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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56)화 (56/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56화

련은 노인이 말하는 영감이 반년 전 죽었다는 약여청의 조부라는 걸 알아채곤 고개를 내저었다.

노인이 더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련과 단목현우를 바라보곤, 낡고 허름한 집을 뒤돌아보며 말했다.

“이 집 약초는 전부 아까 그 어린 것이 캐는 것인디, 그래도 정말 사실련지…….”

마침 도라지 포장을 마친 소녀가 뛰쳐나왔다. 엉망진창이나마 두껍게 싼 도라지를 품에 안은 약여청이 그들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여기 있습니다!”

“허이고…….”

노인이 약여청의 모습에 헛웃음 지으며 혀를 끌끌 차곤, 소녀를 끌고 와 정수리를 잡고 푹 눌렀다.

“아직 많이 어리고 원숭이처럼 천방지축으로 뛰댕기면서 저리…… 뭘 엉망으로 하긴 하지만 그래도 약초 캐는 거 하나는, 아가씨 말씀대로 절강성에서 제일이라고 자부합니다.”

품에 도라지를 안은 채 버둥거리던 소녀의 움직임이 잦아들었다.

그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입술을 꾹 내밀고 있던 련이 호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목세가에 독점 공급하기로 해요. 여청이…… 아니, 약 소저가 캐 오는 약초요. 가격은 소매가의 8할로 맞춰서.”

“저…… 정말요?”

“품질 유지만 신경 써 주면.”

“정말 제가 캔 건데요?”

소녀는 침을 꿀꺽 삼키곤,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련에게 되물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1년 전부터 거래한 약초는 모두 소녀가 캔 것이었는데, 그때는 멀쩡하게 거래하던 약초방들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거래를 끊었다.

아직 어린 그녀가 캐 오는 약초를 그 가격에는 살 수 없다는 거였다. 어린애를 믿을 수 없으니까.

그나마 친분이 깊었던 청운 약초방에서나 그녀의 약초를 헐값에라도 사들여 주었다.

어린 그녀가 캐 온 것이라 질이 좋지 않지만 그간의 정과 어려운 형편을 봐서 사 주는 거라고 했다.

약여청은 자신이 캔 약초에 자부심이 있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 몇 푼이라도 받지 않으면 늙고 병든 할머니와 자신의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그사이에 결코 흔들릴 리 없다고 믿었던 스스로에 대한 믿음은 폐가의 나무 기둥처럼 삭아 내렸다. 믿고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자 도리어 놀라서 반문하게 될 정도로.

련은 당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혹시 따로 의뢰하는 약초도 캐다 줄 수 있어?”

약여청은 여전히 믿지 못해서 흔들리는 눈동자로 제 조모와 련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 저를…… 저를 어떻게 믿고요?”

“그 도라지도 직접 캤다면서? 저것도 그렇고.”

말리고 있는 약초들을 가리켰다. 산다는 사람은 믿고 사겠다는데 판다는 사람이 갑자기 되묻는 기묘한 상황이었다.

“진짜 제가 캔 것인데도요?”

“음.”

련은 잠깐 침묵했다가 소녀에게 다가가 귓속말했다.

“할머님이 캐셨을 것 같진 않은데……?”

순간 약여청의 얼굴이 웃음을 참느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웃음을 간신히 참아 낸 약여청이 련 앞에 얼른 절을 올렸다.

“저, 저는! 약여청입니다. 절대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아가씨!”

* * *

련은 약여청에게 몇 가지 약초를 구해 달라고 부탁하고는 만남을 마무리 지었다.

어린 약초꾼 한 명으로는 질 좋은 도라지 수급에 한계가 있을 테니 약당에서 도라지청을 파는 것 말고 다른 장사를 해야 돈을 벌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저 애가 불쌍해서 그런 거니?”

단목현우가 슬그머니 묻는 말에 련이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네? 아니요. 정말로 그 애가 캔 약초가 제일 좋아서요.”

“정말 그랬어?”

“네.”

“그랬구나…… 그 약초꾼 아이를 그냥 세가로 데려올 걸 그랬나?”

련이 청련수를 만든 뒤로 단목현우는 약당 관련한 일에는 련의 말을 의심하거나 불안해하는 법이 없었다.

그가 턱을 쓸며 그렇게 중얼거릴 때 단목성이 움찔하더니 턱을 세웠다.

“우리 아직 가난하다면서요. 그렇게 아무나 턱턱 데려오면 어떡해요?”

“아, 아니. 이제 그렇게 가난하진 않은데…….”

누이인 단목현요에게는 기를 세워도 조카에게까지 똑 부러지게 말하지 못하는 단목현우가 말끝을 흐렸다.

련은 단목성의 그 눈빛을 간파하곤 그만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가 얼른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돌렸다. 세가의 형편에 대해서는 차차 이야기하면 될 테니까.

“성아야, 이것 봐. 오늘 산 걸로 약을 만들어서 고모님 드릴 건데 너도 같이 만들래?”

“뭐……? 나도?”

“응. 싫어?”

