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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83)화 (83/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83화

“밤새 뭘 쓰시더라니. 그렇게 애써 봐야 아무 소용 없네요.”

떠나는 사람들을 배웅하는 련 곁으로 다가온 화륜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련이 준 서찰을 봇짐 속에 아무렇게나 쑤셔 박는 둘의 모습을 본 것이다.

“그래도 가족은 가족인데…… 이렇게 헤어져서 언제 볼지 모르잖아.”

“그 정도면 거의 남인 것 같은데요. 형편 어려울 땐 쳐다보지도 않더니 부자가 된 것 같으니까 콩고물이라도 얻어먹겠다고 여기까지 온 거 아니에요. 대체 그런 걸 왜 챙겨 줘요?”

“…….”

잠깐 삐걱거렸던 련이었지만, 화륜의 말에서 다소 강직하게까지 느껴지는 마음을 알아채곤 그만 웃고 말았다.

냉정한 듯 차가운 듯 말하고 있지만 내용을 가만히 잘 살펴보면 그렇지 않았다.

가족끼리는 어려울 때 서로 어깨를 맞대고 돕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지 않은 저자들은 가족도 아니다, 그러니까 싫다.

화륜의 말이 바로 이것 아닌가.

일전에 가장 이야기를 할 때도 비슷했다. 사람을 믿고 따를 때는 대가를 바라지 않아야 한다, 사랑은 한정 없이 퍼붓듯 주는 것이다…….

화륜은 항상 자신이 좀 더 어른이고 세상의 이치를 꿰고 있다는 듯 굴었다. 그래서 련이 매일 순진하기만 해서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하는데, 가만 보면 그가 훨씬 더 순진한 것 같았다.

세상에 한정 없이 주는 사랑이 어디 있으며 대가 없는 충정이 어디 있겠나.

‘저런 생각이라 마천교랑 엮인 건가 싶어 가끔은 무섭다니까.’

거기다 화륜은 입으론 대가 없는 애정과 헌신을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받은 것을 하나하나 셈해서 갚으려는 인물이라는 것까지 생각하니 더욱 웃음이 나왔다.

“갑자기 왜 웃어요?”

“흐흠. 나한테도 도움이 되니까 한 거야. 내가 이렇게 저렇게 해 보는 게 좋겠다, 하고 알려 줘서 저 애들이 강해지면 나도 좋잖아.”

그리고 행운 지수도 팍팍 오를 것이고.

지금까지의 경험을 반추해 봤을 때 거리나 방식, 혹은 감정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금적걸도 그녀에게 몇 번이나 행운 지수를 안겨 주었고—자신이 금종하에게 써 줬던 복기 문서를 본 것 같은데 대체 몇 번이나 보는 건지 모르겠다—, 이젠 멀리 떠나간 태허진인과 엽운 역시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행운 지수를 올려 주고 있었다.

화륜이 련을 빤히 쳐다보았다. 물가에서 노는 작은 고양이라도 쳐다보는 것처럼 안쓰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한탄하는 것 같기도 한, 어쨌거나 저 앳된 얼굴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 하인은 누이 사촌한테 줘요. 데려올 생각하지 말고요.”

그러다가 갑자기 화제가 바뀌어, 련은 화륜이 뭘 가지고 염려하는지 알아챘다.

세가에 남지도 못해 떠나는 방계들한테도 하나하나 글을 남겨 주는 꼴을 보고 또 동정심이 터져 나와 단목준의 하인까지 거두겠다고 할까 봐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안 해, 안 해. 그 하인은 성아가 거두겠다고 먼저 말하기도 했으니까.”

주인이 시켰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세가의 식구에게 상한 요리를 먹인 사람이라 단목현요는 절대 안 된다고 노발대발했는데 단목성은 요지부동이었다.

웃전이 시켜서 한 일을 가지고 어찌 종을 탓할 것이며, 그가 정의를 지키기 위해 모든 걸 다 잃었으니 자신이 거두어 책임지는 게 당연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단목현요는 얼마나 답답했는지 련에게까지 찾아왔다.

— 네가 어떻게 좀 말려 봐! 성아가 그래도 네 말은 듣잖니!

그런데도 단목성이 기어코 그 하인을 거둘 수 있게 된 건 그들의 실랑이를 보던 련이 조용히 단목현요를 설득해 주었기 때문이다.

— 그 하인은 성아가 자길 구해 주었다고 감사해하는 마음만으로 가득하니까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 그래도…….

— 성아는 스스로의 말에 행동으로 책임을 지고 있는데 꾸중을 하거나 못하게 하면 실망하지 않을까요?

— 위험한 일이 있는 것보다야 실망하는 게 낫지 않니!

단목현요는 완강했으나, 마침내 뜻을 꺾었다.

— 그럼 련아 네가 좀 살펴봐 주렴.

— 네?

— 너희 둘이 어울릴 때면 그 하인이 허튼 맘을 품진 않았는지, 성아를 잘 모시는지 네가 좀 살펴봐 달라고 부탁하는 거야. 이 빚은 꼭 갚으마.

— 물론…… 이죠.

단목현요는 몇 번 더 약속을 강요하고는 련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만족한 채 물러났다.

‘내가 살펴봐서 괜찮다고 하면 그걸로 괜찮은 건가?’

