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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66화
둘은 지금 무슨 사이랄 것조차 없는 사이다.
가문의 명예 때문에 홧김에 비무를 하게 됐고 한 달이나 준비하여 마침내 무승부로 끝났으니 나란히 앉아서 할 말이 있을 턱이 없었다.
결국 이 어색한 침묵을 보다 못한 련이 서두를 열었다.
“음, 두 사람 모두 굉장히 멋졌어.”
“…….”
“…….”
지독하게 어색한 공기에 련은 탄식을 삼켰다.
‘하. 어떻게든 결판이 났었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적어도 두 사람 중 한 명은 기분이 좋지 않았을까.
단목성도 금종하도 분함으로 눈이 빨갰는데 둘 다 자존심 하나만으로 그 눈물을 참고 있었다.
“내가 비켜 줄까?”
금종하는 왜 자신까지 끼워서 복기를 하고 싶어 하는 건지.
하지만 몸을 일으키기가 무섭게 양쪽에서 덥석 련을 붙잡았다. 그리고 둘 다 화들짝 놀라서는 자신의 손을 급히 놓았다.
“……알았어, 알았어. 안 갈게.”
련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단목성이 눈에 잔뜩 힘을 준 채 련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조금 숙였다.
금종하는 남이지만 단목성은 사촌이고, 또 이번 비무를 준비하면서 같이 수련하며 정도 제법 들었다.
련은 먼저 단목성의 등을 토닥였다.
“성아야, 진짜 고생했어. 엄청 대단했어. 정말이야.”
“너는 이겼잖아, 나는…… 난.”
단목성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련은 뺨을 긁적였다.
병석에 누워 있던 사촌이 일어난 뒤 아주 짧게 배운 검술로도 상대해 낸 금종하였으니, 단목성은 자신도 금종하를 이겨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냐, 성아야. 내가…….”
“그야 련 소저는 잘하니까 그렇지.”
갑자기 들려온 초 치는 소리에 련은 잠깐 눈앞이 아득했다가, 금종하를 홱 돌아보았다.
그 매서운 눈길에 금종하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왜, 왜 그렇게 쳐다봐? 내가 이상한 말 했어?”
“조용히 좀 있어.”
“아니, 당연히 네가 더 잘하니까 너한테는 졌지. 정말 대단했다…… 이 나를 이기다니, 련 소저는 정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니까!”
금종하는 박수까지 쳤다. 련은 놀라서 입만 떡 벌렸다.
아무래도 현실을 부정할 수 없게 되어서, 금종하는 그렇게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발상이기는 했다.
단목성이 련과 금종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입을 꾹 닫은 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 어려웠다.
그러다 단목성이 작게 중얼거렸다.
“맞아. 련아는…… 연약하긴 해도 나보다 더…….”
한 달 내내 함께 수련하고 공부했으니 련의 실력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노릇이다.
금종하의 실력 역시 그랬다. 금종하가 련에게 패배한 건 그의 말대로 련이 재능과 실력을 겸비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보다도 더.
단목성이 마침내 이 결과에 승복하는 순간 금종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연약하긴 해도’라는 말을 들은 탓이었다.
“맞아, 나와 비무가 끝나고 련 소저가 휘청거렸지. 그래서 우리 아버지도 엄청 걱정하고 그랬잖아. 지금은 괜찮아?”
금종하는 자신이 그런 말을 해 놓고서, 왜인지 오라비 행세를 한 느낌이 들어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맞아. 그래도 내가 두 살이나 많은데 말이야.’
“그게 대체 언젠데…… 당연히 괜찮지.”
단목성은 혼자 곰곰이 뭔가를 생각하더니 혼자 뭔가 결론을 내렸다.
“그래, 알겠어.”
“어? 성아야, 알겠어? 뭐…… 뭐를?”
련의 질문에 단목성은 혼자서 결론을 내리더니, 굳게 결심한 얼굴로 련 앞에 섰다.
“서, 성아야?”
“둘이서 왜 그래?”
금종하가 의아해했지만 단목세가 소녀들은 그에게까지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단목성이 련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련아, 앞으로 나만 믿어.”
“어? 나는…… 나는 언제나 널 믿어.”
“둘이…… 뭐야? 둘만 뭐 해?”
아무래도 뭔가 모종의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오해인지도 알 수가 없으니 해명을 할 수도 없었다.
단목성은 뒤늦게 창피해졌는지 뿌리치듯 련을 놓아주곤 한층 더 진지하고 의욕에 찬 얼굴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둘 사이의 눈치를 살피던 금종하가 작게 헛기침하곤 련을 흘낏거리며 말했다.
“그럼 련 소저, 우리 복기하는 거 도와줘.”
“복기는 싸운 두 사람이 해야지.”
“네가 다 지켜봤잖아.”
“너희는 직접 했잖아.”
련이 조금 전 비무에서 본 것처럼 보이지 않는 도를 쥐고 움직이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금종하의 눈빛이 번쩍였다. 거의 눈앞에서 섬광이 친 것 같았다.
“방금! 방금 어떻게 한 거야? 우리 집 도법 맞지?”
련은 기세에 눌려 몸을 뒤로 뺐다가, 단목성을 흘끗 쳐다보았다.
간신히 품위를 지키고 있는 단목성이었으나 표정을 보아하니 단목성 역시 방금 본 게 뭐였는지 알고 싶어 죽겠는 모양이었다.
입술만 달싹거리던 련은 결국 눈앞의 소년 소녀가 원하는 대로 복기를 돕기로 했다.
