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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72)화 (72/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72화

* * *

피리 수업은 흐지부지되었다. 련은 단목천기와 함께하는 오후 수업도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여 단목천기에게 꾸중을 듣고 말았다.

단목천기도 련이 왜 그러는지 알기에 크게 혼을 내지는 않았지만.

‘난 이제 정말 멀쩡한데 숙부는 왜 아직도…….’

지난 생에도 그랬다.

그녀가 기억하는 마지막까지 단목현우는 심마를 떨쳐 내지 못했다.

사람 마음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거야 알지만서도 가슴이 아팠다.

“……저요, 이번에 새로 배운 게 있는데요.”

침상에 엎드려 있던 련은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조그만 깃털 장식을 가지고 고양이 백련과 놀아 주던 화륜이 툭 던지듯 말했다.

련은 화륜이 자신을 염려해 주의를 돌리려 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으응? 새로 배우다니? 누구한테 뭘 배웠어?”

“재경각에 초일이란 아저씨 있잖아요.”

련은 잠깐 탄식을 흘렸다. 각주 설관희의 잡무를 도맡아 하는 초일은 이제 스물이나 되었을까 하는 사람이었다.

‘아저씨라고 불릴 나이는 아닌데…….’

“그 사람한테 뭘 배웠는데? 혹시 주판 같은 거 배웠어?”

“……아뇨.”

화륜은 련이 지나치게 반색하며 물어보는 기세에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아, 그래? 난 그냥 주판도 배워 두면 쓸모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재경각에 있는 초일 그 사람이 주판을 그렇게 잘 튕겨서 설 각주가 데려온 거라고 했거든. 이게 거의 신이래, 신.”

련이 손끝 튕기는 시늉을 했다.

“그래서 그런 재주만 있어도 나름 유사시엔 쓸모가 있지 않을까 하고.”

“…….”

“왜, 왜 말이 없어?”

화륜은 그런 련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한껏 진지해진 표정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곤 자신의 머리를 헤집었다.

그러곤 무겁게 말했다.

“들어오는 하인마다 뭐 다 자식 키우듯이 해 주려고요?”

“얜 또 뭐래.”

“건방지게 굴어도 혼도 안 내고요?”

“동생이 이거 했어요, 저거 했어요 하는 걸로 누가 그러냐?”

“진짜 동생도 아니잖아요.”

“서운하다, 야…….”

“장난치지 말고요.”

“나도 장난 아니야. 왜 갑자기 진짜 동생도 아니라고 하고 그래?”

“아니 뭐 저랑 누이가 피가 이어졌어요? 아니면 제가 뉘 집 자식인지 알길 해요?”

“피가 이어져야만 가족이야? 가족이라고 정하면 가족이지. 그럼 우리 어머니 아버지도 남이게? 우리 어머니도 고아이고 아버지랑은 피도 안 이어졌는데?”

“피가 이어졌으면 아예 결혼을 못하잖아요! 그건 경우가 다른 거고요!”

“아니면…… 아!”

거기까지 말하던 련은 뭔가 깨달았다는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눈에서 별빛이 거의 쏟아질 것처럼 와르르 일어나 반짝반짝 빛났다.

“너 단목세가로 들어오고 싶어? 그래? 좋아! 그럼 그러자. 나도 대찬성이야.”

“이…… 이게 또 무슨 얘기야. 혼자서 또 어디까지 갔어요!”

“진짜 가족이 아니라며? 그럼 이제 진짜 가족 하자. 우화륜이 예쁘긴 한데 단목화륜도 괜찮은 것 같다. 나도 말로만 가족이라고 할 게 아니라…….”

“악! 안 돼요! 안 돼!”

련이 자리를 박차고 바깥으로 반쯤 나갔다.

문이 벌컥 열리고 정원에 심긴 금목서 향기가 확 몰아쳤다. 처소의 울타리에 있는 협문을 지키고 서 있던 정영이 의아한 얼굴로 그쪽을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누이, 아니, 아기씨, 들어와요, 제발!”

