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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74)화 (74/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74화

* * *

심마(心魔).

내면에 감춰 두었던 암흑이 고개를 들고 찾아들거나, 아니면 칠흑 같은 번민이 마음을 휘감을 때 이를 이르는 말이다.

보통은 한번 심마에 들면 오래지 않아서 결판이 난다.

내면의 악이 드러난 경우는 무림악적이 되어 쫓길 것이고 그게 아니면 주화입마에 빠져서 폐인이 되거나 손에서 무기를 놓게 되든가 하는 것이다.

단목현우의 경우는 후자였다. 심법이 안정되지 못해서 내공도 많이 쌓지 못했고 집중하지 못하니 손끝도 흔들려 사달이 난다.

몇 년이나 폐관 수련 했는데도 제대로 이겨 내지 못했다.

‘그야 조카를 산송장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련은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연못을 내려다보았다. 바로 바닥까지 훤히 보일 정도로 수정같이 깨끗해진 연못 안에서 슬슬 몸이 하얘지는 잉어가 기분 좋게 꼬리를 찰랑거렸다.

단목현우 처소의 연못 속 잉어였다. 흑월—봉황이 되어서 떠난 오골계— 일로 련 역시 충분히 경계를 하고 있기에 직접 먹이를 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물을 맑게 해 준 것만으로도 잉어는 활력을 되찾고 많이 영민해졌다.

‘역시 건강한 육신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겠지.’

심마라는 게 말은 어려워도 결론을 말하자면 마음의 번민이라는 것인데, 이런 상태에서 혼자 어두컴컴한 곳에 박혀 자신이 조카를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꼴로 만들었다는 생각만 거듭하니 이게 나을 리가 있나?

건강한 육체는 일단 사람과 만나야 하고 대화를 해야 한다.

원인을 피하지 말고 적절한 운동과 수면, 균형 잡힌 식사도 함께.

‘그리고 환경 변화.’

사람의 결심과 마음가짐만큼 나약한 것도 없다. 그러니 물리적인 환경부터 바뀌어야 한다.

이미 많은 게 바뀌긴 했다. 단목현우도 처음 만났을 때보다 많이 밝아졌다.

하지만 이걸론 아직 부족했다. 단목현우는 폐관 수련 들어가기 전부터 이미 약당주였고, 그때 이미 단목련과 단목비라는 조카가 있었다.

즉 실상은 주변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말이다.

“련아! 오늘은 피리 수업도 없는 날인데 어찌 왔느냐?”

요즘 단목현우는 조카를 보기만 하면 싱글벙글했다.

“숙부!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나한테 부탁을?”

단목현우가 련을 번쩍 안아 올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련은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이번에 방계 아이들 받는다는 얘기 들으셨어요?”

“그래. 그걸로 누이가…… 네 고모가 바쁘더구나.”

단목현우가 조그맣게 툴툴거렸다. 단목현요가 요즘 신이 나긴 했다.

“그 애들 오면 가르쳐 줄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그렇지. 세가에 교두들이 있단다. 유성십팔숙 예비대에서도…….”

“숙부가 그 아이들 무공을 가르쳐 줄 수 있어요?”

단목현우가 조금 놀라서 눈을 떴다.

“응? 내가? 나보다는 교두들이 잘 가르치지 않겠느냐?”

배워서 잘하는 것과 남을 잘 가르치는 건 전혀 다른 일이고, 명문 세가들은 모두 가문의 무공을 가르칠 교두를 따로 둔다.

세가의 무공을 익힐 방계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도 그런 교두들이 담당하는 일이었다.

“할아버지 말씀이 이번 새 제자들은 다 세가의 동량이 될 거라고, 중요하다고 하셨거든요.”

“그렇지.”

큰 세가들은 대개 매년 방계를 포함한 새 제자를 받기도 했다.

“그런 중요한 일이니까 숙부께서도 함께해 주시면 어떨까요? 가르쳐 줄 사람은 한 명이라도 더 있는 게 좋잖아요.”

단목현우가 련을 고쳐 안으며 수긍했다.

“그건 그렇다만, 그런데 내가…… 잘할 수 있을지는…….”

“숙부는 저한테 글도 잘 알려 주시고 피리도 잘 알려 주셨잖아요. 분명 새로 올 아이들한테도 잘 알려 주실 거예요.”

단목현우는 련의 말을 귀 기울여 들으면서도 반은 믿고 반은 불안한 듯 살짝 표정을 찌푸렸다.

“그래, 너한테도 가르쳐 주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는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그 표정이 약간의 기대로 번졌다.

“아이들이 많이 들어오면 여기도 시끌벅적해지겠구나.”

“재미있을 거예요!”

“그랬으면 좋겠네.”

련이 웃었다. 단목현우가 련의 뺨에 자신의 뺨을 붙이며 부드럽게 웃었다.

* * *

호객 행위를 하는 사람들, 시비 다툼을 벌이는 사람들, 웃고 떠드는 소리, 모든 게 한데 휘몰아치는 항주 저잣거리는 시끌벅적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조용히 기척을 가다듬으며, 언뜻 보자면 시정잡배처럼 좌판을 툭툭 건드리며 지나가는 한 남자가 있었다. 스물 중반은 되었을까.

‘오호라. 어디 귀한 댁 아기씨가 바람이라도 쐬러 나왔나?’

아마도 하인인 듯 보이는 소년 하나와 유모 하나,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지키는 무사 둘이 보였다.

