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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54)화 (54/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54화

련은 그들의 눈치를 살피곤 화제 전환에 응해주었다.

“그럼 오늘 약초도 조금 사 갈 수 있어?”

“그럼요. 오늘 처음으로 약초방 구경을 오셨으니 선물로 드리지요. 말씀하시면 제가 세가로 보내 드리겠…….”

“아니야. 마차 타고 왔으니까 다 실어 갈게.”

종 의원은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애가 약초 이름 아는 것이나 늘어놓고 싶어서 그러나 보다, 했던 종 의원이었다.

하지만 잠시 뒤.

종 의원은 이 소녀에게 남다른 것이 있다는 걸 직감했다.

단목련은 선반에 놓여 있는 약초와 약재들을 살펴보며 구매할 것들을 정확히 골라서 말했는데, 그것들을 모두 모아 놓고 보니 이 약초방 내에 있던 상품 중에서도 특상품들만 모인 게 아닌가. 이렇게까지 질 좋은 것들이 용케 숨겨져 있었구나 싶을 정도로.

이것들이 한 소쿠리에 모이자 그의 눈에는 마치 금괴 더미처럼 보였다.

‘어떻게 이런 것만 골라낸 거지? 우연인가?’

단목현우가 도움을 준 것 같지도 않았다. 아니, 단목현우는 사실 지금 단목련이 고른 약초의 상태나 질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고마워, 종 의원.”

“아…… 아닙, 아닙니다. 의각이 넓은데, 다른 데는 안 둘러보시고……?”

“응, 괜찮아.”

이제 돌아갈 거라고 하자 옆에서 지겨워하던 단목성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종 의원은 왜인지 안절부절못하며 약초를 포장하면서 련의 곁을 맴돌았다.

먼저 그냥 주겠다고 말을 해 버렸으니 이제 와서 이 약초들 말고 다른 걸 고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종 의원은 단목세가 일동이 돌아가고 나서 곧장 약초방을 뒤집어엎었지만, 자신이 손수 싸서 내보낸 것들만큼 괜찮은 것들이 남아 있지는 않았다.

* * *

련은 호선의각을 나선 뒤로 항주에 이름 좀 있다 하는 약초방은 다 둘러보았다.

하지만 호선의각의 약초방이 항주 제일이라는 종 의원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것만 알게 되었을 뿐이었다.

‘심안의 기준이 너무 높은 건가?’

련은 백옥 부채를 파닥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약초 선반을 쭉 훑으며 눈에 힘을 주고 심안을 발동시켰을 때 상급이라고 뜨는 건 몇 되지 않았고, 대부분은 중-하급이었다.

‘무엇보다 약초방을 좀 헤매다 보면 여청과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약여청은 련이 지난 생에 만났던 약초꾼이었다.

곳곳의 산을 자신의 손바닥 들여다보듯 잘 알았고 남들은 평생에 한번 구경도 못할 약초를 줄줄이 캐 오기도 했다.

항주의 약여청이라고 하면 약초꾼들 사이에서는 살아 있는 전설이었다.

그런 약여청이 련과 연을 맺은 건 물론 련의 몸 때문이다.

아무런 병 없이 나날이 쇠약해져 가는 련을 위해 많은 이들이 애썼다.

오래전에 약혼을 파기했던 사천당문도 몇 번이나 의원을 보냈고, 독선 당유벽이 직접 찾아온 적도 있었다.

그때 당유벽이 써 준 각종 비방에 맞는 약초를 구해 온 게 약여청이었다. 처음에는 고용 관계였지만…….

“도라지로 무얼 하려고 그렇게 모았어?”

단목현우가 한 다과방에서 빙당호로 세 개를 사서 조카 둘에게 나눠 주고 자신도 하나를 우물거리며 련에게 물었다.

단목성은 빙당호로를 살짝 깨물고는 그 새콤달콤함에 눈을 꼭 감고 맛을 즐기는 중이었다. 련은 소쿠리에 한가득 들어간 도라지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라지청을 만들어 보려고요.”

“도라지청?”

“우리 약당이 약을 만들어서 파는 데 재능이 있는 것 같아요.”

“청련수는 우리 약당이 만든 게 아니라…….”

단목현우는 어린 조카가 혼자 만들어 낸 것에 대해서 어떻게 말을 할까 하다가 빙당호로와 함께 말을 삼켰다.

‘련아는 진짜 신선이 데려갔다 돌려준 게 아닐까?’

신선이니 부처니 태상노군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믿지도 의지하지도 않는 단목현우였지만 련을 볼 때면 마음이 흔들렸다.

어쩌면 그런 걸 믿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조카의 어린 시절이 헛되이 흘러간 게 아니라고 믿고 싶어서.

“도라지청을 만들어서 할아버지랑 섬서의 화산에도 보낼까 하고요.”

화산에는 자신의 벌모세수를 도와준 외숙부가 있다. 어머니와 의남매를 맺은.

련은 그렇게 말하면서 오늘 산 도라지의 양으로 몇 명에게나 줄 수 있을지 가늠해 보았다.

사실 다른 무엇보다도 도라지의 질이 그다지 성에 차지 않는 게 제일 문제다.

그때였다.

조금 멀찍이서 호위를 서고 있던 정영이 다가왔다.

