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58화
“이제야 병석에서 일어난 애한테 한 달 사이로 두 번이나 비무를 시키는 게 말이 되는 얘기니?”
“그럼 누가 배워서 상대를 합니까? 저나 누이가 할 수는 없잖아요.”
단목현요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미간을 모은 채 말했다.
“성아가 가져온 비무니까 성아가 해야지.”
“괜찮겠어요?”
“련아는 되고 성아는 안 될 이유가 있니? 그리고 원래 그 금종하하고 붙는 대련은 성아에게 시키려고 하남성에서 예까지 온 거니까.”
단목현요가 이를 바득 갈며 속삭이듯 말했다. 주먹을 꽉 쥔 손이 바르르 떨렸다.
다시 생각해도 피가 솟구치는 기분이 되고 만다.
“젠장, 대체 왜 안 말렸어!”
“대체 이 얘길 몇 번이나 하는 거예요? 애들끼리 그러고 놀면서 크는 거죠!”
“애들이 가문 이름을 가지고 공놀이를 하려고 들면 말려야……!”
“그만!”
단목천기가 나직하게 외치는 말에 남매가 입을 다물었다.
옆에 조용히 앉아만 있던 위지청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외당주,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성아만큼 재능이 출중한 애가 또 어디 있나요. 이번 일로 많이 배울 겁니다.”
단목현요는 거의 뒤로 넘어갈 것 같은 얼굴로 위지청을 바라보다가 입매를 파르르 떨며 좋은 말 고맙다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기어코 분풀이 삼아 다른 안건을 끄집어냈다.
“그래요, 그건 그렇다고 하고요. 이 약여청? 이 사람이랑 계약서를 쓴 건 뭐예요? 약초 공급? 우린 호선의각에서 약초 받고 있잖아요, 이미.”
“아, 그건.”
단목현우가 말을 꺼냈다.
“이번에 나갔다가 찾은 약초꾼인데 실력이 대단해서요.”
남동생이 나서자 단목현요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니, 얼마나 실력이 대단하길래 이 돈을 주고 계약을 한다고 해? 집안에 이런 데다 쓸 돈이 어디 있어? 그리고 대체 얼마나 늙었으면 보호자 이름으로 계약을 한다고 적어 놔? 딸이 제 어미 팔아먹는 거 아니야?”
“아뇨, 그건 딸 이름이 아니고 할머니 이름이고요…….”
“……?”
단목현요가 눈만 깜빡였다. 단목현우가 헛기침하며 말을 이었다.
“그 약여청이라는 약초꾼이 아직 성년이 아니어서…… 그래서 그 조모와 함께 협의를 할 계획이라 그래요.”
“몇 살인데?”
단목현요는 그래도 열다섯 살은 됐으리라 생각하며 물었다. 아직 성년이 안 됐을 뿐이겠지, 마음 한편에 일어나는 불안을 무시하면서.
“아 그게…… 몇 살이랬더라? 열 살인가 열두 살인가…….”
“말이니, 그게?”
단목현요가 ‘호호’ 하고 웃으며 대꾸했다가 이윽고 꽥 외쳤다.
“열 몇 살짜리한테 이 돈을 주고 약초를 받아 온다는 게 말이냐고!”
“그 약초꾼 약초가 진짜 괜찮아서 그래요. 약초 사 왔으니까 이따 약당 가서 확인하든가.”
“아니, 그 약초가 정말 좋다고 치자. 약…… 뭐라고? 그 애가 괜찮은 약초꾼이라곤 해도 약당까지 확장해가면서 이럴 돈이 어디 있어!”
“돈 많아요.”
“뭐?”
“정확히는 세가가 돈이 많은 건 아니고 련아가 돈이 많은 거긴 한데, 어쨌든 돈은 많아요.”
“……?”
단목현요가 무슨 헛소리냐는 표정으로 단목현우를 쳐다보았다. 위지청이 빙긋 웃었다.
“외당주께서 성품이 강직하셔서 오시자마자 아이들과 사람들부터 챙기시느라 미처 확인을 못하셨지요.”
너무 좋게만 말하니 오히려 비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으나, 위지청이 언제나 진심만 말하는 사람이라는 거야 이 자리의 모두가 아는 바였다.
단목현요는 오히려 창피해져서 뺨을 붉히고 속으로만 위지청을 노려보는 사이에 단목현우가 말했다.
“재경각 가서 한번 확인해 봐요.”
“그럼 내가 안 갈 것 같니?”
“누이가 갈 사람인 걸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잘 알지.”
단목현요가 남동생을 쏘아보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반쯤 달리듯이 재경각으로 향했다.
재경각주는 붓을 바삐 놀리다가 그녀가 온 것을 보고는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우선 그녀를 환영했다.
“어, 외당주님…… 오셨습니까?”
세가에서 돈 나올 구석이 없어진 지는 십 년도 훌쩍 넘었던지라, 단목현요가 재경각에 발길을 끊은 지도 오래되었다.
단목현요는 우선 위지청이 따라오지 않았는지를 먼저 확인한 다음 그녀가 없는 걸 보곤 직접적으로 말했다.
“세가에 돈이 많다고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예? 어…… 청련수 소문은 한 번도 안 들어보셨습니까?”
단목현요는 미간을 찌푸렸다.
“물건을 한 번도 실제로 본 일이 없는데 내가 저잣거리에서 떠도는 소문을 믿어야 한단 말인가?”