딱 봐도 체격도 건장하고, 정순한 내공을 체계적으로 쌓아 올린 명문가 무사들이었다.

그들을 보는 남자의 표정이 묘하게 비뚤게 변했다.

‘잘~ 먹고 잘~ 컸구만.’

좋은 자질을 타고나서 좋은 스승 밑에서 잘 자라서, 귀인을 모시고 다닐 정도의 능력을 착실하게 쌓은 무사들.

남자, 백의명은 이런 자들을 보면 도무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꼭 한 번은 놀려 줘야 그 속이 시원했다.

백의명은 그들의 주인으로 보이는 어린애를 흘끗 쳐다보았다.

어린애 허리춤에 조그만 주머니가 매달려 달랑거렸다.

돈이야 유모가 들고 다닐 테니 저건 작은 장식에 불과하겠지만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돈이 아니다.

백의명은 바람이 스치는 버들잎처럼 슬렁슬렁 걸음을 옮겼다. 어깨를 툭 하고 부딪치는 건 하수나 하는 짓이다.

아무 의도 없는 것처럼, 시장 통에서 우연히 곁을 지나가는 사람인 것처럼 슬쩍 지나가되 재빨리 목적한 바를 이루는 것!

손 안에 쥔 작은 돌멩이를 아무도 모르게 날렵하게 던지자 앞서 걸어가던 상인이 “억!” 하고 소리를 내며 다리를 붙잡고 몸을 숙였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를 흘끗거리는 사이에 백의명은 그 아기씨 곁을 스르르 스쳐 지나갔다.

백의명의 입가에 씩 웃음이 걸렸다.

물론 암살 시도 같은 거였다면 이 정도 수법으로는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사람을 다치게 하려는 이가 뿜는 살기(殺氣)를 갈무리하는 건 대단한 경지에 오른 살수에게도 난해한 일이고, 아무리 어리숙한 무림인도 살기를 놓치는 일은 없다. 무림인을 암살하는 게 그래서 어렵다.

하지만 조금 가까이 스쳐지나가는 것 정도야.

소맷부리 안쪽에 넣은 손에 조그만 주머니가 잡혔다. 귀한 집 아기씨를 지키니 어쩌니, 내공이 있는 자만이 진정한 무사니 어쩌니 해도 자기네 아기씨가 털리는 것도 모르고!

아무도 없는 골목으로 슬쩍 들어온 백의명은 주머니를 손에 쥐고 안에 든 걸 가늠해 보았다.

직접 열어 보지 않고 손끝의 감각으로 추리하는 건 그의 즐거움 중 하나였다.

‘오오, 옥 장신구인가? 조그맣게 세공한 것? 제법 돈이 되겠군. 오늘은 양고기 수육에 탁주 한잔 걸칠까? 산초를 듬뿍 넣고 삶은 양고기로다가…….’

기분이 아주 유쾌했다.

“어억! 억! 크어어억!”

‘아니, 제, 제기랄, 이게 뭐야!’

유쾌해야 했는데!

백의명은 최대한 몸을 웅크리려고 애썼다. 조금이라도 덜 맞으려는 노력이었다.

“크억! 어어억!”

뻑! 퍼버벅!

“이, 이봐! 억! 말로, 말로, 제발!”

양고기 수육, 양고기 수육, 콧노래를 부르며 골목길을 요리조리 걸어가는데 불현듯 눈앞에 작은 소년이 나타났다.

자신이 주머니를 소매치기한 아기씨 옆에 있던 하인 꼬마라는 건 금방 알아보았다.

왼쪽 눈 아래에 눈물 점, 어린 남자애가 귀티 나게 생긴 바람에 저게 아기씨와 동행한 친구인지 아닌지 가늠하려고 한참 쳐다봤기 때문이다.

왜인지 불길한 감각이 등골을 내달렸다.

아기씨 물건을 훔쳤는데, 인적 없는 골목에서 그 아기씨의 하인과 마주하다니.

— 응? 꼬마야, 길이라도 잃었냐?

— 길 잃은 건 너겠지. 한참 기다렸잖아. 너 바보 아니냐? 저쪽 골목에서 꺾어서 오면 여기까지 바로 오잖아.

— 뭐, 뭐…….

애써 아무렇지 않게 말을 붙여 보았으나 어린애가 반말을 툭툭 내뱉자 백의명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신중함과 불안함은 금방 동났다. 소년이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 내 놔.

— 요 건방진 새끼가 어른한테 말하는 본새 보소.

백의명은 코웃음 쳤다. 그러자 소년이 한숨을 내쉬었다.

— 말로 할 때 주고 가. 나 바빠.

돌이켜보건대 아마 소년은 이 시점에서 이미 말로 할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굳이 반말을 찍찍 내뱉어 도발을 한 게 분명했다. 백의명이 코웃음 치며 주먹을 확 쳐들고 위협했다.

— 콩알만 한 게 어디서 어른 무서운 줄 모르고!

그런데 그 말을 듣고도 소년은 그를 머리에서 발끝까지 쭉 훑어보더니, 혀를 차는 게 아닌가?

열 살도 안 된 어린애처럼 보이는데 하는 행동거지는 자신보다 연상처럼 보였다.

— 쯧쯧……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은 건 근성이 있다 싶지만, 그렇다고 그저 외공만 연마해? 이건 진짜 바보인가?

그런데 그 순간 분노보다는 섬뜩함이 먼저 찾아왔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은’이라는 말이 얼음물처럼 그의 정신에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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