“약당주님, 아기씨. 저 안쪽에 좀 비싸긴 하지만 질 좋은 약초를 취급하는 곳이 있다고 합니다.”

“누가 그래?”

“그게…….”

정영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만송상단 사람이 아기씨를 알아보았나 봅니다. 혹시 상단에서 공급한 정유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직접 찾으시는 거냐고 묻기에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약초를 찾는 거라고 했더니 알려주었습니다.”

그때 상단 사람의 얼굴은 마치 지옥불에서 갓 빠져나온 듯이 한시름 놓은 표정이었다.

“그럼 가 보자!”

정영의 말을 들은 련의 눈이 번쩍 뜨였다. 만송상단에서도 인정할 정도의 약초당이라면, 약여청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럴까?”

정영은 가는 길을 제법 자세히 들어왔는지 막힘없이 안내해 주었다.

과연 좀 더 깊은 곳으로 가자 번듯한 약초상이 보였다. 조금 살펴보자 최근에 증축을 한 듯했다.

가게 안에는 손님들도 제법 있었다. 의원으로 보이는 사람, 웃전이 시킨 급한 비방에 들어갈 약초를 찾는 사람, 약방 하인…….

“아이구, 단목세가의 공자님과 아기씨들 아닙니까!”

련이 말린 약초 한 조각을 살짝 집어 들고 살펴볼 때 안쪽에서부터 낮지만 요란하게 환영하는 목소리와 함께 중년 남자가 튀어나왔다.

단목현우는 조카들을 등 뒤로 돌리고 남자를 흘끗 쳐다보았다.

“우리를 알고 있나?”

“아이고, 알다마다요. 그 위풍당당한 모습을 어찌 몰라보겠습니까? 그런데 예까지는 어인 일로…….”

“약초를 좀 보러 왔네.”

단목현우는 약초상이 알아본 것을 두고 기분이 조금 좋아진 것 같았지만, 호들갑 떠는 상인 앞에 조카들을 내놓지는 않았다.

련은 단목현우의 뒤에서 상인을 흘끗 살펴보았다.

‘한나절 만에 소문이라도 돌았나?’

단목현우는 세가의 약당주인데 그런 그가 약초상마다 찾아다니고 있으니 단목세가에서 기세를 되찾으며 약당을 확장하려는 생각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돈 것일지도 모른다. 만송상단 사람도 그들을 알아봤다지 않은가.

“도라지를 좀 보고 싶은데.”

“도라…… 지요?”

도라지는 그렇게까지 비싼 약초가 아니라서인지 상인은 조금 멈칫했지만 이윽고 잽싸게 소쿠리 하나를 가져왔다.

“이 도라지들은 특별히 질이 좋은 것들입니다. 저희 약초당의 모든 약초들이 그렇듯이요.”

련은 도라지를 살펴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확실히 좋긴 했다. 아마 갓 캐내었을 때는 캐낸 약초꾼도 이런 걸 발견하고 놀랐을 것 같았다.

‘호선의각 약초방에 있던 최상급 약초들과 비슷한 것 같네.’

지금까지 둘러본 약초당을 중에서는 제일 질이 좋았다. 관리가 제대로 된 건 아니어서 조금 시들긴 했지만.

다만 질이 좋은 약초는 위의 몇 개뿐이고, 슬쩍 들춰보자 아래에는 겉으로 보기에만 비슷해 보이는 그저 그런 약초들이 깔려 있었다.

약초상은 한껏 들떠서 이것저것 권하려고 했지만 련은 다 고개를 흔들고, 개중에서도 질이 좋은 것들만 몇 개 골랐다.

“아직 여청이 일할 때가 아닌가…….”

단목성은 약초당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도 없는지 금방 가게 밖으로 나섰고, 단목현우가 하인을 시켜 약초값을 치르고 포장하는 사이에 약초당의 소년 하나가 살그머니 련에게 다가왔다.

혼자서 약초당 안을 훑어보고 있던 련은 고개를 갸웃했다. 련에게 다가온 소년 사환은 무척 긴장한 눈치였다.

“저…… 혹시 여청, 약여청…… 을 찾으세요?”

속삭이는 것 같은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귀 기울이지 않으면 듣기도 힘들었다. 련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소년을 쳐다보았다.

“여청을 알아?”

“작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여기에 약초를 팔고 있어요.”

련은 가게에 있던 것들 중에서도 유난히 차이가 나게 질이 좋던 약초들을 떠올렸다.

그런데 이걸 이렇게 비밀스럽게 말해야 하나?

소년은 마치 련에게 말을 걸지 않는 것처럼 몸도 조금 돌리고서 정리하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서쪽 거리 안쪽에 울타리가 부서진 집인데요…….”

서쪽 거리 안쪽에 울타리가 부서진 집, 련은 입 안에서 말을 외웠다.

“여기서 제일 비싼 약초들은 다 여청이 캐 온 건데 어르신은 여청에게…….”

하지만 소년 사환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단아! 가서 자수를 놓은 비단 보자기를 가지고 오너라. 가장 아래 서랍에 넣어 둔 거 말이다.”

“예, 어르신!”

단목현우가 되었다고 사양하는데도 상인은 허리를 굽히고 미소를 지으며 비단을 내오게 했다. 소년 사환이 고개를 푹 숙이고 약초 꾸러미를 비단으로 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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