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78화
“사람…… 사람은 무한정 줄 수가 없어. 자기가 가진 것에서밖에 못 내주니까. 당연히 그렇게 내주다 보면 동나지. 그러니까 윗사람도 아랫사람을 아껴야 하고, 아랫사람도 윗사람을 존중해야 하고…… 가족 사이에도 친구 사이에도 그래야 돼.”
“안 그래도 되던데.”
“뭐라고?”
원체 작게 중얼거린 말이라서 거의 놓칠 뻔했다.
련은 뜨악한 얼굴로 화륜을 쳐다보다가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너 진짜 이상한 절 같은 데 다닌 거 아니야? 거기서 뭐 주지라는 사람이 착취하고 그런 거야?”
“아니, 아니에요!”
“그럼 뭐가 ‘안 그래도 되던데’야? 너…… 너! 그러고 보니 너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보고 다니는 사찰 있다고 했잖아! 거기! 거기가 어딘데?”
“그건 그냥 웃자고 한 말이죠!”
“처음 보는 사이에? 얼굴 보자마자 사이비(似而非) 종교 얘기를 하는 게 웃자고 하는 얘기라고?”
련은 진지한 표정으로 화륜의 어깨를 잡았다.
“륜아야, 난…… 네가…… 종교랑은 거리를 좀 뒀으면 좋겠어. 도교 불교 이런 거 아무것도 안 했으면 좋겠어…….”
“…….”
“물론 부처님을 믿고 싶다면, 부처님 정도는…… 아니면 태상노군까지는 괜찮을지도 모르겠는데…….”
“구천현녀는요?”
없던 입맛도 뚝 떨어졌다.
‘그건 마천교에서 믿는 거잖아!’
“종교…… 필요하니? 마음이 좀…… 헛헛하니? 아니, 종교가 마음 허전하다고 믿고 그런 건 아니지만. 아! 그럼 그냥 나를 믿을래?”
“…….”
“내가 너무했니?”
“조금요.”
“나도 그냥 해 본 말이야. 그리고 너는 가만 보면 행동하는 거랑 말하는 거랑 좀 다르더라.”
“네?”
화륜이 당황해서 련을 쳐다보았다.
“넌 하나만 받아도 굳이, 굳이! 꼭! 돌려주려고 하면서.”
“그건…….”
간식을 딱히 싫어하는 것도 아니면서 남이 주는 간식을 굳이 먹지 않고 련에게 주는 건, 그런 걸 받으면 갚아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련이 이것저것 배워 보라고 하는 것에도 흥미를 가지지 않는 이유가 이것이었다.
뭔가를 배운다는 건 사실 큰 대가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걸 갚을 생각부터 하니까 배우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화륜이 입술 끝을 오물거릴 때 련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건 안 갚아도 되는 건데.”
“안 갚아도 되는 건 또 뭐예요.”
“륜아가 귀여워서 주는 거니까 그냥 받고 감사합니다! 하면 된단 말이야.”
“귀여운 게 무슨 쓸모가 있어요? 어쩌라는 건지 더 모르겠어요.”
“너도 너 귀여운 걸 알긴 하니?”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면 이런 느낌인 건 지금 배웠어요.”
“그치? 하면 안 되겠지?”
화륜은 괜히 련을 한번 흘겨보고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련은 뭔가 더 말하려고 하다가 그만두었다. 자신도 잘난 듯 말하긴 했지만, 입 밖에 낸 말을 다 지켰느냐고 하면 확답할 수 없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걸 조금 떨어진 곳의 담벼락 너머에서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소년이 하나 더 있었다.
나뭇가지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 않기에, 련은 기척이 느껴지는 쪽으로 살짝 부채를 들어 보았다.
단목준
특성 : 상한 귤 / 밥그릇을 걷어차는 / 어두운 그늘 아래 / 웃자란 가지
낙성십이검 : 1성
자질과 오성 : 중-하(中-下)
고민 : 어떻게 해야 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까?
부채 위에 빠르게 글자가 떠오르는 순간 련은 인상을 와락 구겼다.
‘단목준 이 자식!’
단목준.
사실 이 이름을 발견하자마자 서류부터 싹 불태운 뒤에 엉덩이를 발로 차서 내쫓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았다.
과거에 단목성이 단목비를 지키기 위해서 혼자 남아야 했던 이유, 그 비참한 상황을 만든 녀석이 바로 단목준이었다.
자신은 죽은 뒤였으니 당시 직계라고 부를 만한 건 절세고수라곤 할 수 없는 단목현요와 심마를 떨쳐 내지 못한 단목현우, 그리고 단목성과 단목비뿐이었다.
그래서 단목준은 단목성과 단목비만 제치면 뭐라도 될 줄 알고, 혈라곡이 준동하는 와중에 세가 안에서 수작을 부렸다.
혈라곡이라는 재앙은 공평하게 전 무림에 준동했는데도 단목세가가 유난히 타격을 받았던 이유 중에 하나였다. 직계 혈족의 수가 많지 않아서 더욱.
‘심지어 성아하곤…… 친했으면서.’
단목성이 겉으로 보기엔 차갑고 도도해 보여도 속까지 그렇지는 않다. 그 애의 특성이 ‘표리부동’인 이유가 있다.
같은 성씨를 가진 가족들을 애틋하게 여기는 단목성이기에 모두의 기대를 받들어 세가를 발전시키는 걸 꿈으로 여겼다.