화륜이 거의 기절할 것처럼 굴었기에 련은 애써 부푼 가슴을 가라앉히고 다시 안으로 돌아왔다.

화륜은 기가 질려 떨리는 손으로 문을 닫고는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대체 어디로 뛰어가려고 했는데요……?”

“어머니한테.”

“무슨 얘기 하려고요?”

“너 양자 입…….”

“악!”

“왜, 왜 비명을 질러.”

“진짜 하지 마요.”

“대체 왜?”

련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화륜을 쳐다보았다.

“우리 세가가 좀 망했었다곤 해도 이제 돈 많이 번 거 너도 알잖아. 우리 비아도 착하고 어머니도 차별할 분 아니야. 그리고 진짜 냉정하게 말하면, 어머니가 차별하는 사람이어도 너 이거 하는 게 좋다니까.”

련이 마치 장사꾼이 물건을 팔기 위해 속삭이는 말투로 말했다. 화륜이 기함했다.

“죽겠다 진짜.”

“내가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야. 알지?”

“알아요, 아는데요…….”

“난 네가 우화륜이든 금화륜이든…… 아니, 금화륜은 좀 그렇고. 뭐 선화륜이든 주화륜이든 다 상관없지만…… 사람들은 그래도 단목화륜이라고 하면 좀 더 잘해 주긴 할 거라고.”

“그것도 알아요. 무슨 얘기 하시는지 다 알아요.”

“근데 대체 왜 싫어!”

“소가 물을 마시고 말고는 사람 맘대로 안 되는 거예요. 소 마음이지.”

“그 소가 왜 그렇게 물을 마시기 싫을까? 응?”

“목이 안 마르는가 보죠.”

“난 진짜 이해가 안 돼…….”

“누이한테 좋은 거라고 남한테도 다 좋은 건 아녜요.”

련은 탁상에 엎어졌다.

“그럼 대체 왜 갑자기 이상한 얘길 꺼낸 건데?”

“바로 정확하게 이러지 말라는 얘기를 하려고요!”

“이러는 게 뭐야.”

“길 가다가 본 불쌍한 애들 다 주워서 아들처럼 키우는 거요!”

“안 주워.”

“저는 주웠잖아요!”

“너는 너니까…….”

화륜은 갑자기 숨이 막힌 얼굴로 련을 쳐다보았다.

련이 쭈뼛거리며 말해다.

“나 사실…….”

“…….”

“재능 있는 애들이 좀 보여. 알아볼 수 있어.”

“뭐……? 뭐라고요?”

“너 재능 있어. 정말이야. 내가 성아도 도 잡으면 되겠다고 딱 알아봤잖아.”

“그래서 제가 재능이 있어서 데려왔다고요? 뭐, 뭐에 재능이 있어서요?”

“너 무공에 재능 있어. 진짜. 엄청.”

화륜이 펄쩍 뛰었다가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럼 쓸모가 있어서 데려온 애를 왜 그냥 놔두고 있어요? 무공 배우라고 명령이라도 하든가…….”

“아니, 네가 하기 싫다며? 하기 싫다는 걸 하게 해서 뭐 해?”

“그래서 계속 무공 배워 볼래, 하고 권하기만 하다가 요즘엔 뭐 다른 거 해 보라고 하는 거고요?”

“그렇지. 다양한 탐구 활동을 통해서 네가 적성에 맞는 장래를 찾아가면…….”

“이게 안 된다는 거예요.”

“뭐, 뭐가?”

화륜의 앳된 얼굴 위로 마치 사회인의 회한 같은 짙은 피로가 묻어났다. 그가 탄식하듯 말했다.

“그렇게 뭐 아무거나 퍼 주고 관심 주고 그러는 게 애들 버릇 다 망친다고요.”

