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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76화
“나중에 성아랑 같이 그림 구경 가도 돼요?”
“그럼, 물론이지. 가문 사람들은 모두 바쁜데 나만 한가하게 꽃이나 그리고 있자니 조금 부끄럽긴 하다만…….”
석반안이 흐릿하게 미소 짓자 주위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흠칫거리며 멈췄다가 한참 느려진 걸음으로 떠나갔다.
련은 석반안과 단목현요가 왜 결혼했는지 알 것 같았다.
두 사람의 고뇌와 아픔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저 아름다움의 한 파편으로밖에 받아들여지지 못했을 것이다.
“아! 고모가 요즘 그 방계에 소식을 전하고 있는 일을 하는데 많이 바쁘시더라고요.”
“그렇지. 네 고모도 참, 항상 뭐든 열심히 한단다.”
“누가 그 청간(請簡) 써 주는 거라도 대신 해 줬으면 한다고 하시던데…….”
“청간?”
“네, 방계에 찾아오라고 편지 쓰는 거요. 우리가 무가다 보니까 문장은 다들 좀 그저 그렇대요. 고모가 그렇게 솔직하게 말씀하시진 않았지만요.”
“아, 아아…….”
차마 그렇지 않다고는 말을 못한 석반안이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눈빛에 묘한 활력이 돌았다.
석반안은 거대 전장의 셋째로 태어났다. 후계자는 일찌감치 정해져 가업을 이을 일은 영원히 없는 부잣집 막내가 무얼 하며 지내겠는가?
그는 명석했으나 압도적이지는 않았고 욕망은 있었으나 그리 맹렬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시서화를 즐기며 사는 데 만족했지만, 그도 눈이 있고 귀가 있으며 마음이 있는 사람이었다.
‘풍림전장에서 귀동냥으로 들은 것도 분명히 많을 거야.’
차근차근 세가 일에 정을 붙이면 그를 통해 풍림전장 같은 거대 전장이 어떻게 돈을 벌고 사람을 관리하는지도 알아내 세가에도 적용시킬 수 있고, 그의 예술적 안목을 활용한 사업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련의 최종적 계획이었다.
가령 그가 장수와 건강을 기원하는 소나무 그림을 작게 그려서 련이 거기에 영기를 실어 팔면 정말로 ‘장수와 건강’을 기원하는 효과가 있는 그림이 될 텐데.
‘아. 이건 예술적 안목이 별로 필요 없나? 하지만 그림도 잘 그리시니까, 뭐!’
그런 걸 떠나서, 아무리 정략결혼이 아니었다곤 해도 거대 전장 출신인 사람을 혼맥으로 받아 놓고 무공을 모른다고 여태 손님 대하듯 한 것도 용했다.
아내인 단목현요마저 석반안을 사랑하면서도 ‘그이는 무공을 모르는 사람이니까’라고 집안일에서 배제하지 않았나. 무림 세가에서 자랐기에 어쩔 수 없는 면이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어찌 사랑만으로 살아갈 수 있으랴?
그저 사랑하는 사람의 반려라는 역할만으로 지금껏 버텨 온 석반안이 대단했다.
사람은 물 없이는 살 수 없지만, 물만으로는 살 수 없는 법인데.
석반안은 저도 모르게 조금 걸음을 빨리했다가 련의 걸음에 맞추어 멈췄다 하며 들뜬 기색을 갈무리하려 애썼다.
련은 그런 석반안을 보며 뿌듯한 표정으로 웃었다.
* * *
백의명은 눈을 번쩍 떴다.
눈이 찌를 듯이 아파 주위를 살피자 노을이 지고 있었다. 지는 해의 낮고 깊은 주홍빛이 그를 공격하는 중이었다.
“헉!”
마지막 기억은 그 예쁘장하게 생긴 소년에게 쥐 잡듯 두들겨 맞은 것이다. 순간 백의명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와 동시에 백의명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을에 냉기 일어나는 바닥에 한참 기절해 있었는데도, 그전에는 떡이 되도록 두들겨 맞았는데도 움직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도망가야 해!’
백의명은 당장 탈출할 곳을 모색했다. 이 근처는 안 된다. 그 반로환동한 고수는 도망치면 잡아 죽인다지 않았나.
‘멀리, 멀리…… 최대한 멀리!’
그의 손녀딸이 항주에 있으니 그도 그렇게 멀리까지 찾으러 나오진 않을 것이다.
‘그럼 얼마나 멀리…….’
남직례성은 코앞이라는 말의 유의어나 다름없다.
무림맹이 있는 하남성? 그도 여기서 그다지 멀지 않았다.
사천성? 제법 거리가 되지만 장강에 배 한번 띄우면 눈 깜짝할 새다.
그보다 더 멀리!
‘청해성?’
곤륜파가 있다는 청해성…… 거기까지 생각했으나 오히려 마음이 더욱 불안해졌다.
그곳 도사들은 마천교와 접해 있다 보니 손속이 매섭기가 백도무림 같지 않다고 했다.
그곳에서 소매치기하다 들키기라도 하면 손이 잘릴지도 모른다.
‘천산! 그래, 천산까지 가는 거다.’
오히려 거긴 마천교의 본거지이긴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마천교에 딸린 무시무시한 소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아이들끼리 죽고 죽이게 해서 살아남은 한 명만 후계자로 쓴다거나, 인근 주민들을 모두 세뇌해서 위급한 상황에선 화살받이로 쓴다거나─, 무림인들에게 제일 무시무시한 이야기는 교주만이 배운다는 흡성대법에 관한 것이었다.
교주가 되면 측근들의 내공을 싹 빨아들여 한층 더 고강한 무림인이 된다고 하지 않나!
