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77화
좋게 말하면 전신을 두들겨 막힌 혈도를 뚫어 주고 근골을 개선시켜 준다는 대법인데, 세간에 떠도는 말로는 그냥 사람 하나 죽도록 두들겨 패서 고수로 만들어 주는 수법이라고들 했다.
시전하는 사람도 사람 몸에 대해 완벽히 이해하고 몸을 두들겨야 하니, 일정 수준 이상의 박투술(搏鬪術)에 드높은 내공까지 필요한 게 많았다. 당연히 쉽게 만날 수 없는 기연이었다.
‘젠장, 어쩐지 내가 도망 안 칠 거라고 호언장담하더라니…….’
이런 걸 받아 놓고 도망간다면 평생 발 편히 뻗고 잘 수 없을 터였다.
그가 아무리 곱게 잘 자란 무림인만 보면 심사가 꼬이는 뒤틀린 성미의 인간이라 해도 그랬다.
거기다 그 소년이 선보인 손기술이 눈에 아른거렸다. 자신은 꼼짝도 못하고 죽어라 두들겨 맞기만 했던…….
‘어떻게 못 배우나? 아니, 아니다! 아서라! 이 이상은 과욕이다!’
평생의 꿈이자 아픔이었던 내공 문제가 해결되었는데 다른 뭐가 더 필요하랴?
하지만 마음속 한구석에 기대가 피어올랐다. 굳이 그에게 추궁과혈까지 해 준 이유가 있을 게 아닌가. 그를 두고두고 써먹으려면 그에게도 이런저런 것들을 알려 주지 않겠는가!
‘설마 오랜만에 시원하게 주먹질 좀 해 보자고 사람을 이렇게 패진 않았을 거 아니야.’
“좀 만 더 빨리 안 됩니까?”
행여나 그 소년이 오늘 밤에라도 찾아왔다가 도망친 걸 들키게 된다고 생각하면 눈앞이 아찔했다.
“그러다 물귀신 되고 싶소?”
“아이고, 아니죠! 전 이제 행복하게 살날이 천 년은 남았는데요.”
갑자기 웃음이 절로 나왔다. 백의명은 실실 웃기 시작했다. 그 미소를 본 뱃사공의 노가 갑자기 빨라졌다.
“오! 빨리 가 주실 수 있네요! 그럼 얼른 얼른 갑시다~!”
* * *
항주 전역과 절강성 방방곡곡, 그리고 때로는 성 너머 다른 곳까지 단목세가의 청간이 흘러갔다.
석반안이 쓰고 필사까지 도맡아 한 서신들의 필체가 얼마나 고운지 보라며 단목현요가 으스대며 기뻐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각지에서 방계 식솔들이 몰려들었다.
두 달간의 접수가 끝나고, 이 주에 거쳐 일차 심사가 지나고 나자 약 스무 명의 아이들이 남았다.
이 중에서 절반인 열 명이 최종 합격하게 되는 것이다.
약당 외에는 다소 정적이던 세가가 사람으로 북적거렸다.
접객당에 머물고 있긴 하지만 방계의 아이들과 수행원들은 긴장한 와중에도 처음 온 본가의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무리 지어 활짝 핀 금목서를 구경하던 작은 여자아이 하나가 련을 보고 고개를 갸웃하다가 벌떡 허리를 세웠다.
“아, 아, 안녕하세요…….”
그러곤 꾸벅 인사를 하곤,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옆으로 비켜섰다. 련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완아 맞지?”
“……!”
고개만 수그리고 있던 소녀가 화들짝 놀랐다.
“어, 네, 넵.”
“금목서 좋아해? 나도 이거 향기가 좋아서 참 좋아해.”
련이 말을 걸자 소녀, 단목완은 목까지 빨갛게 되어서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네, 네! 좋아…… 좋아합니다.”
“그럼 가지 하나 꺾어 줄까? 방에 가서 물그릇에 담가 두면 될 거야.”
“아니, 아닙니다! 그런 폐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단목완이 손을 휘휘 내저으며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련의 손에서 이미 금목서 꽃송이가 매달린 가지 하나가 잘린 참이었다.
“아. 이미 꺾었는데 어떡하지…….”
“아, 아닙니다! 주시면 감사히 받겠, 받겠습니다!”
소녀가 손을 바르르 떨었다. 긴장감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가, 가, 감사합니다!”
더 말을 걸었다가는 얼굴에서 아예 핏기가 가실 것 같아서, 련은 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다가 그냥 꽃가지만 건네주고 자리를 떴다.
“이름은 또 언제 봐 두셨어요?”
“저 애가 재능이 있어. 그래서 눈여겨봤지.”
“아아. 그런데 긴장하라고 말을 건 거예요, 긴장하지 말라고 말을 건 거예요?”
뒤따라오던 화륜이 슬쩍 묻는 말에 련은 괜히 화륜을 한번 흘겨보았다.
“긴장 좀 풀었으면 했는데 잘 안 된 것 같긴 하다.”
단목완은 이번에 찾아온 방계들 중에서 재능으로 꼽자면 한 손으로 꼽을 만한 기재였다.
소심한 것이 흠이라면 흠이지만 속내가 음험하지 않아서 련도 눈여겨보는 중이었다.
‘긴장 안 하고 마지막 시험 잘 쳤으면 좋겠는데.’
련이 직접 몇 명을 뽑을 수도 있다고 단목천기에게 말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제대로 인정받고 세가에 남는 쪽이 모두에게 좋지 않겠는가.