사이가 좋지 않은 조카에게 할 법한 부탁은 아니었지만 련은 거절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 하인의 고민이라고는 ‘어떻게 해야 성아 아기씨를 잘 모실 수 있을까?’밖에 없었고, 다른 마음을 품으면 그 고민도 달라질 테니 알 수 있을 터였다.

“저보다 자질 뛰어난 사람만 거두기로 약속했어요, 누이.”

“이 누이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란다.”

련이 당당하게 말하고는 화륜의 머리를 헤집었다.

화륜은 자신의 머리가 엉망이 되는 대신 련이 그 하인을 책임지지 않기만 한다면 만족한다는 듯 처연한 한숨만 내쉬었다.

* * *

백의명은 진짜로 소년이 자신의 숙소에 나타났을 때, 내내 그를 기다리고 있었으면서도 화들짝 놀랐다.

“오, 오, 오셨습니까…….”

“도망 안 갔네? 그대로 저 멀리 갈 것 같더니.”

“도망가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물론 한번 도망갔다가 되돌아온 것이지만 말하지 않았다. 소년이 짓궂은 미소를 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새 열심히 했나 봐.”

“그, 크흠, 네, 넵. 감사…… 감사합니다.”

“뭘? 널 때려 줘서?”

차마 ‘네’라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백의명은 입술을 뒤틀었다. 소년은 그의 꼴을 보고 소리 내 웃더니, 그가 다과와 함께 놔둔 젓가락을 손에 쥐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볍게 손을 움직여 팔다리를 툭툭 치는데 자신이 마치 갈대가 된 것처럼 이리저리 움직였다.

“뭐, 뭔가 알려 주실 거라도 있으신…… 지요?”

“내가 네 스승도 아닌데 알려 주긴 뭘 알려 줘? 그보다 할 일이 있으니까 따라 와.”

소년은 그렇게 말하곤 창문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백의명도 허둥지둥 소년을 따라 뛰어내렸는데, 소년이 한 것과는 달리 둔탁한 착지음이 들렸다. 백의명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움직이기 전에 숨을 들이켜고 그 기운을 몸 안으로 돌리면서 움직여야지.”

“아니, 조금 전에는 갑자기 창밖으로 가시니까요.”

“갑자기 칼 들어오면 갑자기 들어왔다고 그냥 맞고 죽든가, 그럼.”

“왜 자꾸 죽으라고 하세요…….”

“알려 줘도 이래서 못하고 저래서 못하고 변명이나 하는데 그럼 살아서 뭐 해?”

“……!”

순간 백의명의 눈이 번쩍 뜨였다. 무심코 둘러대기만 했는데 잘 생각해 보니 소년이 나름대로 요령을 알려 준 것이었다.

노고수의 경험은 천금을 주어도 얻을 수 없는 것인데!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새겨듣습니다. 네, 움직이기 전에 숨을 들이켜고, 네!”

“조용히 좀 하고.”

“넵…….”

그 뒤로는 잠자코 소년의 뒤를 따라가기만 했는데, 환벽루 근처를 꿰뚫고 있는 그도 잘 모르는 길로 가더니 어느 오래된 장원의 담벼락으로 보이는 곳까지 도착했다.

‘이 낡은 담은 어디서 한번 본 것 같은데…….’

“조금 있으면 누구 하나 나올 텐데, 네가 따라가 봐.”

“네?”

“따라가서 이상한 짓을 꾸미진 않는지 뭔가 엉뚱한 계획을 세우진 않는지 지켜보라고.”

“제, 제가요?”

“응.”

소년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백의명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곤 말했다.

“저 사실은 은신술은 배운 적이 없어서요……. 무리가 아닐까요?”

소년은 약간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너 그 정도로 멍청했어?”

“그건 내공의 영향을 받는 거잖습니까! 저는…… 지금까진 내공이 없었으니까요.”

“그렇다고 외공을 그렇게 쌓을 동안……. 하아, 됐다. 잘 봐.”

“네?”

여기서, 갑자기, 지금요?

백의명이 눈을 휘둥그레 뜨는데 소년은 기다리지도 않고 그대로 몸을 움직였다. 딱 한 걸음 옆으로 갔는데 순간 시야에서 사라졌다.

“어, 어딜…….”

“여기.”

“……!”

그러곤 백의명의 뒤에서 나타났다. 백의명은 거의 비명을 지를 뻔했다.

“봤어?”

‘사람이 없어지는 걸 어떻게 봅니까.’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백의명은 변명 없이 고개만 세차게 끄덕였다.

소년이 피식 웃고는 입을 열었다.

“잘 들어. 가장 핵심 이치는 물아일체(物我一體)다. 나를 의식하지 않고 주위를 받아들이는 것. 자신을 스스로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내가 이만큼이나 해낸 사람이라는 생각도 하지 말고. 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야.”

갑자기 맹비난을 듣게 되었지만, 백의명은 이제 소년이 무슨 말을 하든 새겨듣기로 마음먹은 차였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길을 갈 때, 그 길에서 네가 디디지 않은 부분을 생각해. 술을 마실 때 그 잔에서 네 입이 닿지 않는 부분을 생각해 봐라.”

“네, 넵.”

“몸을 감춘다는 건 그런 게 된다는 거야. 하지만 쓰이지 않는다고 필요하지 않은 게 아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야. 자, 이제 은신술이 뭔지 알겠지?”

“네?”

그러나 따져 물을 새도 없이, 담벼락 끝의 후문이 열리며 담벼락 무사들이 뭔가를 팽개치듯 밖으로 떠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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