거기서 함께 열심히 하자고 말하던 단목준을, 단목성 역시 아끼고 친밀하게 여겼는데.
‘아냐. 개자식을 쫓아내는 건 천천히 해도 돼.’
마음 같아선 당장 저 담벼락으로 달려가서 머리채를 잡고 흔든 다음에 내쫓아 버리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아직 아무것도 저지르지 않은 아이를 가지고 그럴 수는 없었다.
련은 더는 그쪽을 보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홱 돌리는데, 그 순간 우당탕탕 하더니 달아나는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흥, 다가가지도 않았는데 지레 놀라서 넘어지기나 하고.’
련은 괜히 한 번 더 속으로 힐난하고는 일부러 탁탁 소리를 내며 처소로 걸음을 옮겼다. 곁에 선 화륜이 유유자적 발걸음을 맞췄다.
그들의 뒤로 노을이 저물어 갔다. 그렇게 마지막 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 * *
드넓은 연무장은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지난번에 금가장과 비무 할 때가 더 긴장됐었기에 련은 아무렇지도 않게 위쪽에 마련된 탁상 앞에 앉았다.
다른 어른들은 아직 오지 않은 듯했다. 어린 소녀가 위쪽에 앉자 연무장에 웅성거림이 퍼져 나갔다.
— 쟤도 심사를 봐?
— 누군데? 나보다 더 어린 것 같은데.
— 직계인 거 아니야?
— 장손이라던, 왜 그 산송장…….
— 청련수 만들었다던데 정말일까?
— 천재는 천재인가 봐.
—천재라서 앉아 있겠어? 직계니까 앉아 있겠지. 넌 방계라서 여기 있는 거고.
련은 마지막 목소리, 단목준의 말을 주의 깊게 들으면서도 괜히 화륜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 륜아가 들은 건 아니겠지?’
화륜은 아닌 척하지만 은근히 정이 깊었고—련은 화륜이 그 옥 조각이 든 주머니를 찾아오기 위해 정확히 뭘 했는지는 몰라도 애썼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련이 모욕을 당하는 걸 견딜 수 없어 했다.
한때 단목성이 좀 냉랭하게 굴었다는 이유만으로 때려 주고 오겠다느니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하지만 옆에 서 있는 화륜은 전혀 듣지 못한 표정이었다. 련이 내심 안도하는 사이에 화륜이 살짝 속삭였다.
“누이, 저 잠시 나가도 돼요?”
“왜? 다리 많이 아파? 의자에 앉을래?”
“아뇨, 그건 아니고요. 비아가 잉어 밥 가져다 달라고 했는데 깜빡했어요.”
“그런 거 안 해 줘도 돼.”
요즘 단목비는 단목현우 처소의 연못에 사는 잉어를 길들이려고 안간힘을 들이고 있었다.
잉어가 련만 보면 슬금슬금 다가와 꼬리로 물을 튕기는 모습을 보곤 한눈에 매료된 것이다.
화륜은 고개를 흔들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거 구해다 주면 하루는 자기랑 안 놀아 줘도 된대요.”
“그거 거짓말 같은데.”
단목비는 자신이나 화륜과 놀지 못해 안달이다. 화륜을 하루씩이나 자유롭게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하지만 화륜이 계속 여길 나가고 싶어 하는 데다가, 아무래도 이곳에 서 있기만 하는 건 지루할 것 같았기에 련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화륜은 련의 자리에 놓여 있는 찻잔만 련의 앞으로 조금 당겨 주고는 연무장을 벗어났다.
련이 사라지는 화륜의 뒷모습에서 눈을 뗀 순간 단목현우와 단목현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단목천기가 안으로 들어섰다.
일시에 연무장이 긴장감으로 팽팽해졌다.
동정혈사 때 단목천기가 얻은 격렬한 흉터는 영광과 두려움을 동시에 상기시켰다.
그 침묵을 가장 먼저 깬 건 련이었다. 련은 자리에서 얼른 일어나 어른들을 맞이했다.
“날도 쌀쌀한데 어찌 이리 얇게 입고 왔느냐?”
안으로 느긋하게 들어서던 단목천기가 련을 보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걸음을 빨리했다.
련은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보곤 민망해했다. 나름 가을 온도에 맞춘 조끼까지 걸치고 있는데 단목천기의 눈에는 얇은 무명 적삼만 걸치고 있는 꼴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춥지도 않고 옷도 따뜻해요!”
단목현요는 코웃음을 한번 치긴 했지만 단목천기에게 ‘저만하면 따뜻하게 잘 입혀 놨는데 왜 유난이세요, 아버지!’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남들 다 있는 곳에서 가주인 단목천기나 자기 조카를 괄시하는 꼴을 보일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네 조모도 추위라고는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단목천기가 다소 그리운 듯이 중얼거리다 련의 옆자리에 자리 잡았다.
단목현요는 ‘가운데에 앉으셔야죠, 아버지!’라고 외치지도 못하고 한숨만 삼켰다.
대신 단목한소는 그 모습을 눈에 새기듯 담고는, 늘어지는 걸음으로 탁상 하나를 직접 들어서 련의 반대쪽 옆에 털썩 내려놓았다.
단목천기의 옆으로 단목현요와 현우가 나란히 앉으면 어떻게든 단목천기가 가운데 자리가 되는 구도이기는 했다.
장내의 웅성거림이 좀 멎어 들자, 단목천기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