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53화
“성아야, 약초당 갔다 오면 빙당호로 사 먹자. 내가 사 줄게.”
천진한 별 무리가 일렁거리는 단목련의 눈과 마주한 단목성은 한숨을 꾹 삼켰다.
“너 돈은 있어?”
단목성이 알고 있는 단목세가의 형편은 하남성에서 어머니 단목현요를 통해 들었던 것이 마지막이었다.
가문이 어렵고 힘든 상황이지만 일으켜 세워야 한다고, 어머니와 단목성 자신의 힘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했고 단목성은 그것을 자신의 가슴에 꼭꼭 새겼다.
그러니 자신이야 부유한 친가에서 용돈을 받아서 사정이 넉넉하고 예쁜 옷에 좋은 무기를 쓸 수 있지만, 이 사촌은 그렇지 않을 터였다.
단목성은 련이 허리춤을 주섬주섬 뒤적이는 걸 보고서 그 손을 잡아 누르려 했다.
그때 단목현우가 끼어들었다.
“빙당호로는 내가 만들어 주는 게 있잖아.”
단목현우가 끼어들어서 슬쩍 말했다가, 어린 조카들의 숨길 수 없이 애매한 표정을 보고서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련이 조금 미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숙부 건…… 약당호로니까.”
“아.”
* * *
련은 호선의각의 약초당에 방문하기로 작정하면서 이미 많은 마음의 준비를 했다.
몰락한 세가에서 분리해 나간 의각 사람들이 세가 사람들과 다시 마주했을 때 어떻게 반응할지.
“아니, 도련님! 아이고, 폐관 수련 마치셨다더니! 언제 이리 훤칠해지셨답니까.”
그러나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환대에 단목현우도 조금 놀라고 련 역시 얼떨떨하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머리에 두건을 감은 약초당 사람이 반쯤 뛰듯이 달려와서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그들을 맞이했다.
“아, 아니…… 종 의원. 오랜만…….”
“그라믄요, 5년? 6년만 아닙니까. 세상에. 고 조막만 하던 도련님이 이리 훤칠해지셨다니.”
“미, 민망하게 그만해. 그리고 그때도 그렇게 작진 않았어…….”
“그쵸, 그쵸. 그랬죠. 그래서 제가 한눈에 알아봤지 않습니까.”
종 의원은 단목현우를 붙잡고 한참을 반가워하다가, 뒤늦게 소녀들을 발견하곤 또 화들짝 놀라 했다.
“아이고, 이쪽 아기씨들은…… 성아 아기씨입니까? 현요 아가씨하고 쏙 빼닮으셨습니다. 그럼 이분이…….”
종 의원은 단목성을 알아보았다. 보통 첫째 딸들은 아버지를 닮는다던데, 단목세가의 손녀들은 제 어머니들을 쏙 빼닮았다.
항주에서도 아름답기로 이름 높았던 단목현요를 그대로 닮은 단목성을 알아보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종 의원의 눈길이 단목성 곁의 조금 더 작은 소녀에게로 향했다. 단목성이 화려하다면 이쪽은 좀 더 차분했다. 다만 눈동자의 반짝임이 눈에 띄었다.
“이쪽은 우리 형님의 첫째인 단목련이네. 자네는 처음 보겠군…….”
단목현우는 말끝을 흐렸다. 한때는 세가 소속이었던 의원이 직계인 련의 얼굴조차 본 적 없는 건 그간 련이 바깥을 돌아다닐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종 의원은 눈치가 있었다. 아니, 눈치 있는 것 이상으로 더 많은 걸 알고 있었다.
“혹시 그 청련수…….”
소문대로 단목련이 그 청련수를 혼자서 만들었다고 완전히 신뢰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섣불리 의심하는 것도 아닌 조심스런 눈빛이었다.
워낙 별별 기이한 일이 일어나곤 하는 강호인 데다가 기가 막힌 천재성이라면 그 역시 세가에 있을 시절 본 적이 있지 않던가.
바로 련의 부친인 단목현성을 통하여.
“아! 알고 있나, 종 의원?”
“아이고, 알다마다요. 저희 의각에서도 받아다 쓰고 있지요. 요즘 그 청련수로 얼마나 뜨거운지…….”
“그래?”
“만송상단의 그 방탕하다던 셋째가 그걸 쓰고 장원 급제를 했지 않습니까. 향시 결과가 붙은 날 의각이 반쯤 마비되었을 지경이었습니다.”
종 의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때 항주에서 이름 좀 있다는 가문에서는 근방의 의각과 약방을 쥐 잡듯 샅샅이 뒤지며 만송상단의 막내가 썼다는 그 ‘진청련수’를 얻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상단주 견언조가 부유한 사람들을 상대로 은밀히 따로 판매 경로를 열어 주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도 의각 바깥쪽엔 줄이 늘어서 있을 게 분명했다.
‘견위학이 북경에 가서도 급제해 버리는 건 아니겠지?’
그땐 진짜 항주의 의각 중에 몇 개는 폭발할지도 모른다.
종 의원은 아찔한 생각을 잠시 했다가 얼른 고개를 흔들어 털어 냈다.
“……한데 여기까지 어인 일이십니까, 도련님?”