‘둘 다 똑똑하니까 행운 지수는 팍팍 오르겠다…… 좋다, 좋아. 좋네.’
“아, 알았어. 같이 복기해. 그럼 두 사람의 첫 번째 합부터…….”
* * *
“위지 부인, 진짜 너무 오랜만인 거 아니에요?”
“그러게요. 앞으로는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크흠.”
“흐흠.”
위지청과 송영랑이 손을 맞잡고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사이에, 단목현요와 금적걸이 조용하고 어색하게 헛기침했다.
단목현성의 일은 제쳐 두고서라도 일단은 항주를 두고서 경쟁해 왔던 사이인 데다가, 두 사람 다 온순하지 않은 성격이라 ‘우리가 지금 얼굴 보고 뭐가 좋아서 웃는단 말인가?’ 하는 생각을 하는 차였으나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두 부인이 빙긋 미소 짓자 금적걸이 운을 뗐다.
“그나저나 단목세가의 두 따님이 이렇게나 재능이 출중하니 참 기쁘시겠습니다.”
“뭐 이 정도는 해야지요. 단목세가인데요.”
단목성을 붙잡고 몹시 장하다며 추켜올리던 단목현요가 짐짓 턱을 세우고 담담하게 말했다.
금적걸의 눈썹이 꿈틀하는 사이에 송영랑이 솔직하게 속상한 심정을 감추지 않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우리 종하가 열 살 넘도록 주위에서는 제일 잘한다 잘한다 했는데, 어찌 일이 이렇게 됐는지.”
“부인.”
“휴. 상공, 그렇잖아요. 성아 소저는 이제 도를 배운 지 겨우 한 달째라던데요?”
단목현요의 얼굴에 뿌듯함이 은은히 어렸다. 하지만 송영랑의 다음 말에는 표정을 굳히고 말았다.
“그럼 성아 소저는 이제 완전히 도를 잡기로 한 건가요? 세가에 유명하신 분도 계시니 그쪽으로 가도 정말 멋진 일이겠네요.”
“그건…….”
보름 전만 해도 성아는 당신네 아들만 상대하고 더는 도를 잡지 않을 거라고 딱 잘라 말했을 단목현요였지만, 지금은 왜인지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다만 단목현요의 편치 않은 얼굴을 보고서 사정을 짐작한 금적걸이 화제를 전환했다.
“그나저나 내년에 있을 경항운련에는 그쪽 아이들도 참석하겠군요.”
“예, 그럴까 합니다. 비아는 아직 어려서 세가에 남겨 둘 거지만요. 금가장에서도 금 공자까지 데리고 참석하려 하십니까?”
“어휴, 말도 말아요. 이 비무에서 지면 두고 가겠다고 했죠. 그런데 결과가 이렇게 되었으니 어쩌겠어요? 보나 마나 ‘그럼 무승부도 안 된다고 말씀하셨어야죠!’라거나 ‘아니, 소저의 재능이 그리 출중한 것을 어쩌겠습니까?’라는 소리나 할 텐데 조용히 시키기 위해서라도 데려가야죠.”
“송 부인 처가도 남직례성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참에 들르시면 모두들 반가워하시겠어요.”
“글쎄, 그건 잘 모르겠어요. 제가 원체 솔직하게 말을 하다 보니까 처가에서도 저 좋다는 사람 반 저 싫다는 사람 반이었답니다.”
단목현요가 웃음을 가까스로 참는 헛기침을 하며 얼른 고개를 돌렸다.
아들이 져서 속상하다는 얘기를 아들 이겨 먹은 사람들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말하는 그 솔직함을 보아, 집에서도 그랬을 게 눈에 보인 탓이다.
“사실 처음엔 이이도 저 싫다는 사람이었는데.”
“부인!”
금적걸이 조금 당황해선 나직하게 송영랑을 불렀지만, 그건 꾸중이 아니라 다급한 곤란함의 표현이었다. 송영랑이 호호 웃었다.
“그런데 련아 소저도 그렇고 성아 소저도 그렇고 어쩜 저렇게 어른스럽고 의젓하대요? 겸손하기도 하고.”
“흐흠.”
단목현요는 작게 헛기침하곤 위지청을 흘끗 쳐다보았다.
“련아는 아무래도 저희 내당주님을 닮았죠. 성아는…… 아이 아버지를 많이 닮았고.”
“아! 외당주님 부군이신 석 공 말씀이시죠. 소문은 들었답니다. 한때 강남에서 그분 얼굴을 보려고 집 앞에 줄이 생기기도 했다면서요?”
“그런다고 그이의 마음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었지만요.”
단목현요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가 세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뒤늦게 깨닫곤 뺨을 붉혔다.
* * *
세가로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아이들은 많이 지쳤는지 서로에게 기대어 쌔근쌔근 잠들어 있었다.
많은 일이 있었던 하루였다.
자기네들끼리 복기를 하겠다 했던 아이들은 대체 그사이에 뭘 했는지 애써 갈아입힌 옷이 무색하게 엉망진창인 꼴로 나타났다. 멀쩡한 건 단목련뿐이었다.
단목현요는 어이가 없는 와중에도 금가장주가 ‘무슨 일이 있는지 알만하다’라는 표정을 짓는 걸 보고 심기가 뒤틀렸지만 꾹 참았다.
그 뒤로는 금가장에서 이번 비무를 맞이해 준비했다는 선물을 받았다. 그 함을 들여다본 단목현요는 그만 뒤로 넘어갈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