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71화
“그렇게 기깔 나게 캐 온 약초는 또 오랜만에 보았습니다. 히야, 아기씨께서 고용한 분이라고 하셨지요? 정말 안목이 대단하십니다.”
“옛날에는 우리 약당에도 그 정도 되는 약초 많았어?”
“예에, 몇십 년 전에는 이쪽에도 약선문이라고 큰 문파가 있었거든요. 말하자면 서쪽의 사천당문처럼요. 그네들이 약초꾼도 키우고 의원도 키우고 약초밭도 크게 가꾸고 해서 좋은 약재 구하기가 그렇게 어렵지가 않았는데…….”
근처에 한 분야의 대가가 있으면 주위도 그 시혜를 받기 마련이다. 하지만 호시절도 간 지 오래라며 풍소강은 잠시 씁쓸해했다.
“그래도 어째 아기씨께서 이렇게 대단한 약초상을 구해 오셔서 잘된 일이지요!”
“그런데 만든 도라지청 맛이 이래서 어쩌지?”
“누가 약을 맛으로 먹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약당주님?”
“그렇지, 그렇지!”
단목현우가 손뼉까지 치면서 찬동했다. 련은 그런 두 사람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한 사람은 날 너무 아끼시고, 한 사람은 아무래도 쓴소리해 주기 부담스러운 입장이라 어쩔 수 없겠네. 륜아에게 다시 물어봐야겠어.’
묘하게 냉철한 구석이 있는 소년이 객관적으로 말해 주는 건 그래도 ‘우리 조카가 만드는 건 다 괜찮지!’인 숙부의 의견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할아버지가 이번에 만든 건 화산에도 보내자고 하셔서 청련수 챙겨다 같이 보내려고요.”
보내는 건 세가의 유성표국을 통해 보낼 예정이었다.
한때는 흔적만 남아 있던 표국이었으나 청련수 유통의 아주 일부만이라도 담당하게 되면서 전보다는 세력이 조금 커졌다.
‘표국을 좀 더 키워야겠다.’
상업의 끝은 유통 아니겠나?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표사 일을 할 무인을 꾸준히 훈련시켜 공급해야 하고, 그 표사들이 할 일도 지속적으로 따 와야 한다.
그 꾸준한 것 중에서도 제일이라는 공물을 운송하는 일은 황실과 연줄이 없으면 따내기가 어렵고, 미곡 운송은 흔적만 남은 유성표국으로서는 감히 엄두도 내기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 청련수 공급 규모 정도에만 맞춰서 표국을 확장할까?’
그러려면 먼저 만송상단과 얘기를 해야 할 것이다.
청련수의 판매 금액을 생각하면 만송상단에서 거절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으므로, 련은 일단 생각을 갈무리했다.
청련수와 도라지청을 표국 쪽으로 넘길 준비를 마무리 지을 무렵.
옆을 올려다본 련이 고개를 갸웃했다.
도라지청을 만들 때부터 표정이 조금 어두웠던 단목현우였다. 지금도 심란한 데가 있듯 눈동자가 깊었다.
“숙부, 무슨 고민 있어요?”
단목현우는 깜짝 놀라서 펄쩍 뛰었다.
련은 단목현우의 주위를 기웃거리다가, 항상 들고 다니는 부채를 살살 흔들었다. 청량한 공기가 주위를 감싸기 시작했다. 정화의 효과였다.
“고민은 무슨. 나는 우리 련아가 깨어난 뒤로는 아무 고민이 없어진 사람인데.”
단목현우가 으스대듯 말했다. 장난기 넘치는 말투에 반론의 여지가 없다. 련이 입술 끝을 오물거리는 사이에 단목현우가 말을 돌렸다.
“아! 백약청에는 련이 네가 작은 서신이라도 써서 동봉하면 어떻겠니? 받는 분들도 기뻐할 것 같구나.”
“네, 좋아요!”
련은 단목현우가 마련해 준 종이에 금방 글자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한다.
만송상단의 견언조에게도 한 단지 보낼 생각이었다.
— 날이 차가워지면 따뜻한 물에 풀어 드세요. 언제 찾아뵈어 청련수 운송으로 드릴 말씀이…….
거기까지 썼던 련은 종이를 태워 버리고 다시 썼다.
— 날이 차가워지면 따뜻한 물에 풀어 드세요. 맛은 쓰지만 몸에는 좋을 거랍니다.
‘표국 일은 위운 고모랑 얘기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만송상단 상단주인 견언조가 일을 맡아 준다면야 확실하게 처리해 줄 테고, 자신이 그걸 견언조에게 부탁하는 것도 이상한 모양새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가 견위운을 통해 일을 진행하게 되면 청련수의 매출만큼 그녀에게 힘을 실어 주는 것과 동시에, 견위운 역시 그녀를 위해 기존의 표국과 거리를 둬야 하니 그 뒤엔 그만큼 계속해서 단목세가의 표국을 쓰게 되지 않겠는가?
련은 생각을 마치곤 그다음에는 호선의각 약초당의 종 의원에게 서신을 썼다. 그쪽에도 한 통 보낼 참이었다.
— 그때 선물받은 도라지로 만든 것인데 고마운 마음에 한 단지 보내.
사실 그때 받은 도라지는 이미 다 쓰고, 이번 도라지청은 약여청의 도라지로 만든 거지만 말이나마 그렇게 했다.
섬서의 화산파에도 서신을 썼다. 그녀의 의붓외숙부인 청윤은 아직 폐관 수련 중이라, 아마 그의 사부인 화산파 장문인이 받게 될 터였다.
