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68화
“네? 대체 왜요!”
“그 애는 내공을 쌓을 수가 없는 몸이네.”
순간 얼음장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단목한소는 입을 벌렸다가 난폭하게 다물었다. 그 사이 단목천기가 조용히 덧붙였다.
“차마 자네에겐 말을 할 수가 없었네. 이제야 이야기를 꺼내는 나를 용서하게.”
자신의 내공을 잃어 가면서 충심을 다한 결과가, 내공도 쌓지 못하는 아이를 간신히 일으켜 세웠을 뿐이라는 이야기를 쉽게 할 수는 없었다.
“내공을…… 네? 왜…… 내공을 왜 쌓질 못한단 말입니까?”
단목한소의 목소리가 속삭이듯 작았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다가 나중에는 어처구니없었다가, 끝에 가서는 왜인지 분노한 듯이 그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자신이 그 아이를 위해 쓴 내공이 안타까워서가 아니었다.
“설마 벌모세수에서 뭔가 문제라도…….”
“그런 것이 아니야. 그런 생각일랑은 말게. 자네 없었으면 눈도 뜨지 못했을 아이 아닌가. 모든 처치는 완벽했느니.”
단목한소의 손끝이 작게 떨렸다.
“내공을…… 정말…… 정말, 입니까?”
“그러네.”
자신은 내공의 일부를 소실한 것만으로도 세가 안에 붙어 있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내던진 게 무엇이었는지 너무나 잘 느껴졌기 때문에.
그런데 처음부터 그 내공을 쌓을 수도 없다는 건…….
“그걸…… 자신이 그런 걸 련 아기씨도 알고 있습니까?”
“……그래, 알고 있네.”
“알고도 검법을 익히고 도법에 관심을 가져 한 달이나 제 수업을 들으며 굴렀다고요?”
“그래.”
단목천기는 대답하며 단목한소를 찬찬히 살폈다.
평소였다면 그의 눈길을 바로 알아챘을 단목한소였으나 지금은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침묵 끝에, 어째서인지 개운한 얼굴의 단목한소가 말했다.
“그래도 련 아기씨입니다.”
“뭐?”
“저는 련 아기씨가 내공이 아니라 팔다리가 없어도 그분이야말로 다음 가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목천기는 헛웃음을 지었다. 멋대로 다음 가주를 거론하는 단목한소가 불충하다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여긴 무림 세가다.”
“알고 있습니다.”
“직계도 아니고 학식도 뛰어나지 않은 자네가 유성십팔숙의 제일좌가 된 건, 세가에서 자네가 자네의 도로 쓰러뜨리지 못할 사람이 나와 현성이밖에 없어서였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공이 없는 자가 어찌 세가를 다스리며, 장차 너와 유성십팔숙의 주인이 된단 말이냐? 네가 제정신이 아니구나.”
“저도 련 아기씨를 보기 전이었으면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련아를 보니까 생각이 달라졌다?”
단목한소가 투덜거렸다.
“가주님도 사실 속내는 그러신 거 아닙니까? 사람이 보통 혀가 길어지면 다른 생각이 있는…….”
“이놈!”
단목천기가 노여워하듯 외쳤지만 단목한소는 눈도 끔벅하지 않았다.
힘이 있는 자들은 언성을 높일 필요가 없다. 힘으로 해결하면 되니까. 굳이 호통을 치는 건 달리 바라는 게 있기 때문이다.
애당초 그렇지 않고서야 단목한소가 처음 단목련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 단목천기는 바로 이야기를 끊고 그를 벌했을 것이다.
태상가주와 유성십팔숙이 바라는 가주가 다르다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니까.
그렇다는 건…….
“현요 녀석도 차기 가주 얘기를 거론했으나 시일을 미루었다. 아직 열 살도 안 된 아이들을 데리고 무얼 하겠느냐?”
“전 련 아기씨가 아홉 살이 아니라 다섯 살이었어도 련 아기씨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외당주 생각은 좀 다를 수도 있겠군요.”
“……자네 눈에도 련아가 그리…… 그렇게나 재능이 있어 보였는가?”
단목한소는 자신이 성취를 얻었던 그날을 되짚어 보았다.
단목천기에게는 투덜거리긴 했으나 련과 성을 가르치는 건 사실 그에게 무척 즐거운 일이었다.
어린 제자를 가르치는 일은 아주 오랜만이다. 세가를 떠나 유랑을 하기 전에도 유성십팔숙 휘하의 검수들에게 가르침을 내리긴 했지만, 그의 성명병기는 검이 아닌 도였으므로.
그렇다고 즐겁기만 하진 않았다. 자신이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통통 튀어 나가는 아이들은 그를 놀라게 했다.
그리고 련이 이따금 보여 주는 일 보.
도를 휘두르는 방향과 기세.
초식을 해석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유연한 사고, 그 끝에 펼쳐지는 도법.
모두 그가 평생 해 온 것이었는데 련의 손에서 펼쳐지는 모든 것들이 전혀 모르는 것처럼 낯설었다.
어린애가 멋모르고서 날뛰느라 무엇 하나 제대로 한 게 없다며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만 아둔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단목한소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괴리에 몸부림치다가 어처구니없게도 도법의 마지막 초식이 가진 묘리를 깨우쳤다.
