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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69)화 (69/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69화

“내당주 그 사람은 그렇게 대하지 않았고?”

“그렇죠. 세가 일이라면 목숨 거는 외당주께서 위지 부인을 왜 잠자코 맞이하셨겠어요? 고아에, 가진 혼수라고는 제 한 몸이 전부인, 심지어 첫째 아이 낳기 전까지는 오늘내일하던 사람을.”

한 가문의 후계자가 맞이할 아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조건이긴 했다.

“그녀가 제 자식을 세가의 다음 후계자로 삼으려고 그런다 여겼지.”

“자기 오빠가 천하제일인이 되어서 세가를 부흥시킬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사람인데요?”

“사람의 욕심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지 않습니까.”

“하지만 자길 숭배하지도 않고 자길 어쩌려고 해 보지도 않고, 자신에게 열등감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자기 가족뿐이었던 사람인걸요?”

송영랑은 머리 장식을 빼며 종알거렸다.

“거기다 자기 실력도 스스로 제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

재능 넘치는 오라비와 남동생을 두고 끝없이 자신이 어디쯤인지 비교하고 가늠해 온 그녀만큼 스스로의 실력을 잘 알고 있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제 오빠 대신 죽을 수 있었다면 그랬을지도 몰라요.’라고, 송영랑은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어쨌든 그 사람에게는 위지 부인이 한 가족이면서 하나뿐인 벗일 테니까요. 위지 부인이 부드럽게 나오려고 하시면야 걱정할 것 없지 않겠어요?”

“서로 벗이라면, 외당주가 싫다 할 때 내당주께서도 그 말에 따르실 것 같은데…….”

“뭐 그렇기야 하겠지요. 전쟁 같은 걸 하게 되면요. 그렇지만 그땐 전쟁을 해야 하는 상황이지 않겠나 싶어요. 우리도, 그들도.”

송영랑의 결론에 금적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월영재 앞에 놓인 작은 등롱 옆에 앉아 있던 조그만 소년은 인기척을 느끼곤 자리에서 일어나 옷에 붙은 흙먼지를 툭툭 털었다.

“어? 륜아야,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어?”

“잠깐 나와 있었어요.”

오늘 금가장에 가는 길에 화륜은 동행하지 않았다. 같이 가겠냐고 물었더니—당연히 함께 간다고 할 줄 알았다!— 안 가도 되냐고 반문을 하는데, 거기서 ‘어? 어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련이 조르르 다가가자 화륜은 늘어지게 기지개를 한번 켜려다가 그만두곤 고개를 흘끗 기울여 련의 뒤에 서 있는 단목성을 쳐다보았다.

“성아는 나 여기까지 데려다주려고.”

단목성은 잠깐 망설이다가 련에게 빠른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오늘 고생 많았어. 난 돌아갈게.”

그러곤 화륜에게도 눈인사만 한번 하곤 성큼성큼 걸어서 돌아갔다.

“누이에게 뭔가 할 얘기 있었던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단목성은 아직 화륜과 낯을 가리는 것 같았다.

‘륜아는 다른 모든 사람하고 낯을 가리는 것 같지만.’

자신의 어머니인 위지청이나 유모 장 씨 정도가 아니면 거의 만나려고 들질 않았다.

단목천기는 물론이거니와 그간 단목한소와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피해다녔다.

“그렇지? 성아가 내일 다시 오려나.”

“금가장 갔던 건 어떻게 됐어요?”

“응, 둘이 비겼어! 그만하면 엄청 잘했지. 굉장했어!”

련은 팔을 휘저으며 오늘 본 단목성과 금종하의 비무를 이리저리 묘사했다.

생생하게 현장을 재현하다시피 한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화륜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밖에 안 했는데 그 정도면 확실히 재능이 있는 것 같아요.”

“그치? 그래서 계속했으면 좋겠는데, 고모는 성아가 검 쪽으로 가길 원하는 것 같아서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다.”

“누이는요?”

“나는 뭐?”

“도(刀)요. 계속은 안 해요?”

“나는 뭐…….”

련은 말끝을 흐리며 뺨을 긁적였다. 금가장에서 비무를 끝내고 돌아올 때, 단목한소는 그녀를 보고선 말했다.

‘그냥 하고 싶은 거 아무거나 하라고…… 그랬지.’

왜인지 련을 보는 눈빛이, 약간 질린 것 같은 기색이었다.

“계속 검을 잡을까 해.”

“왜요? 누이도 도에 재능 있지 않아요?”

“요 쪼끄만 게. 네가 그걸 어떻게 아냐?”

련은 화륜의 뺨을 삭삭 쓰다듬었다가 조금 차가운 것을 느끼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어떻게 알긴요, 남들이…….”

“너 밖에 얼마나 있었어?”

“네? 아까 잠깐…….”

“무슨 소리야, 뺨이 이렇게 차가운데!”

“그게 생각할 게 있어 가지고.”

“이 작은 머리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니, 오늘 혼자 집에 남아서 뭘 했는데?”

“그냥 있었죠…….”

련은 화륜의 손을 덥석 잡아끌고는 거처 안으로 달려갔다.

련의 침소를 정리하고 있던 유모가 갑자기 달려오는 련을 보고 깜짝 놀랐는데 그보다 먼저 련이 서둘러 말했다.

“유모! 난로랑 도라지 차 줘. 왜 얼마 전에 내가 만든 거 있잖아, 백약청. 그거 뜨거운 물에 타서.”

“예?”

“륜아 감기 걸리겠어. 계속 밖에 있었나 봐.”

