고!”
나직한 목소리로 윽박지르는 말에 단목현우가 머쓱하니 머리를 쓸었다.
“뭘 또 그렇게까지…….”
“남들이 뭐라고 하겠니? 내가 하남성에서 지내다 오더니 같은 식솔은 안 챙기고 제 딸만 귀하게 입히고 키운다고 욕할 거 아니야!”
“누가 욕을 한다고 그래요. 그리고 련아도 단정하고 예쁘게 입었잖아요. 성아가 좀…… 누이가 화려하게 입혀 놓은 것뿐이지.”
“그 격차가 문제라고 말하는 거잖아!”
세가 건물 안에서라면야 서로 어떻게 입고 있든 상관없겠지만, 두 소녀가 나란히 외출을 하는데 한 명은 고급 자수를 놓은 비단옷을 입고 한 명은 그저 단정할 뿐인 무명옷을 입고 있으면 거리의 누구나 쑥덕거리지 않겠는가!
“그리고 련아 혼자 외출할 때도 마찬가지야. 그…… 하…… 그런 단정한 옷만 걸치고 나가는 건 절대, 절대,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단정한’이라고 말한 것은 단목현요의 인내심을 마지막까지 끌어모은 것이다.
“내당주께서는 뭘 준다고 다 받지도 않으실 테고, 너한테 련아한테 맞는 옷가지를 맡겨 놓을 테니 네가 신경을 써서…….”
거기까지 말하던 단목현요는 그제야 남동생의 차림을 눈치채곤 또 눈으로 비명을 지른 다음에, 남동생을 끌고 가 남편의 옷 중에서 치수가 맞는 것으로 골라 입힌 뒤에야 그들을 내보내 주었다.
그러곤 멀어지는 세 사람을 바라보며 이마를 짚고 탄식했다.
“이 망할 집구석.”
단목성은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사실 하남성에서 지낼 땐 그렇게까지 재미있지 않았다.
양친은 항상 바빴고, 그녀가 어울려 놀 만한 사람은 없었다.
‘흥. 그런 유치한 애들하고 어울려 놀 수는 없지.’
매번 형제자매의 손을 꼭 잡고 돌아다녀야 하는 어린애들하고 뭘 하고 지낸단 말인가?
그들이 옷이나 장신구를 나란히 맞춰서 입고 노는 모습을 볼 때면 단목성은 남몰래 고개를 홱 돌리곤 했다.
서로 어울리지도 않는 색을 같은 모양새로 억지로 맞춰 입은 꼴이라니!
그래서 항주로 돌아올 때, 단목성은 자신이 그 사촌을 지키기 위해 금가장의 후계자와 싸워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부담감만큼이나 혹시 깨어난 그 사촌이 옷을 맞춰 입자고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몹시 컸다.
자신과 나이가 같다곤 해도 한 달은 늦게 태어난 데다가 아프다 일어났으니 엄밀히 따지면 한 살이라고 해야 할 텐데.
한 살 아기라고 생각하면 유치한 것도 좋아할 법했다.
하지만 막상 자신의 옷을 걸치고 있는 단목련을 보자 썩 나쁘지 않았다.
둘의 생김새가 닮진 않았어도 예쁘장한 얼굴에 화사한 옷이 잘 어울려 봐줄 만했다.
‘그래도 뭐, 단목련이 장신구 맞추고 싶다고 하면 하나 정도는 사 줄 수도 있고…….’
“호선의각 약초당부터 가고 싶어요.”
그래서 그 단목련이 약초당 얘길 했을 때 단목성은 터져 나오는 탄식부터 꾹 삼켜야 했다.
련이 약초당에 관심이 있어서 그쪽을 보러 가는 거라고 말을 듣긴 했지만 정말일 줄은 몰랐다. 약당주인 단목현우를 이끌고 나오려는 핑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약초당에 가서 쓴 냄새 배면 어떡하지?’
단목성은 자신의 옷을 흘낏 내려다보았지만 그래도 단목련의 요구를 묵살하진 않았다.
“흠, 호선의각의 약초당?”
“네. 우리 세가가 거기서 약초를 받아 온다고 했잖아요.”
단목성은 련이 사람에 따라서 미묘하게 다르게 말한다는 걸 알아챘다.
자신에게 얘기할 때는 느릿느릿한 편이다. 단목현우와 대화할 때는 목소리가 좀 더 낮고 약간 더 빠르다.
남동생인 단목비를 상대할 땐 높은 목소리에 한껏 웃는 얼굴이고, 그 하인이라는 화륜과 대화할 땐…….
“성아도 괜찮겠어? 거기 잠깐 들러도?”
단목성은 그다지 재미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촌은 몸이 약해서 일어난 뒤 세가 밖으로 나가 본 적도 없었으니까 바깥의 모든 것이 신기할 것이다. 하남성에서 내키면 시장 구경을 갔던 자신과는 다르게.
“뭐…… 괜찮아요.”
단목성은 그렇게 말하면서 슬쩍 옆을 내려다보았다.
사촌은 햇볕이라곤 한 번도 못 본 듯이 새하얀 얼굴 위로 큰 눈을 깜박거리며 자신을 돌아보고 방긋 미소 짓고 있었다.
‘혼자 놔두면 안 되겠다.’
단목성은 말간 그 얼굴을 보면서 진지하게 생각했다.
하얀 솜털 뭉치가 시장통에 들어가면 감쪽같이 사라지고 마는 것처럼, 단목련도 혼자 두면 불어온 바람에 날아가거나 누군가 채갈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