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60화
“응!”
“제가 무공을 배우면…… 얼마나 강해질 수 있을까요?”
“네가 배우면?”
련은 눈을 감고 이마를 짚은 뒤에 극적으로 말했다.
“우화륜. 너는, 네가 배우기만 하면! 너는 다음 천하제일인은 맡아 놓은 거나 다름없어. 지금 천하제일인이 누구였더라? 할아버지 다치고 나서 다른 사람 됐다고 했는데.”
“무림맹주요?”
“아! 그래. 무림맹주님. 그 사람은 이제 네가 스물? 아니지, 열다섯만 돼도 그 자리를 내려놔야 할걸.”
“비아하고 누이는요?”
“응?”
“비아나 누이가 천하제일인 되지 않고요?”
련은 거기서 ‘천하제일인이 되고 싶다고 되는 거겠니?’라고 대꾸하지 않고 조금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마천교 소교주 천화륜의 성취와, 앞으로 자신과 단목비가 얻을 성취.
‘내가 여기서 뭘 더 배운다고 정말 륜아를 이길 수 있나? 내가 영기를 쓰고 익히면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난 내공이 없으니까.’
어쩌면 이 영기를 가지고 뭔가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당장의 일은 아니었다.
그럼 자신은 그렇다 치고, 단목비는.
‘비아도 정말 보통 재능이 아닌데. 아니긴 한데…….’
련은 고롱고롱 잠이 든 단목비를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숨을 죽이고서 화륜에게 속삭였다.
“나중에 누가 천하제일인이 되든, 우리끼리는 서로 봐주기야.”
“네?”
“우리끼린 서로 봐주자고.”
련이 강조했다. 화륜은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무림인이 봐주잔 얘길 하다니.
“누이도 나 봐줄 거예요?”
기대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당연하지!”
련은 그렇게 말하곤 화륜을 와락 끌어안고 뺨을 비볐다. 화륜이 금방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뒤로 도망쳤다.
“으윽! 누이는 책이나 보세요.”
“너는?”
“난로 가지러 가야 돼요.”
“난로? 안 가져와도 돼, 가지 말고 여기 있어.”
련은 그렇게 말하며 화륜을 잡아당겼다.
그러곤 옆에 아무렇게나 흐트러뜨려 둔 겉옷 두 벌 중 하나는 단목비에게 덮어 주고, 다른 하나는 크게 펼쳐 화륜과 함께 뒤집어쓰고는 나란히 앉아서 서책을 펼쳤다.
“이것 봐, 같이 있으니까 따뜻하지?”
련이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 화륜은 이맛살을 모은 채 그런 련을 빤히 쳐다보다가, 잘 모르겠다는 말을 웅얼거리고는 탁자에 몸을 기댔다.
* * *
무림 세가이다 보니 깊지 않더라도 어지간한 무기를 다루는 방법에 대한 서책 하나씩은 존재했다.
하지만 단목세가에서 가장 주력으로 쓰는 건 검이어서 도에 대한 건 검에 비하면 가짓수도 적었고 세가 안에서 도법에 정통한 사람도 극히 드물었다.
그 드문 사람 중의 하나가 바로 유성십팔숙의 제 일좌, 단목한소였다.
련에게 벌모세수를 해 주고선 유람하겠다며 항주를 떠났던 그는 잠깐 세가에 들렀다가 그만 단목천기에게 잡혀 와선 두 소녀를 가르치게 된 것이다.
“제가요? 도를 가르치라고요?”
“그게…… 그렇게 됐다.”
단목천기는 조금 민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처음 도를 잡겠다고 했을 때 제가 이 세가 장원 끝에서 끝까지 맨발로 달렸잖아요. 잡히면 죽을까 봐. 기억하시죠?”
“크흠.”
단목천기가 헛기침했다.
아무래도 가풍이 검가(劍家)에 가깝다 보니 혼자서 누가 도를 잡겠다고 하면 까무러칠 듯 놀라곤 했다.
“전 태허진인께서 들르셨다기에 혹시 만나 뵐 수 있을까 해서 잠시 왔던 거지요. 다시 갈 겁니다.”
“그러니까 그 가는 걸 잠시 미루라는 말일세.”
“그걸 미루고 어린애들 붙잡아 도나 가르쳐 보라고요?”
단목한소의 말에 단목천기는 끙 하고 앓는 소리를 삼켰다.
단목한소에게는 빚이 있으니 마음이 불편했다.
“그중에 하나는 좀 더 진지하게 여기게 될 거야. 그러니 자네가 가르쳐 보라는 게지. 자네가 도 잡는 게 힘들었다고 자네 후임도 힘들게 할 셈인가?”
단목천기는 련이 했던 말을 상기했다. 단목성에게는 검보다 도에 더 큰 재능이 있으니, 이참에 이를 살려보면 어떻겠느냐는 얘기였다.
련의 보는 눈이 얼마나 좋은지는 단목천기가 가장 잘 알았다.
“그중의 하나요? 남은 하나는 심심풀이로 들으신답니까?”
“심심풀이가 아닐세.”
단목천기는 미간을 싸매었다.
거기서 련이 그 수업을 들어서 가장 득을 볼 건 련도 아니고 단목성도 아니고, 바로 단목한소였다.
련은 단목한소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세가의 가장 강력한 타격대 유성십팔숙의 제 일좌이면서도 자신에게 벌모세수를 해 주기 위해 내공까지 유실한 사람.