“에, 에구…… 아기씨께서 만든 그거, 그거요?”

“응, 그거. 집에도 몇 단지 남겨 뒀잖아.”

금종하와 만났던 날 털어 왔던 도라지들로 약당에서 도라지청을 만들었다. 만든 것은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만송상단에 보내고, 남은 건 일단 남겨 놓고서 식솔들 먹게 하고 있었다.

련이 재촉하는 통에 바깥으로 떠밀려 갔던 유모가 련의 말대로 뜨거운 물에 백약청을 타서 가져왔다.

“에구구…….”

그러면서 동정심이 역력한 얼굴로 화륜을 쳐다봤다.

련이 씌워 준 담요를 머리부터 뒤집어쓴 화륜은 그런 유모의 표정에 고개를 갸웃했다가 도라지차를 한 모금 머금고 그대로 멈췄다.

“저런…… 몸에는 좋다고 하니까, 아니, 좋으니까…… 얼른 먹으렴.”

유모의 목소리가 몹시 애잔해하는 투였으므로 이번에는 련이 당황했다.

“왜, 왜 그러는데?”

화륜은 눈물을 조금 글썽하며 입 안에 든 걸 겨우 삼켰다. 그러곤 잠깐 입을 벌린 채 얕게 숨을 골랐다.

“거의 사약인 줄 알았어요…….”

“우와! 얘! 무슨 소릴 그렇게 해!”

“이거 만들고 드셔 보셨어요?”

“숙부가 맛을 봤는데.”

“기절 안 하셨대요?”

련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때 단목현우의 표정이 조금 창백하긴 했지만.

“하…… 하지만 몸에는 좋은 거야.”

련은 정말이라고 작게 덧붙였다. 화륜은 7년 치 삶의 회한이 담긴 눈으로 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눈가를 조금 훔치고는 남은 도라지 차를 다 마셨다.

* * *

다음 날 새벽, 련이 찻물을 뜨러 월영재 밖으로 나왔을 때 문밖에 상기된 얼굴의 단목성이 서 있었다.

단목성의 유모는 어떻게든 단목성에게 피풍의를 입히려고 애쓰는 눈치였는데, 단목성이 워낙 활기차게 걸어온 통에 그럴 기회를 잡지 못하고서 조금 뒤에 서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서, 성아야. 너 잠은 잤어?”

놀란 련이 물었는데 단목성이 딴소리하듯 대답했다.

“나 앞으로, 도의 길을 걷기로 했어.”

그 얘기를 나한테 하러 이 시간에?

련은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축하하기만 했다.

“우와…… 정말? 잘됐다! 그런데 너 잠은 잤어?”

“어제 밤새 고민을 했는데, 난 도를 배우고 싶어졌으니까 어머니한테 그렇게 말씀드렸어. 나한테도 재능이 있으니 금방 도의 극을 보고 검을 잡아서 외삼촌이 간 길을 걸어가려고 해.”

‘밤새 고민을 하고는 고모한테 말씀까지 드리고 여기에도 왔다고? 이제야 해가 떴는데?’

단목현요가 비몽사몽일 때 몰아붙이려는 단목성의 계획이었던 게 아닐까? 련은 잠깐 의심했다.

“너 잠 안 잤구나.”

단목성은 처음엔 자신이 도의 길을 가기로 했다는 사실만 담백하게 알려 주고 돌아가려고 했지만, 진지하게 말을 들어주는 련의 별빛 같은 눈동자를 보자 자기도 모르게 주절주절 늘어놓게 되었다.

어머니 단목현요와 마주해서 어떻게 얘길 했고 어떤 대답을 들었는지 늘어놓는 동안 단목성의 유모만 연신 울상이었다.

련은 들뜬 소녀를 이끌고 다시 거처로 들어가며 조용조용 소녀의 말을 들어 주었다.

“그래그래. 내가 너한테는 도에 재능이 있다고 했잖아.”

단목성은 자신의 허리춤에 찬, 어제 비무에 쓴 연습용 도를 자랑스럽게 툭툭 건드렸다.

“맞아. 그래서 내가 반드시 이 도 한 자루로 천하제일인이 되겠다고 어머니한테 맹세하고 왔어.”

“……!”

갑자기 천하제일인까지? 하지만 련은 여기서 어설프게 머뭇거리지 않고, 빠르게 성을 추켜세웠다.

“그래, 우리 힘내자! 네가 단목세가에서 유일하게! 도로 일어선 천하제일인이 되는 거야!”

단목한소는 대단한 고수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천하제일인까지는 아니다.

“그래. 내…… 내가 천하제일인이 되면 련아 너도 잘 돌봐 줄게. 어제도 말했듯이 나만 믿으면 돼, 련아.”

단목성의 눈동자가 진지한 가운데에 약간의 쑥스러움을 담고 있었다.

항상 차가울 정도로 도도하게 굴다가 이런 말을 하기가 민망한 모양이었다.

련은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단목성을 잡아끌었다.

“그러려면 이 도라지 차를 먹고 힘을 내서 잠부터 자야 해.”

“응? 아니, 난 당장 수련을…….”

“잠을 잘 자야 수련을 잘할 수 있어.”

련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침상에 단목성을 끌고 와서 도라지청을 물에 희석한 차를 먹인 뒤—단목성은 그 맛에 정말 놀랐는지 기침까지 했다— 눕히고선 이불까지 덮어 준 다음에, ‘자고 일어나서 천하제일인이 되자.’라고 달래 주며 토닥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날밤을 꼬박 지새운 단목성이 어렵지 않게 까무룩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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