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73화
한참 티격태격하면서 손가락이 아려올 때까지 그림자놀이를 하다가 엎어졌다.
잠깐 자연스러운 침묵이 감도는 사이에 련은 의자에 널브러진 화륜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괜히 미안해져서 화륜의 머리카락을 한껏 헤집었다.
화륜은 실컷 놀고서는 괴롭힌다며 투덜거렸지만 평소와 달리 련의 손을 내버려 두었다.
“넌 아무 걱정 안 해도 돼.”
“걱정 안 하는데요.”
“넌 정말 귀여워서 다행이다.”
“뭐라고요?”
“안 그랬으면 꿀밤 백 대다 진짜.”
련은 꿀밤 때리는 척을 하다가 화륜의 머리카락을 삭삭 가다듬어 주고, 그의 두 손을 붙잡았다.
처음에는 거칠고 말라 작기만 하던 손이었는데 어느새 조금 길어지고, 좀 더 부드러워졌다.
‘에휴. 내가 동생들한테 걱정까지 끼쳤네.’
련은 마음을 다잡았다.
자신을 위해서도, 자신을 걱정하는 아우들을 생각해서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단목현우 당사자를 위해서라도 지지부진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전부 한 방에 해치운다!’
* * *
월영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차 따르는 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련은 정제한 영기를 담아 찻잔을 내밀었다. 단목천기는 눈을 감고 차향을 음미했다.
단목천기의 얼굴에 번진 흉터들은 여전했지만 그는 한결 더 편해 보였다.
“계속 도를 잡고 배울 줄 알았거늘.”
“성아가 비무 하기 전까지만 같이하기로 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흥. 하다가 재미가 있어서 그리로 갈 줄 알았지. 자매가 나란히 배우니 즐겁다 어쩐다 하면서 말이야.”
련은 단목천기의 뾰족한 말을 듣곤 방긋 웃었다.
“할아버지한테 검을 계속 배워야죠. 제일 재미있는 건 검이니까요!”
조부의 투덜거림을 조금 달래 준 련은 무릎 위에 펼쳐 둔 부채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단목천기
특성 : 무림을 지킨 / 힘줄 수집가 / 비익조 / 별의 궤적을 본
낙성십이검 : 12성
무한보 : 12성
유성진결 : 11성
자질과 오성 : 상-중 (上-中)
고민 : 단목련의 힘, 자신의 의무
도움말 : 이젠 시간이 충분합니다. 무엇이든 조급해하지 말 것.
련은 이제 슬슬 이 정보가 모든 걸 알려 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조금 더 온유해진 단목천기의 기도, 중후해진 그의 내기도 알려 주진 않는다.
‘내가 직접 생각해 내야 한다는 거겠지.’
“내년 봄, 경항운련에 참석하기 전에 세가에 방계 아이들을 불러들일까 한다.”
“네, 얘기 들었어요.”
그동안 세가 사정이 어려웠다 보니 방계 아이들을 받아들여 교육하고 훈련하는 일도 미루어 왔다.
“설 각주가 미주알고주알 떠들든?”
단목천기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묻는 말에 련은 찻잎 상태를 들여다보며 대꾸했다.
“다 제 돈인데 당연히 저한테 얘기해야죠. 누구한테 얘기하겠어요?”
“세가 약당에서 만든 물건을 판 돈이지 않으냐?”
“그럼 재료비만 세가에 남기고 남은 건 제가 다 가질까요?”
“그러겠느냐?”
련은 장난스럽게 되물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진지한 대답이 돌아왔다.
련은 조금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단목천기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네가 가지거라. 네가 번 돈이니까. 그게 옳다.”
련은 단목천기의 생각을 알아챘다.
“지금 그 돈 때문에 나중에 저를 가주로 만들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올까 봐, 그게 걱정되세요?”
“…….”
련의 대꾸를 들은 단목천기의 눈빛이 심후해졌다.
련이 번 돈으로 허물어진 장원을 수리하고, 지금껏 세가에 충성해 온 이들에게 보수를 지급하고, 이제는 미뤘던 방계 아이들에 대한 교육도 시작하려 한다.
련의 도움 덕분에 단목천기가 부상을 떨치고 일어났고 유성도 단목한소가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으며 다른 손녀인 단목성까지 자리를 잡았지만 이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이었다.
“제가 저 가주 안 시켜 주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울고불고 떼라도 쓸까 봐요?”
련은 스스로 말해 놓고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단목천기는 그런 련을 보며 타는 속을 다스리려 애썼다. 그때 련의 눈동자가 잠깐 먼 곳을 향했다 돌아왔다.
“아니구나. 나중에 제게 세가를 물려주셨을 때, 제가 제 돈 덕분에 가주가 됐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봐요?”
단목천기는 부정도 하지 못하고 말을 잇지도 못했다.
련의 능력을 알았고 마음이 기울었으나, 멀리 내다볼 수 있는 사람은 높은 곳에 올라간 사람뿐이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에겐 그들 가까이에서 빛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 빛이 바로 무공이었다.