하기사 내놓으면 바로 매진되는데 가게를 지나가다가 고개 한번 내미는 정도의 관심으로는 구할 수 없을 테니, 바로 얼마 전에 절강성으로 돌아온 단목현요 입장에서는 허황된 소문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설관희의 은은한 미소를 본 단목현요의 동공이 커졌다.
“설마 그게 정말…….”
“정말이고 말고요.”
“무슨 맑은 정유 조합이 그렇게까지 잘 팔릴 거였으면 세가 약당에서 진즉 만들지 않고 뭘 한 거야!”
“약당이 무능한 것이 아니오라, 련 아기씨께서 만들어 내신 겁니다. 다른 데서는 그 효능을 흉내도 못 내어 이리 많이 판 것이지요.”
실제로는 가짜도 제법 유통이 되기 시작한 모양이었는데, 효능이 제법 차이가 나서 곤욕을 치르는 듯했다.
“련아가 혼자서 만든 게 그렇게…… 그렇게 대단해서 그렇게 잘 팔리고 있단 말이야?”
“그럼요.”
“그런데 세가 건물들은 왜 여전히 이 모양 이 꼴이야?”
건물들뿐만 아니라 세가 식구들 옷차림도 당장 먹는 것도, 자신이 세가를 떠나 하남성으로 가기 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니 여지껏 몰랐지.
“아기씨께서 상대적으로 멀쩡한 것은 그대로 쓰고, 가장 낡은 부분부터 보수하자고 하셔서 그쪽부터 공사 들어가는 중입니다.”
“뭐? 그게 어딘데.”
“하인들 숙소요.”
“대체 그걸 왜…….”
섣불리 말하려 했던 단목현요였으나 설관희의 차분한 눈빛을 받고 얼른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가세가 기울고 형편이 어려워져도 가주와 직계 혈족의 처소 관리를 게을리하겠는가, 그게 아니면 손님을 맞이할 접객당 보수를 미루겠는가.
하여 가장 낡고 허름한 건 세가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하인들의 처소였다.
“그래서 정말…… 뭐…… 돈이 많다는 거야? 이제 우리가 부자라고?”
“우리는 아니고 련아 아가씨가 부유해지신 거지요.”
“!”
설관희가 아무렇지도 않게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단목현요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런 설관희를 노려보았다.
“뭐 내가 조카 돈을 탐내기라도 할까 봐서?”
“그러실 리 없다는 거야 이 세가 사람 모두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뭐 얼마나 벌었는데, 구체적으로?”
설관희는 크게 거리끼지 않고 장부를 꺼내 보였다.
세가를 위해 운용할 거라고 련이 떼어 놓은 돈을 정리한 장부였다.
단목현요가 장부를 홱 낚아채 빠르게 훑었다.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이, 이, 이게…….”
그녀가 철들고 난 뒤로는 이만한 자산규모를 본 적이 없었다.
‘기름 몇 방울 팔아서 이만큼이나 벌었다고?’
“벌모세수를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세가의 도움이니 응당 갚는 게 당연하다고 하시면서, 세가의 발전에 쓰실 거라고 하셨지요.”
단목현요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단목련이 깨어나고 얼마나 지났다고 세가에 모르는 일투성이였다.
“그래서…… 이걸로 약초꾼을 고용하고 약당을 증축하고…… 새 제자도 받고?”
“예.”
단목현요는 눈썹을 한번 파르르 떨고는 장부를 탁 소리 나게 덮어서 설관희에게 돌려주었다.
“설 각주는 그 애가 예뻐 죽겠어? 이 집안에서 돈 쓰는 데가 아니라 버는 데 재주를 보인 건 그 애뿐이라.”
“제가 감히 예뻐하실 분인가요. 모시면 몰라도.”
“……!”
순간 단목현요가 얼굴을 굳히고 그를 쳐다보았지만, 설관희는 희끗한 머리카락에 비해 젊어 보이는 얼굴 그대로 단목현요에게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용건이 끝났으면 가 보라는 뜻이다. 단목현요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몸을 홱 돌렸다.
* * *
등롱이 바람을 받고 잠깐 흔들리자, 그제야 단목성이 서책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왠지 한껏 속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단목현요와 눈이 마주쳤다. 어머니는 지금까지 그녀만 쳐다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어머니.”
“공부는 잘되니, 우리 딸?”
단목성 옆에서 그림을 내려다보고 있던 석반안도 고개를 들었다. 석반안이 빙긋 웃었다.
“새로운 무공을 배우는 일이라지?”
“네, 아버지. 그러니까 어머니도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
“아, 아니…… 아니 내가 우리 딸이 뭐 배우는 것 때문에 그러겠니?”
단목현요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자고로 무림인이라면 자기 가문의 이름이 모욕받았을 때 나서는 패기는 있어야지. 우리 딸이 잘했어.”
“네!”
단목현요는 속이 쓰렸지만 딸의 얼굴을 보면 쓴소리는 속에만 남았다.
자신을 닮아 저리 곱고 예쁜 데다가 자질까지 충만하고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는 성실한 딸을 두고 혼낼 거리가 떠오를 리 없었다.
“그래서 련아랑 놀러 갔다 온 건 재미있었고? 무슨 약초방만 갔다 온 건 아니지?”
“아…….”
단목성이 말끝을 살짝 흐렸다. 단목현요가 눈을 치켜떴다.
“련아 그게 자기 하고 싶은 거만 하자 하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