— 소녀 단목련, 청윤 도사님의 염려 덕분에 완쾌하여 작게나마 직접 만든 조그만 백약청을 보내옵니다.
‘도움을 주셔서’라고 썼다가 이 서신이 잘못 새어 나가서 혹 청윤의 내공 유실이 알려질까 봐 저어되어 돌려 쓴 것이다.
그리고 잠깐 고민 끝에 북경의 견위학에도 따로 보내기로 했다.
지금 청련수의 대호황은 그가 만들어 준 부분이 있다.
— 위학 숙부, 회시도 힘내세요. 제가 직접 만든 백약청이에요.
련이 거기까지 썼을 때, 곁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단목현우가 들릴 듯 말 듯 하게 웅얼거렸다.
숙부는 자신인데 왜 련이 남을 숙부로 불러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웅얼거림이었다. 련이 배시시 웃자 단목현우는 조금 창피해졌는지 헛기침하며 눈을 피했다.
* * *
단목현우의 거처 앞에는 아주 조그만 연못이 하나 있다.
거기엔 그가 어렸을 때 선물 받은 잉어가 한 마리 있는데, 그가 오래도록 폐관 수련을 하고 가세가 기울어져 가는 동안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아서 잉어는 죽진 않았으되 색이 거무죽죽했다.
련은 그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연못 쪽으로 부채를 살랑살랑 부쳐 주었다.
그간 련이 오며 가며 물을 정화해 주었더니 물은 맑아지고, 잉어의 눈에도 점점 생기가 감돌고 있었다.
요즘은 련이 연못가에 오면 잉어가 꼬리를 움직여 물방울을 튕기곤 했다.
“숙부는?”
“잠시 약당에 들르셨대요.”
단목현우의 거처 하인에게 말을 묻고 돌아온 화륜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련은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은 피리 수업을 하는 날인데 단목현우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숙부가 약당에? 왜? 청련수나 백약청 만드는 날도 아닌데.”
잠깐 고민하던 화륜이 대답했다.
“다치신 것 같아요.”
“뭐?!”
련이 펄쩍 뛰어오르며 화들짝 놀라자 화륜이 얼른 다가와 그녀를 붙잡았다.
“잉어랑 같이 목욕이라도 하고 싶어요?”
“숙부가 다치다니? 어디를?”
“그렇게 심한 건 아니지 싶은데.”
“문영이 그래?”
문영은 단목현우의 하인 이름이다. 그는 말수가 적고 성격이 신중하여 허언은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화륜은 일단 련을 끌어당겨서 연못에서 몇 걸음 멀어지게 한 다음 말했다.
“그건 아니고요. 약당에 가셨다고만 했는데 느낌이 그래요.”
“그래? 우리도 약당 가 보자.”
“금방 오실 테니 여기 있으라 하셨다는데…….”
문영이 굳이 단목현우의 곁에 있지 않고 거처에 남아서 그들에게 말을 전할 정도면 심한 상처는 아닐 것 같았다.
그러나 단목현우가 세가 한가운데에서 대체 뭘 하다가 다쳤단 말인가?
“그럼 도중에 만나면 되겠지.”
“에이. 괜히 말해 줬네.”
련의 얼굴을 흘끗 본 화륜이 투덜거렸다. 련은 바삐 걸음을 옮기면서도 화륜을 흘겨보았다.
“괜히 말해 줬다니, 무슨 말이 그래.”
“누이 얼굴이나 보고 말해요. 새파랗게 질려 가지고.”
련은 자신의 뺨을 더듬거리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약당에 들어서자 안이 분주했다. 오가던 사람들이 련을 알아보곤 얼른 인사하려고 했지만 련은 손을 저어 물리고 단목현우를 찾았다.
“숙부!”
“어? 련아야, 왜 여기 왔어?”
손에 붕대를 감고 있던 단목현우가 련을 보곤 벌떡 일어났다.
“아이고.”
그 앞에서 붕대를 감던 의원이 앓는 소리를 냈지만 단목현우는 붕대를 휘날리며 련에게 다가가다가 얼른 손의 상처를 등 뒤로 감추었다.
“숙부! 다쳤다면서요.”
“아니, 아니다. 누가 그래?”
“어쩌다가요?”
련이 변명을 들어줄 표정이 아니라는 걸 안 단목현우는 슬쩍 어깨를 움츠렸다.
“새벽에 수련을 하는데 손아귀에서 검이 미끄러졌지 뭐냐.”
련은 손을 내밀었다. 단목현우가 조금 망설이다가 슬그머니 자신의 손을 건넸다.
련은 양손으로 단목현우의 손을 붙잡았다. 굳은살이 잔뜩 박이고 생채기가 흉으로 남은 커다란 손, 붕대로 반쯤 가렸지만 생각보다 깊은 상처가 엿보였다.
대련을 하다가 섣불리 막아선 것도 아니고 혼자 훈련을 하면서 칼이 거기까지 미끄러져 손을 다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단목현우는 조카 앞에서 추태를 보였다는 생각에 머쓱한 듯 손을 비틀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 숙부는 정말 괜찮단다.”
련은 숨을 크게 들이켜며 그 손을 놓아주었다. 의원이 얼른 달려와 처치를 마무리하는 동안에도 단목현우는 련과 눈을 마주하고 웃어 주려고 애썼다.
련은 알았다.
단목현우의 심마가 아직도 그의 마음을 움켜쥐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