“……제 영기를 어떻게든 해 보자고 하시지 않았어요?”
단목천기가 침음성을 흘렸다.
“그런데 만에 하나 그러지 못했을 때, 그게 걱정이 되세요?”
“……그래.”
“그럼 제 돈을 제가 다 회수하면 새 제자 모집은 무슨 돈으로 하시려고요?”
“돈이야…… 돈이야 어디서든 나오게 되어 있느니라.”
“지금까지 풍림전장에 손 벌리지 않았으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좀 빌려 보시려고요?”
“……그래.”
가세가 허물어져 가는데도 딸의 시댁을 통해 도움받을 생각을 하지 않은 건 그 도움으로 길을 열어도 갈 곳이 보이지 않아서였다.
단목천기는 그간 자신이 좌절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갈 길이 보이지 않으면 스스로 불을 밝히고 길을 찾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못했던 것이다.
한때 천하제일인으로 손꼽혔으나 부상조차 이겨 내지 못한 것이 억울하고 예전만큼 할 수 없는 지금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무림을 위해 희생된 아들이 잊혀 가는 것을 보면 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 그래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아서 뭐라도 하려고 애쓰는 딸을 방관한 채 여기까지 왔다.
손녀딸이 발판을 마련해 주었으니 디디고 올라가는 것은 스스로 함이 마땅했다.
자신은 아직 단목천기, 이 단목세가의 태상가주 아니던가.
련은 그런 할아버지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눈을 내리깔았다.
“할아버지.”
“오냐.”
“할아버지가 저한테 주셨잖아요. 만년지극혈보요. 그 값이에요.”
“건방진 소리 마라! 손녀에게 쓴 약값을 돌려받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이냐?”
“유성도께서도 내공을 유실하셨지요? 그거야말로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건데.”
“그건 그에게 감사 인사를 할 일이지. 그리고 넌 모르겠지만 그도 네 덕에 한계를 넘어섰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련은 웃기만 했다.
“그건 그냥 그분이 대단한 무림인이셔서 그런 거잖아요.”
“그럴 리가 있느냐.”
“그보다 그분이 왜 말도 제대로 못해 본 저한테 그렇게까지 해 주셨을지 생각해 봤는데요.”
이유는 하나뿐이다.
그가 단목천기에게 충성을 다하기에, 단목천기가 사랑하는 단목세가를 그 역시 사랑하기에.
“부귀영화에도 관심이 없으시고 남들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도 관심이 없으시고, 단목세가가 잘되기만 바라는 분이시더라고요. 그럼 단목세가를 잘 꾸려 가는 것으로 보은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했어요.”
그저 단목세가를 사랑하는 단목천기에게 충성했기에 주군의 손녀를 한번 일으켜 세워 보려고, 천금을 주어도 바꿀 수 없는 자신의 시간을 선뜻 내놓기로 했던 단목한소.
지난 생에 그는 후회했을까?
깨어났으되 스물을 겨우 넘겨 요절했고 그때까지도 병자 신세를 면치 못했던 단목련을 보면서.
자신의 내공이 그 병자의 혈관 속에서 덧없이 스러진 걸 보면서…….
련은 우울해지려는 마음을 애써 떨쳤다. 그건 이미 사라진 과거다.
“……련아야.”
“방법이 있을 거예요. 방법이 없어도 만들어 내려고 해요. 걱정하지 마세요.”
련은 왠지 공기가 무거워진 것 같아서 얼른 말을 돌렸다.
“그보다 할아버지, 제가 돈을 많이 들였으니까요. 방계 아이들을 뽑을 때 제가 몇 명 골라도 되나요?”
“네가 직접?”
방계 아이라도 전부 세가의 무림인으로 받아들이진 않는다. 자질과 근성을 확인한 후에 뽑아 가르치는 것이다.
해서 련은 상태 창으로 보고서 자질이 뛰어난데도 묻힌 아이가 있으면 골라낼 셈이었다.
‘말하고 보니까 낙하산 인사 청탁 같네.’
돈 좀 주고 내가 원하는 사람 몇 명 꽂아 넣는 그런 것.
련이 아홉 살 되도록 자리보전만 한 병자가 아니었다면 정말 그럴 뻔했다.
“세가의 동량이 될 제자들을 뽑는 일이다. 네 친구 삼을 아이를 뽑는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겠지?”
“당연하죠. 할아버지, 돈을 직접 번 사람은요, 그걸 허투루 쓸 수가 없어요.”
사실 열심히 돈을 번 만큼 보상 심리가 발동하여 아무 데나 펑펑 쓰게 되기도 하지만, 이 세가를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서인지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네가 무가의 아이지 어디 상방의 아이더냐? 어디서 그런 말을…… 어휴.”
련이 으스대며 하는 말에 단목천기는 혀를 차며 꾸중을 하려고 했지만 결국 웃고 말았다.
“약속이에요!”
“알았다, 알았어.”
“그리고요.”
“또?!”
“이제 아이들이 들어오면 가르칠 교두들이 필요하잖아요. 그거요…….”
련이 몸을 기울여 작게 소곤소곤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