“……싫은 건 아니지만. 어머니가 무림인은 부엌에 들어가는 거 아니라고 하셨어.”

단목성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련은 개의치 않고 웃었다.

“에이. 그게 뭐 어때서. 그리고 이건 약당 들어가서 만드는 거니까 부엌이랑은 상관없어.”

“그래도 그 시간엔 수련을…….”

단목성은 그렇게 말하다가, 련을 흘끗 보고는 ‘아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봐준다는 투였다.

“어쩔 수 없지. 같이 만들어 줄게. 너 혼자 했다가 큰일 날 수도 있으니까.”

“고마워!”

그렇게 단목성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던 련은 문득 뒤에서 시선을 느꼈다.

그 순간 단목현우는 이미 빙당호로를 한입에 털어 넣고 꼬치를 내던진 채 조카들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어휴. 항주가 넓다 넓다 해도 참 좁아. 여기서 이렇게 또 만나는군.”

단목현우가 중얼거렸다. 멀찍이서 호화로운 금빛 자수를 넣은 비단 장포로 몸을 감은 소년이 왠지 몹시 어색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단목성은 빠른 눈치로 상대가 누군지 바로 알아봤는지 눈을 홉뜨고 쳐다보았다.

어색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굳이 다가온 금종하가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성큼성큼 다가와 양손을 맞잡고 포권했다.

“단목세가 약당주님을 뵙습니다!”

“흐음.”

단목현우는 금종하와 함께 온 하인들과 호위의 얼굴에 역력한 당혹스러움을 확인하고 나서야 고개를 까딱해 주었다.

“금 공자가 여긴 어쩐 일이지?”

“지나가는 길이었는데 벗의 얼굴을 보고 인사하려고 왔습니다.”

“벗?”

“벗?”

련과 단목현우가 동시에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금종하는 그것을 인사에 대한 화답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금종하는 쭈뼛거리면서도 련에게 다가왔다.

“련 소저! 오…… 오랜만이다.”

련은 몇 주 전 서로 가문의 자존심 비슷한 것을 걸고 비무를 했다가 그가 자신에게 대판 깨지고 돌아간 게 꿈이었나 잠시 생각했다.

“벗……?”

“그, 그래! 네가 써 준 글을 보고 열심히 수련해 깨달음을 얻었다. 서로 배움을 주고받았으니 이제 버…… 벗이지 않겠어?”

“보통 그런 건 양쪽이 같이 교류를 할 때 벗이라고…….”

련의 말에 금종하의 표정이 금방 흐려지고 기가 죽은 듯이 어깨가 축 처졌다.

어른들 몰래 한 두 번째 비무를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그래, 그만하면 벗이지, 벗.”

련이 뒤늦게나마 수긍해 주자 금종하가 얼른 어깨를 펴더니, 와하하 웃으며 짐짓 의젓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와 비무 또 하면 그전처럼 쉽지 않을걸!”

“도, 도련님…….”

련은 금종하와 함께 온 수행인을 안타까운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 비무 때문에 두 가문 사이에 그 난리가 났었는데 또 저러고 있는 가문 후계자를 보는 가솔들 마음이 어떻겠는가? 피가 바짝바짝 마를 것이다.

“우리 아버지도 네가 써 준 걸 보곤 엄청 강해지셨다고!”

“도련니임!”

금종하의 뒤에 선 하인은 거의 울먹거렸다.

한 가문을 이끄는 가주의 힘은 그 자체로 가문의 중요한 전력인데 그것을 길바닥에서 미주알고주알 얘기를 하고 있으니…….

련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 하지 마.”

“어어? ……왜?”

금종하는 금방 목소리를 낮게 죽이고 물었다.

부친의 성취는 부끄러운 일도 아니고, 오히려 자랑스러운 일인데 왜 숨겨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한번 호되게 당하고 났더니 련이 하지 말라고 하는 걸 꿋꿋하게 할 자신이 없었다. 련은 설명하길 관두었다.

“아니, 그래…… 우리 할아버지도 강해졌어. 얼마 전에 아침 식사를 하시다가 깨달음을 얻으셨거든.”

사실 단목천기가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은 이미 항주에 파다하긴 했지만, 련은 그래도 굳이 한 번 더 말해 주었다.

적어도 이러면 차후에 행여나 무슨 일이 있어도 비겁하니 어쩌니 하는 말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맞아, 그 얘기는 들은 적 있어…… 경축드린다고 전해 줘.”

방심해서 진 것일 뿐이라며 떼를 쓰지도 않고, 련에게 여기저기 얻어맞고서 눈이 퉁퉁 붓도록 울지도 않은 금종하는 의외로 의젓한 구석이 있다.

련이 바라보는 시선을 다르게 생각했는지 금종하가 허리에 꼿꼿하게 힘을 주었다.

“그, 그래도 도를 쥐고 붙으면 우리 아버지가 절강성 제일일걸!”

련은 그런 가정이 필요하다는 것 자체가 제일 강하지 못하다는 증거라고 말을 할까 하다가 눌러 참았다.

어린애가 부모를 자랑스러워하는 걸로 놀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사고는 다른 곳에서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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