세상의 무섭고 악독한 것은 혈라곡이 다 독점한 지금에 이르러서도 마천교주의 흡성대법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나는 내공이 없지요!’
살다 보니 이런 걸로 기뻐할 일도 오는구나!
거기다 항주에 뿌리를 둔 고수가 만 리 너머 거기까지 갈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리고 백의명은 만 리 정도는 목숨 값으로 쳐서 지불할 용의가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좀 차분해졌다. 천산이라고 환벽루 같은 곳이 없을까. 그간 모아 둔 돈을 가지고 거기까지 가서 지금처럼 살면…….
“내 돈!”
환벽루까지 거의 뛰듯이 향하던 백의명이 우뚝 멈춰 서서 자신의 허리춤, 가슴팍이며 엉덩이를 덮은 천까지 다 헤집었다.
전낭이 없어졌다!
하늘이 노랗게 변하는 것 같았다.
“내, 내 돈…… 내 돈!”
누가 훔쳐 갔지?
기절해 있는 동안 지나가던 사람이? 그게 아니면 혹시 자신이 그 골목에 떨어뜨리고 온 걸까?
백의명은 다시 그 골목까지 달려가 웅덩이 하나까지 파헤쳐 보았지만 자신의 전낭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놈이구나!’
왠지 무서워서 입 밖으로 목소리를 내지도 못하고, 백의명은 파르르 떨었다. 그 소년이 자신을 두들겨 패고 전낭까지 가져간 게 틀림없었다.
‘늙은이가…… 치사하게 젊은 사람 돈을……!’
전장에 맡겨 놓은 게 조금은 있으니 그걸로 어떻게든 되겠지만, 두들겨 맞고 돈까지 잃었다는 걸 깨닫자 가슴이 쓰렸다.
다시 환벽루로 돌아온 백의명은 인사하는 점소이나 문지기들에게 건성으로 손을 흔들곤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물건은 썩 많지 않았기에 별 미련 없는 것은 버리고 말라붙은 당과는 입에 털어 넣은 뒤 옷가지 몇 개와 신발만 챙겼다.
그러곤 창문으로 뛰어내려 몰래 환벽루를 벗어났다. 정식으로 말을 하고 나갔다가는 괜히 꼬리가 밟혀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
강을 탈 수 있는 나루터까지 내달려 뱃삯을 두 배로 쥐여 주고 최대한 빨리 가 달라고 윽박질렀다. 뱃사공은 별 대꾸도 하지 않고 무심히, 하지만 빠르게 노를 저었다.
그리고 배의 한쪽 구석에 앉아서 다리를 달달달 떨며 미래에 대해 고민하던 백의명은 문득 자신의 몸 상태를 깨달았다.
‘어라? 왜 안 피곤하지?’
곤죽이 되도록 울며불며 두들겨 맞고 환벽루를 갔다가 골목을 갔다가 왕복한 뒤에 여기까지 와서 배를 탔는데…….
왜 힘들지 않은가?
오히려 평소보다 더 가뿐하게 뛰어서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백의명은 양손으로 자신의 몸을 더듬어 대기 시작했다.
노를 젓던 뱃사공이 그를 보고 흠칫하더니 노 젓는 속도가 조금 더 빨라졌다. 하지만 백의명은 거기까지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뭐야, 뭐야, 뭐야, 뭐야!’
어려서 도장 사범에게 반쯤 학대에 가깝게 수련을 받으며 살짝 뒤틀렸던 단전 부근 뒤쪽 허리가 꼿꼿했다.
숨을 한번 크게 들이켜는데 갑자기 저 강변 멀리서 풀벌레가 몇십 마리나 숨어 있는지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퐁, 하고 물고기 한 마리가 자맥질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일평생 접하지 못한 영역의 소리들이었다.
백의명이 자신의 아랫배를 살살 쓸었다. 아주, 아주 미약하지만, 거의 느껴지지 않았지만, 정말 작은 기척이었지만 거기 있었다.
단전이 있었다. 찌그러지고 기이하게 뒤틀렸던 혈도들이 곧게 펴져 맥동하며, 자신이 오랫동안 그저 시도만 해 왔던 토납법의 찌꺼기들이 남긴 조그만 내공이 흘러들어간 단전이…….
“으아아아아악!”
“으, 으아아아악!”
그사이에 이상한 손님을 받은 뱃사공들 특유의 기세로 거세게 노를 젓던 뱃사공이 백의명의 비명을 듣고 같이 비명을 질렀다.
한참이나 서로 비명을 꽥꽥 지르다가 백의명이 간절하게 청했다.
“뱃머리, 뱃머리 돌려요! 뱃머리 돌려 주세요!”
“뭐, 뭐라고요?”
“저 돌아가야 된다고요!”
“뭔 소리야, 이, 이, 이제 와서…….”
황당한 소리를 들은 뱃사공이 일단은 거부의 의사를 표했으나 배에 탄 뒤 다리를 달달 떨면서 자기 몸이나 더듬는 이상한 손님을 상대로는 목소리가 조금 떨릴 수밖에 없었다.
“나, 나도 저쪽에 집이 있으니까 태워 준 거 아닙니까. 이제 와서 돌아가자고 하면 나는 어디서 자라고…….”
“두 배 더 드리겠습니다.”
“갑시다. 왔던 대로 가면 된다 하셨나?”
“예, 예.”
뱃사공이 기운차게 뱃머리를 돌리는 사이에 백의명은 다시 다리를 달달달 떨었다.
‘어쩐지 뒤지게 아프더라니, 그게 말로만 듣던 추궁과혈(推宮過穴)이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