돌이켜보니 그 애가 자신의 수업을 받으며 움직인 모든 것들이 그 마지막 초식의 변화를 담고 있었다.
그는 련의 벌모세수에 쏟아부은 자신의 내공에 미련을 가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과한 보상을 받았다는 걸 깨달았다.
“글쎄요…… 넘지 못하는 벽을 머리채 잡고 넘겨 주는 사람을 보고 재능이 있다고들 하는지는 모르겠군요. 보통 천지신명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부처님?”
“여기가 절이냐, 사원이냐? 가장 속된 세가 아니냐?”
“그러게 말입니다.”
단목천기는 단목한소가 헛소리한다는 듯 굴었지만 잔잔한 미소를 숨기지는 못했다.
련의 눈에는 그런 것들이 보였던 게 분명했다. 자신 역시 련의 손끝에서 깨달음을 얻었지 않은가.
그 애의 움직임은 특별하다. 아직 열 살도 되지 않았는데도 벌써 그랬다. 미숙하고 어린 몸뚱어리인데도, 하늘에서 내려다보듯 답안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다른 사람이라면 그 불가해함을 꺼리고 다른 원인이 있을 거라고 추측하고 깨달음을 스스로 얻은 것이라 착각했겠지만 단목한소는 아니었다.
그는 듣기만 한 얘기는 흘려들어 다음 날 같은 얘기를 해도 새롭게 듣곤 했지만, 직접 눈으로 본 것은 결코 의심하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본 그대로 받아들였다. 자신에게 이 세상의 모든 일을 전부 이해할 재주가 있을 리 없으므로.
“그래도 때를 기다려야 하느니라.”
단목천기가 담담하게 말했다.
단목한소는 그런 단목천기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힘은 아주 느리게 하늘을 끌어내리고 땅을 갈아엎는다.
일이 끝나기 전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니, 대의를 논함은 그 이후가 적절할 것이다.
* * *
“단목세가 사람들과 그리 즐겁게 어울리실 줄은 몰랐습니다, 부인.”
금적걸이 조용히 말했다.
밤늦게까지 오늘 비무를 복기하던 금종하가 눈물 한 방울 비치며 잠든 것까지 확인하고 돌아온 송영랑이 금적걸을 보며 눈을 흘겼다.
“안 어울리면요? 평생 항주에서 그들과 전쟁이라도 하면서 사시려고요?”
“전쟁은 아니라지만.”
말은 아니라곤 해도 반쯤은 진짜 전쟁일 것이다. 지역을 두고 패권을 다투는 일이 아이들의 땅따먹기일 수는 없으니까.
“그럼 결국 죽을 때까지 부대끼며 살아야 할 사이 아닙니까?”
“어찌 그렇습니까.”
금적걸이 정말 몰라서 묻는 건 아닌 듯했지만 생각이 다소 복잡한 듯도 했다.
송영랑은 기꺼이 대답하기로 했다.
“우리도 항주에 이렇게 단단히 터를 잡았는데, 아무리 단목세가라고 해도 우리를 쓸어버리기 쉽겠어요? 어려운 일일 겁니다. 하지만 우리라고 해서 단목세가를 완벽히 몰아낼 수는 없을 것 아니에요.”
태상가주가 칩거하고 장남이 죽었을 때에도 해내지 못한 일이었으니 아마 앞으로는 더욱 어렵게 될 게 분명했다.
역사와 전통이 가진 저력이 이렇게 무섭다. 강산도 변할 시간 동안 숨죽여 있었는데, 단목천기가 한번 기지개를 켠 것만으로 온 절강성이 들썩거렸다.
“그렇겠지요.”
“그러니 어쩌겠어요? 기왕 부대끼며 살 거 사이좋게 지내면 즐겁고 좋지 않겠어요?”
다른 군소방파들은 그 정도 규모의 세가를 몰아낸다는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이 항주에서도 금가장이라서 한번 가락이나 잡아 본 것이다.
“그들이 우리를 그렇게 인정하겠습니까?”
송영랑은 부드럽게 웃었다.
“위지 부인을 보면 모르시겠어요?”
“그 사람이 유하다곤 해도 힘은 없는 내당주요. 실권은 외당주가 다 가지고 있지요.”
“그 외당주가 내당주 말이라면 내치질 못하는데 무슨 상관이겠어요?”
금적걸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송영랑이 까르르 웃었다.
“사람이 너무 아름답게 생긴 데다 성미가 도도하고 냉정하기까지 하니 주위에 벗이 얼마나 남아 있겠습니까? 시기하고 질투하고, 가만히 있는 사람 두고서 혼자 자격지심 느끼고, 그게 아니면 숭배하려고 들거나 뭐라도 어떻게 해 보려고 껄떡대고, 이게 전부였겠죠.”
그녀가 가진 장점은 모두 아름다운 외모에 묻혔을 것이고 그녀가 가진 단점도 외모 탓에 필요 이상으로 눈에 띄었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가문의 격변을 겪으면서 살아온 궤적이 어땠을지, 송영랑은 아주 잘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