“넌 만났을 때부터 좀 망쳐져 있어서 괜찮아.”

“나 말고요! 나 말고!”

“너 말고 누구?”

“나 말고 앞으로 또 하인을 들일 거 아니에요. 그때요. 하인한테까지 이렇게 잘해 주면 안 된다고요.”

“내가 너한테 잘해 주는 걸 알긴 해? 난 모르는 줄 알았다.”

“지금은 아닌 거 같아요. 제발 내 말 좀 들어주면 안 되냐고요.”

“듣고 있어. 난 그리고 진짜 천 번 말했다. 안 그런다고.”

“아, 예. 제가 재능 있어서 데려온 거라고 했죠? 그럼 앞으로 저보다 재능 있는 애 아니면 데려오지 마요.”

“뭐?”

련은 눈살을 찌푸렸다.

‘마천교 소교주가 될 만한 재능을 가진 애가 또 있을까?’

“뭐야. 나 그럼 평생 하인 너 한 명인 거야?”

“……아니…… 그. 아니, 어쨌든 그러면 저도 비파에 칠현금에 뭐야, 그 주판도 배울게요.”

“……진짜?”

“대신 무공은 진짜 기초만, 누이가 직접 가르쳐 주세요.”

“어? 나보단 할아버지나 숙부가 더 잘 가르쳐 줄 텐데…….”

화륜은 고개를 흔들었다. 싫다는 티가 너무 격렬해서 련도 더는 권하지 않았다.

“알았어, 알았어. 그런데 그럼 초일한텐 뭘 배웠던 거야?”

“…….”

“…….”

화륜은 왠지 맥이 빠지고 기운이 없는 얼굴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갑자기 왜 이렇게 또 축 처졌어?”

“몰라요. 기분이 내 맘대로 안 돼요.”

“원래 사람 마음이 좀 그런 거긴 해.”

화륜은 다시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초에 불을 켜곤, 병풍 앞에다 대고 손을 요리조리 움직였다. 새 모양의 그림자가 다소 기운 없는 형상으로 펄럭거렸다.

“아…… 이거 배웠어? 아니, 이런 거면 나한테 배우러 왔어야지!”

“네?”

“이 누이가 딱 보여 준다. 잘 봐.”

그러곤 련의 휘황찬란한 그림자 행진이 펼쳐졌다. 강아지가 짖는 것 같더라니 말로 변했고 말은 다시 염소로 바뀌었다.

“이건 뭔지 알아?”

련이 두 손을 모아 검지끼리 맞대고 한쪽 엄지만 펼쳤다.

“주전자!”

“오…….”

그때까지는 다소 시큰둥했던 화륜이었으나, 련이 차례로 횃대 위에 앉은 새, 달리는 토끼, 부드럽게 움직이는 백조, 뿔이 큰 사슴, 기어가는 달팽이까지 선보이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떠냐?”

“와. 이건 진짜 좀. 이런 거 처음 봤어요.”

“당연하지. 공간 지각 능력과 추리력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고급 기술이라고. 이런 걸 어디 가서 보겠니?”

련은 와하하 웃으며 다시 손으로 찻주전자를 만들어 기울이는 시늉을 했다.

“한잔 드세요, 륜아 도련님~!”

“네, 네. 잘 마시겠습니다.”

“잔 모양으로 만들어서 받쳐야지.”

“아 알겠다고요.”

“빨리 안 마시면 주전자는 새가 돼서 날아갑니다!”

“사천 출신이에요? 성격 왜 이렇게 급해요?”

“사천은 내 예전 약혼자가 사천성에 있고. 아아, 날아갔다! 날아가 버렸다. 륜아는 이제 차 없다.”

“조금 전엔 도련님이라더니. 약혼자도 있었어요?”

“너 도련님 하고 싶어? 그럼 입양…….”

“아니, 아니, 아니! 됐어요. 도련님 하기 싫으니까 그러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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