‘사실 마음 같아선 오백 명쯤 뽑아다 키우고 싶지만.’
방계 식솔이 오백이나 되는지는 제쳐두고서라도, 십 년만 지나면 기생충처럼 숨어 있던 혈라곡 놈들이 고개를 들이밀 걸 생각하면 오백 명이 뭐냐, 천 명은 더 모아서 키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천 명쯤 되면 아무리 관무불가침이라는 불문율이 있다 해도 관에서 촉각을 곤두세울 테고, 오백 명은…….
‘오백 명도 관에서 예민하게 굴 것 같은데, 관도 관이지만 아직까지 그만큼 돈이 많진 않네. 흑.’
같은 무공을 익히며 함께 자라 세가를 가족같이 생각하고 세가에 충성하는 무인들을 양성하는 것이 이번 방계 제자 모집의 목적인데, 쉽게 말하자면 먼 친척들에게 일종의 유소년 장학금을 붓는 것이다.
당연히 여기서 의식주도 해결해 주어야 하고, 어느 정도는 생활할 때 필요할 여유금도 주어야 하며—이 돈이 없으면 아이들이 무공 수련할 시간에 다른 일을 하려고 들기 시작한다!—, 거기다 배움을 북돋아 주려면 멋진 검이나 무복이 추가로 들어간다. 이따금 직계로 입적시켜 주는 걸 조건으로 거는 곳도 있다고 들었다.
이런 걸 열 명에게 10년 동안 하고 나면 그제야 그럴듯한 무인이 탄생하는 것이다.
지금 열 명만 뽑는 것도 세가 사정이 완전히 안정되지 못했기에 정한 숫자였다.
좀 더 장기적인 계획을 그릴 수 있을 때 더 많은 아이를 받는 게 낫다는 결론으로.
그런데 이걸 오백 명에게 하라고 한다면? 아마 련은 매일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다음 달에 우리 애들 밥은 먹일 수 있을까 걱정하느라.
‘도가 불가 문파들은 좋겠다.’
그쪽 문파들은 양상이 약간 달랐다.
일단은 속세를 좀 벗어나고자 하는 수행자들의 모임이다 보니 사적 유용 자금이 조금 덜 필요하고, 필요한 돈은 절이나 사찰에 향을 태우러 오는 향객들이 내는 시줏돈과 속가제자들이 꼬박꼬박 바치는 돈에…….
‘소림사는 황제가 준 논밭도 되게 많다던데. 하여튼 무림인들은. 자기 좋을 때만 관무불가침이지?’
역사와 명성이 드높은 절이니 황제도 복을 빌면서 이것저것 바치는 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련은 속으로 내심 소림파를 질시하며 투덜거렸다.
‘나도 곧 우리 집안 전답 다 찾아올 거야.’
시든 과수원도 영기로 살려 보고, 청련수 판 돈으로 잃었던 전답과 상가도 다시 사 오고, 제자도 키우고.
“누이,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눈에 불을 켜고 있어요?”
“돈 버는 거.”
“아, 아니…… 무공 생각을 그렇게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요.”
화륜이 투덜거렸다.
“무공은…….”
련은 말을 잇다 말고 삼켰지만 화륜은 빠르게 눈치챘다.
“알아서 잘돼요?”
련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돈은 맘대로 안 되고요?”
“안 된다기보다는, 돈을 쓸 데가 너무 많아.”
“어디에 또 쓰게요?”
“제자 오백 명 키우는 상상을 했거든. 벌써 잠이 안 올 것 같은 거야. 내가 돈 못 벌어서 애들 밥 굶길까 봐…….”
련이 이마까지 짚으면서 말하자 화륜이 큰 소리로 웃다가 겨우 숨을 골랐다.
“맨날 말도 안 되는 상상만 해요?”
“가솔들을 책임진다는 건 이런 거야. 알겠니?”
“모르겠는데요…… 자기 밥벌이는 자기가 해야죠.”
“아, 아니…… 그래도 가장이 책임을 져야지. 그래야 날 믿고 따를 거 아니야…….”
“책임져 줄 거라서 따른다고요?”
화륜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 식으로 따르는 건 다 가짜죠.”
“뭐? 그럼 사람들이 뭐 하러 가장을 따르겠어?”
“가장 강하니까 믿고 따르는 거죠. 대가 같은 거 없이요.”
련은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목이 바짝 마르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니야! 아니야, 륜아야! 절대 아니야. 잘 들어. 절대 그러면 안 돼. 사, 사람들이 다 함께 지내려면 제각기 다른 역할이 있는 거야. 물론 강한 것도 중요하지, 왜 중요하냐면 가족들을 지켜 줘야 하니까…….”
“그럼 그건 거래잖아요. 믿는 게 아니라.”
“그래! 정확해!”
련은 거의 펄쩍 뛰어올라서는 화륜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사람 사는 게 다 거래야. 그게 그렇게 비정하고 딱딱하고 그런 게 아니라, 쉬운 말로 하자면 주고받는 거지. 서로 서로 하나 주고, 하나 받고. 왜냐고? 서로 사랑하니까.”
“진심으로 사랑하면 무한정 주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마천교 인재 채용을 대체 어떻게 하는 건지 진짜 너무 궁금하다. 어떻게 이렇게 적절한 교주의 싹을 찾아낸 거지?’
련은 다시금 눈물이 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