그는 자신이 힘을 잃었다는 이유로 유성십팔숙의 자리에서도 스스로 물러났다. 단목한소는 련의 벌모세수 한 번을 위해 자신의 거의 모든 것을 내놓은 셈이었다.
단지 단목련이 단목천기의 손녀이기 때문에.
련은 단목천기에게 말했다. 가능하다면 그가 잃은 것들을 돌려주고 싶다고.
단목천기는 그 얘기를 허투루 듣지 않았다. 련은 자신에게 받아 갔던 만년지극혈보의 값 역시 지나치게 비싸게 치렀다. 그의 부상을 치유해 주고 새로운 경지로 내딛게 해 주었으니까.
그렇다면 단목한소에게도 그럴 것이 아닌가!
“명령하시면야 듣겠습니다.”
단목천기가 미간을 찌푸렸다. 솔직히 벌모세수 이후로는 단목한소에게 큰 빚을 진 기분이기에 그에겐 아무것도 명령하고 싶지 않았다.
‘이게 벌주도 아닌데. 권주를 내밀기도 이리 어려워서야!’
그렇다고 그 어린 단목련이 너의 성취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선뜻 할 수도 없었다.
자신이 그의 입장이었다면 태상가주가 말년에 손녀 얼굴을 보곤 노망이 났다고 생각할 테니까.
사실 여기서 단목한소가 ‘제 내공도 녹여 드시고 제 시간도 태워 드시려고요?’라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만 해도 살아 있는 부처나 다름없었다.
“에잉. 그래! 명령하마. 비무는 한 달 뒤다. 그간 네가 잘 가르쳐 보도록 해라.”
“제가 가르치는 방식은 다소 거친 것도 아시지요?”
“안다, 알아. 네 맘대로 하거라.”
“한 달 뒤에 그 비무만 보고 다시 떠날 겁니다. 이번엔 사천까지 가려고 하니 갈 길이 참으로 멀어요. 사천성 요리 드셔 보셨습니까? 거기는 삶은 돼지고기를 두반장에다 볶아서 만드는 회과육 같은 것도 무지하게 맵다더군요. 제가 꼭 가서 한 번은 먹어 봐야겠습니다.”
“다 처먹어라. 다 처먹어.”
* * *
“……너도 같이할 거야?”
연무장에 들어가기 전, 단목성이 가볍게 숨을 들이켜곤 옆에 선 련을 쳐다보며 물었다.
“응!”
단목성의 표정은 딱딱해서 알아보기 힘들었다.
“넌 나하고 수업만 같이 듣는 거야. 그 녀석이랑 붙는 건 나야.”
“응, 그래!”
련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련 역시 금종하와 또 비무를 하고 싶어서 이러는 건 아니었다.
단목한소 정도 되는 사람이 휘두르는 도를 보기만 해도 심안이 오를 게 분명한데, 이 기회를 어찌 놓치랴?
“좋아. 가자.”
“응, 좋아.”
“그리고 다 배워서 전부 끝장내 버리겠어.”
눈썹을 치켜올린 냉랭한 표정의 단목성이 그렇게 말하자 아직 어린데도 박력이 느껴졌다.
“그래! 다 해치워 버리자.”
그렇게 두 소녀가 나란히 손을 잡고 연무장에서 서성거린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희끗해지기 시작한 머리카락을 제멋대로 내버려 둔 남자가 나타났다.
“허허. 세상 유람 좀 하고 왔더니 세가에서 도를 잡겠다는 사람이 둘이나 나오는 날이 올 줄이야. 꿈에도 몰랐습니다.”
단목한소가 허리춤의 검을 툭툭 건드리며 웃자, 그와 함께 들어선 단목현요가 정색을 하며 단목한소를 돌아보았다.
“우리 성아는 금씨네 아들만 상대할 거예요.”
단목현요는 딸에게 각별한 기대를 걸고 있었다.
딸이 태어났을 때 ‘성’이라고 이름을 지어 준 것도 오라비 현성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녀가 본 이들 중에서 가장 눈부신 재능의 소유자였던.
그러니 단목성 역시 단목현성처럼 검으로 이 세가를 일으킬 것이다. ‘검풍’ 단목세가라는 별칭에 어울리는 무림인이 되어서.
“뭐 그 이후야 저희가 알 수 있는 일은 아니지요.”
단목한소는 느긋하게 말했다.
그는 방계 출신으로 단목세가에서 도를 잡고도 여기까지 온 인물이었는데, 그만큼 자신이 충성하는 단목천기를 제외하면 거칠 것이 없다는 듯 굴곤 했다.
단목현요는 그 이상 단목한소와 씨름하지 않고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사람들이 물러나고 세 사람만 남은 연무장에서 단목한소가 두 소녀를 내려다보며 큰 입으로 싱긋 웃었다.
“그럼 시작들 해 봅시다.”
두 소녀가 시키는 대로 뛰어오르고 달리고 구르고 멈춰 서는 모양새를 보고서, 단목한소는 처음엔 다소의 염려와 심드렁함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 특히 련을 보면서 더욱 그랬다.
자신의 내공까지 태워 가며 벌모세수를 시켜 준 세가의 장손이기는 했으나 아닌 건 아닌 거였다.
그나마 단목성은 조금 나았다. 단목성은 련보다는 체구가 탄탄했고, 의욕도 아주 넘쳐흐르는 모습이었으므로.
그래도 련은 단목한소가 어떤 표정을 짓든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가 자신을 개나 고양이 보듯 했어도 상관없었을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