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75화
어려서 무공을 익히려고 돈을 주고 들어간 도장에서 무공을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아 기혈이 뒤틀렸다.
그 탓에 제대로 된 내공을 쌓을 수 없는 몸이 되어 도장에서 쫓겨나면서도 백의명은 주었던 돈을 돌려받지도 못했고 피해를 보상받지도 못했다.
하지만 어린 백의명은 포기하지 않았다. 내공이 없으면 외공이 있다는 생각으로 죽도록 노력했다.
내공이 없으니 검기상인(劍氣傷人)의 경지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하지만, 그래도 그 밑의 경지는 비벼 볼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비록 그 과정에서 이리저리 구르다 덜미가 잡혀서 흑천련에서도 눈치를 살핀다는 그 하오문(下汚門)에까지 흘러가게 되었지만…….
소년은 그렇게 말하더니 짧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어 해를 살펴보곤 주먹을 말아 쥐었다.
저런 손을 보고 진짜 고사리손이라고 하는가 보다, 하고 백의명이 무심결에 생각했을 때였다.
— 나도 슬슬 사람이 한 명쯤은 있어야겠다 싶었으니 별수 없겠다. 좀 아프겠지만 참아.
— 하하, 꼬마야. 혼자서 자꾸 무슨 헛소리를…… 어억!
그러곤 지금이다.
그냥, 그냥 두들겨 맞고 있었다. 냇가에서 빨래를 두들기듯, 그게 아니면 널어놓은 이불을 두드려 먼지를 터는 것처럼.
체구도 자신의 반만 한데 도무지 막을 수가 없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그저 맨손만 가지고 그를 두들기는데, 아차 하는 사이에 엎어졌고 그 뒤로는 그냥 죽도록 맞고만 있었다.
자신에게 내공만 있었어도 지금쯤 무림 전역에 이름을 떨쳤을 것이고, 내공이 없는 지금도 그 연배 중에서는 나름 강하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끄어어, 억, 억, 어억!”
죽어라 외공만 익혔으니 맷집으로는 따를 자가 없다고 자신만만했으나 어린애 주먹 한 번 한 번이 마치 오장육부를 칼로 쑤시는 것처럼 아팠다.
중간부터는 눈물콧물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잘못했다고 빌기라도 하고 싶은데 비명 말고 다른 말을 뱉을 새가 없다.
그러다 거짓말처럼 소년이 손과 발을 멈췄다.
한껏 움츠리고 있던 백의명이 양팔로 얼굴을 감싼 채 한참 있다가, 숨을 죽이곤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가…….
“흐어어어어!”
“너 어디 살아?”
코앞에 소년의 얼굴이 있어서 백의명은 비명을 질렀다.
왠지 몹시 상쾌한 얼굴의 소년이 비명을 듣고 인상을 찌푸리더니 또 손을 놀렸다.
순간 목소리가 턱 막혔다. 아무리 비명을 질러도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 진작 아혈(啞穴) 짚고 팰 걸 그랬다. 시끄러워 죽는 줄 알았네.”
‘나는 진짜로 죽는 줄 알았다고요!’
지금도 눈물이 줄줄 나고 있었다. 하지만 소년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그 아기씨의 것인 주머니를 잘 갈무리하곤 말했다.
“혈도 풀어 줄 테니까 비명 지르지 말고 대답 잘 해라. 알겠지? 안 그러면 또 조금 아야 해.”
‘‘아야’한다고? 이게 ‘아야’ 수준이면 진짜 아픈 건 뭐냐고!’
백의명은 혀라도 깨물고 싶있으나 자신에게 그 정도의 근성은 없다는 걸 알았다. 울면서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너 어디 살아?”
“저, 저쪽, 저쪽에 환벽루(歡碧樓)에…….”
“누각에서 먹고 잘 정도로 부자야? 그런데 이런 건 왜 훔쳤어?”
“제, 제 돈으로 먹고 자는 건 아니고요. 저기 뭐냐. 진상 손님 쫓아내 주는 그런 일을 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두렵고 기가 죽어서 어린애를 앞두고 절로 경어가 술술 나왔다.
‘보통 고수가 아니다. 어린애가 어떻게 이런 경지에 이를 수가 있냐고! 반로환동(返老還童)한 고수 아니야?’
울컥해서 한 생각인데 이윽고 깨달음이 뒤따랐다.
‘어?’
반로환동.
대단한 고수가 경계를 뛰어넘는 성취를 이루면 젊다 못해 어린 몸으로 되돌아가는 경지.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앞뒤가 맞았다.
‘그럼 설마 같이 있었던 아기씨는 손녀인가?’
귀한 집 자손으로 보이는 소년의 저 곱상한 얼굴은 정말 귀한 집 태생이라 그렇다 할 수 있겠고, 허름한 옷은…….
‘나이 들면 다들 편한 게 제일이라며 옷을 대충 입긴 하니까.’
“흠. 네 실력으로도…… 그게 가능해? 누굴 쫓아낼 수 있나?”
“아니, 제가 내공이 없지 실력이 없는 게 아닙니다!”
“없던데…….”
입 안에서 육두문자가 맴돌았지만 내뱉을 자신은 없었다.
“어쨌든 환벽루란 말이지. 알겠다. 가서 대기하고 있어. 도망치면 진짜 죽는다. 난 농담 안 해.”
“대, 대, 대기하라니요? 그게 무슨, 무슨…….”
갑자기 눈앞이 새까매졌다. 마냥 죽고 싶었다. 주머니 한번 잘못 훔쳤다가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내가 널 요긴하게 쓸 데가 있을 것 같아서 그런다. 좀 멍청하긴 해도 근성이 있으니까 나쁘지 않을 것 같고.”