“조카가 이 약초당에 꼭 오고 싶다고 해서. 세가의 약초를 여기서 받는다고 했더니 관심을 가지더라고.”
어느 쪽 조카인지는 명백했다. 단목성은 이곳이 그다지 즐겁지 않은 눈치인 것에 반해 단목련의 눈동자는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종 의원은 그간 호선의각에서 단목세가에 보낸 약초를 누가 관리했는지 빠르게 되짚었다.
‘첨 의원이었나? 이 자식, 설마 세가에 보내는 물건에 무슨 장난이라도 친 건가?’
자신을 올려다보는 소녀의 반짝이는 눈빛이 범상치 않게 느껴졌다.
처음 의각에 나타난 단목현우를 봤을 때, 종 의원은 잠깐 단목세가가 다시 호선의각의 의원들을 흡수하려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한때 후계자를 잃고 태상가주마저 부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쇠락해 간 단목세가였지만, 최근에는 부쩍 그 이름이 자주 들려왔다.
태어난 뒤로 단 한 번도 세가 밖에 모습을 비춘 적이 없는 단목세가의 적손이 만들었다는 청련수가 느리지만 분명하게 절강성에 퍼져 나갔다.
그 투명하고 상쾌한 향을 가진, 만병통치약이나 다름없는 기름 한 방울.
대단치 않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단목세가에서 제공하는 원액 한 방울이 무슨 효능이 있는지 도통 따라 할 수가 없었다.
‘요 몇 달 사이에 저 청련수로 단목세가에 흘러 들어간 돈이 얼마나 될까?’
처음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건 만송상단의 서기와 장궤들 사이에서였다.
장부를 기입하느라 손목과 손가락 관절이 남아날 일이 없는 그들이 미리 효능을 확인하고 청련수를 모조리 사들였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퍼져 나갔고, 항주의 가장 작은 의원까지 이 청련수를 갖추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와중에 이 소녀가 금가장의 후계자를 꺾기까지 했다는 얘기에 온 항주가 술렁이고 있었다.
금가장은 저물어 가는 단목세가의 자리를 치고 올라오고 있었는데 비무 이후 그 기세가 한풀 꺾이고 말았다.
전통 있는 명문가의 저력은 역시 흉내 내기 어려운 거라며 모두 수군거리고 있는 이 시점에 갑자기 호선의각에 등장한 단목현우라니.
그냥 둘러보러 온 게 아니다.
분명 뭔가가 있다!
“호선의각의 약초방은 항주 제일이지요.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호선의각의 약초방은 의각이 자체적으로 운영할 때도 이름이 높았지만, 단목세가의 의방을 흡수하면서 그들의 경험까지 더해 더욱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하지만.
“으음…….”
단목련이 발돋움을 하고 주위를 휘휘 둘러보는데 그 눈길이 다소 시무룩했다.
지루해하는 것과는 달랐다. 그건 옆에 있는 단목성이 보여 주고 있어서 분명했다.
“여기가 정말 항주에서 제일 좋은 약초방이야?”
“그…… 그러믄요.”
단목련이 차분하게 묻는 통에, 종 의원은 저도 모르게 기가 죽어 조금 더듬거리며 답했다.
하지만 이 약초방이 가장 훌륭하다는 건 그가 호선의각 소속이라서 하는 얘기는 아니었다.
이 약초방에서 항주의 약초 절반 이상을 다루면서도 동시에 새 약효를 발견하고 정제하기 위한 연구도 쉬지 않으며, 가장 질 좋은 약초를 균일하게 보급하기 위한 노력도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흐으음.”
단목련은 어린애 장난감처럼 보이는 조그만 백옥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고민하는 듯 입술을 꼭 다물고 삐죽 내밀었다.
어린아이의 심각한 표정은 무게감이 있다기보다는 귀엽고 웃음이 나올 만했는데, 종 의원은 왜인지 웃질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다가 변명처럼 둘러 말했다.
“사실 수십 년 전에야 약선문(藥仙門)이 든든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만 동정혈사 때 약선문이 사라지고 나서부터는…… 약초 수급에 큰 타격을 받고 이제야 겨우 안정이 됐습지요, 네에.”
“약선문?”
련은 처음 듣는 얘기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종 의원은 손녀에게 옛날이야기를 늘어놓는 노인네가 된 기분으로 흐뭇하게 웃으며 말을 늘어놓았다.
“서쪽에는 당문이 있고 동쪽에는 약선문이 있다, 뭐 그런 얘기들을 했지요. 그 때는 독에는 당문이고 약에는 선문이라고도 할 만큼 대단했지요.”
“그런데 없어졌어?”
“예, 하루아침에요. 원체 신선의 풍모들을 가진 이들이라 우화등선을 했다느니 그런 얘기도 하지만.”
“그 얘기는 그만 됐네.”
괜히 조카들에게 무서운 얘기를 들려주고 싶지 않았던 단목현우가 말을 끊었다.
정말 산 사람들이 신선이 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혈라곡 놈들 중 일부가 약선문을 공격하여 약선문을 궤멸시켰는데, 그 자리에 있던 혈라곡의 무인들도 모두 거기서 몰살당한 바람에 괴이쩍은 소문이 도는 것이었다.
결국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로 귀결되니 종 의원도 얼른 입을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