사람 면전에다 대고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꼴이, 어딘가의 대마두 같은 놈이 반로환동을 한 게 분명했다.
백의명의 눈에서 저절로 눈물이 펑펑 샘솟았다.
쫓아온다는 말도 정말 같았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저, 정말, 정말 잘못했습니다. 앞으로 반성하고 훔쳤던 건 다 기부하고 그렇게 살 테니…….”
“그건 네 맘대로 하고. 어쨌든 난 이만 간다. 도망치면 죽는다고 말했다. 아마 돌아가면 별로 도망치고 싶지도 않을걸?”
소년은 그렇게 말하며 피식 웃고는 백의명의 등을 한 번 더 후려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의 대나무가 반으로 쪼개지는 고통이 이럴까 싶은 통증이 백의명을 확 덮치고, 그는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 * *
“륜아야! 어디 갔다 왔어?”
“요 앞에 빙당호로 팔던데요? 그거 사러요. 그리고 이것도 주웠어요. 이거 누이 주머니잖아요.”
“어?”
련은 놀라서 자신의 허리춤을 내려다보았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 수련이 많이 부족하다…… 물건을 잃어버리고도 잃어버린 줄도 몰랐네.”
‘영기가 많다고 기척 감지도 잘하는 건 아니구나. 하긴 그건 내공이나 기감의 영역이니까…….’
그래서 청련수와 백약청 말고도 이 영기를 어떻게 써 볼 방도를 찾아보기로 단목천기와 뜻을 모으긴 했지만, 둘 다 아직 마땅한 방법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아이고 아기씨, 이건 제가 챙겨 들게요.”
곁에서 유모가 얼른 그 주머니를 받아 품에 챙겼다. 련과 화륜, 유모 세 사람이 모여서 웅성거리자 조금 거리를 두고 있던 정영이 다가왔다.
“아기씨,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잠깐 주머니 떨어뜨리고 왔나 보더라고. 륜아가 빙당호로 사 오면서 주워 왔어.”
“……살펴보지 못한 제 불찰입니다.”
“에이, 그렇게 말하지 말고 둘이서 이거 먹어.”
련이 호위 무사 두 사람에게 건네줄 빙당호로 두 개를 챙기는 사이, 정영은 자신을 쏘아보는 화륜의 눈길과 마주하고 있었다.
‘뭐, 뭐야.’
한심하고 덜떨어진 반편이 바라보는 듯한 눈길에 정영은 마른침을 삼켰다.
기분이 상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긴장이 된 탓이었다. 마치 스승에게 잘못하고 꾸지람을 들을 때처럼.
련이 쥐여 주는 빙당호로를 잡자 그 눈길이 더 짙어졌다가 련이 화륜을 돌아볼 때야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런데 빙당호로는 무슨 돈으로 샀어?”
“지난번에 용돈 주셨잖아요.”
“그걸로 이런 걸 사면 어떡해. 너 쓰라고 준 건데…….”
“그래서 제가 썼어요.”
련은 그런 화륜을 보곤 귀여워서 머리를 쓰다듬고는—화륜이 조르르 도망쳐 유모 뒤에 숨었다— 빙당호로의 빨간 열매 한 알을 깨물어 입에 넣었다.
“그럼 오늘 여청이 잘 지내는지도 확인했으니까 이제 돌아갈까?”
오늘 련이 약여청을 찾아왔던 건 그간 약여청의 약초를 헐값에 사들였던 약초당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련은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약여청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 헐값에라도 자신의 약초를 사들여 준 건 거기뿐이었다고. 그게 없었다면 련을 만나기 직전까지 어려운 시기를 버틸 수 없었을 테니 그걸로 되었다는 것이다.
‘되긴 뭐가 돼!’
어차피 그 약초당이 잘되었던 게 자신의 약초 덕이었다면 이제 망할 것 아니냐며, 약여청은 천진하게 웃었다.
다만 혹시나 자신이 약초를 캐러 간 사이에 혼자 있는 할머니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하기에, 협의 끝에 약여청의 거처를 세가 안으로 옮기기로 이야기를 마쳤다.
“이제 돌아가서…… 어? 고모부!”
련은 의외의 인물을 마주하곤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근처의 작은 물감 가게에서 나오던 석반안도 놀라서 련에게 다가왔다.
“련아 아니니. 오늘 외출했니?”
“여기 근처에 제가 고용한 약초꾼이 살고 있어서요. 잘 지내는지 한번 보러 왔어요. 고모부는요?”
“아, 나는 먹과 안료를 좀 구해 볼까 하고…… 직접 보고 고르는 걸 좋아하거든.”
“예쁜 거 많이 사셨어요?”
“이번에 빛이 고운 주황색 안료를 구했단다. 동황분(同黃粉)인데, 색이 아주 짙고 고운 노랑에 가까워. 세가로 돌아오니 금목서가 예쁘게 피었기에 그걸 그려 볼까 하고.”
련의 영기가 주변으로 퍼지는 덕분에 시들시들했던 정원이 살아나고, 거기에 갖가지 꽃들이 피었는데 그중에서 련이 가장 좋아하는 건 금목서였다.
그 결과 위지청은 금목서 가지를 잘라다 심고, 묘목을 구해 심고, 어찌나 애지중지 가꾸었는지 모른다.
행여나 꽃이 시들면 위지청이 슬퍼할까 봐 련도 함께 공을 들여서 단목세가는 지금 온 천지가 달콤한 금목서 향기와 꽃으로 가득 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