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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84)화 (84/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84화

“으흑, 흐흐흑, 흑…….”

이제 열몇 살은 된 것 같은 남자아이가 억울한지 닫힌 문을 두드리다가, 옆에 남은 하인의 거친 손에 떠밀려 담에서 멀어졌다.

“이제 돌아가시죠. 지체할 시간 없습니다.”

“으흑…… 흑…… 내가, 내가 꼭…….”

눈물과 독기 어린 눈으로 하인을 쏘아보던 소년이 팩 고개를 수그렸다.

“댁까지 데려다주는 것도 어르신들의 호의인 걸 아시겠지요. 혼자 돌아가시려고 하십니까?”

하인이 차갑게 말했다. 소년은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차마 혼자 가겠다고는 말하지 못했다. 하인이 먼저 성큼성큼 앞서가자 소년이 화들짝 놀라 그 뒤를 따라갔다.

저 애를 따라가라는 거냐고 물어보려고 했던 백의명은 소년의 눈길이 전에 없이 차가워서 놀랐다.

‘뭐야? 날 보시는 눈은 온기 넘치는 거였나?’

“따라가서 쓸데없는 짓 안 하는지 확인해.”

“그…… 쓸데없는 짓이라고 하심은…….”

“암살 모의나 그런 거 말이야.”

“예에?”

암살?

너무 험악한 단어가 나와서 백의명은 어깨를 흠칫 떨었다.

저 애가 뭔가 벌을 받은 것 같긴 했지만, 저 나이 대 원한이라고 해도 암살까지 기도할 일은 없지 않나?

“세가에 대해서 억하심정 품고 무슨 소문을 내거나 그런 것도 포함.”

세가라는 말에도 흠칫 놀랐다. 그렇다고 여기서 ‘무슨 세가요?’라고는 묻지 못해서 다른 걸 질문했다.

“그, 근데 그렇다고 하면…… 그런 일을 하는 걸 보면 어떻…… 어떻게 하면 됩니까?”

“뭘 어떻게 해? 처…….”

거기까지 말하던 소년이 불현듯 입을 다물고는 짜증스럽게 자신의 머리를 헤집었다.

“에이…… 만두만 갚으려고 했던 건데 뭔 일이 이렇게까지 되어서는.”

소년은 툴툴거리곤 한숨을 푹 내쉬고 말했다.

“뭐 그런다 싶으면 날 찾아와. 여기 와서 우화륜이라는 애를 잠깐 보자고 하면 될 거야.”

“그, 그래도 됩니까?”

“그래. 별다른 일 없으면 보고할 거 없고.”

‘보고를 하러 오지 않으면 다신 안 와 주시나? 그럼 더는 아무것도 못 배우나?’

백의명은 약간 초조해진 얼굴로 멀어지고 있는 아이와 하인 쪽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을 기도하길 바라야 하나?’

“안 가고 뭐 해?”

“가, 갑니다! 네! 갑니다!”

백의명은 소년에게 꾸벅 절을 하고는 황급히 저쪽을 따라갔다.

소년, 화륜이 혀를 차며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담벼락의 뒷문 안으로 들어섰다.

“륜아, 나갔다 왔니? 아기씨가 찾으신다. 상을 주시려고 뭔가 직접 준비하셨다는 것 같은데? 네가 이번에 크게 공을 세우지 않았니.”

문지기가 화륜을 보고는 반가워하며 말을 붙였다. 화륜은 그 얘길 듣자마자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여 주곤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아무도 듣지 못할 탄식을 흘렸다.

“밤새 약당에서 약 달이고 서신 쓰고 난리였으면서 또 뭘 준비를 했다고, 어휴…… 못살아, 정말.”

* * *

합격자 발표가 나고 오후 내내 북적거렸던 세가 분위기도 해가 저물며 간신히 진정되었다.

방계 아이들의 거처는 연무장 앞에 세워진 영인사(英仁舍)로 정해졌다. 처음부터 제자들 육성을 위해 마련해놓은 공간으로, 연무장과 작은 서고, 그리고 숙소 건물이 함께 붙어 있었다.

이것저것 많이 가져온 아이들도 있었고 몸만 덩그러니 온 아이들도 있었다.

그 몸만 덩그러니 온 사람 중 하나인 서극림은 따뜻한 물로 씻고, 부드러운 죽으로 저녁을 먹은 뒤에 왠지 몽롱한 얼굴로 영인사의 숙소 뒤쪽 정원을 거니는 중이었다.

‘내가…… 남다니.’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단목세가에서 청간이 왔을 때, 부모님들은 놀라서 얼떨떨해했고 자신은 사실 큰 생각이 없었다.

외할머니에게 틈틈이 무공을 배워 익히곤 있었지만 그다지 재능이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여기까지 온 건 외할머니의 강권 때문이다.

— 림아, 태상가주께서 깨달음을 얻으셨다지 않으냐. 이건 큰 기회다.

아버지는 기왕 이렇게 된 거 항주 구경이나 하고 오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다. 서극림도 그러겠다고 했다. 진지했던 건 외할머니뿐이었다.

그에게 누차 재능이 있다며 잘할 수 있을 거라 했다. 단목준과 함께 떠나는 날 울었던 것도 외할머니뿐이었다.

외할머니는 마치 지금 떠나면 십 년은 지나야 다시 볼 수 있을 것처럼 기쁨과 서운함이 어우러진 눈빛으로 그를 배웅했었다.

‘할머니께 편지 써야겠다…….’

세가에서는 가족에게 소식을 전하겠다고 했지만, 외할머니께 보내는 서신은 꼭 자신이 쓰고 싶었다.

“응? 극림?”

“아, 아기씨!?”

이제 들어가서 서신을 쓰고 자야지,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뒤에서 금목서 향기가 확 풍기더니 한 소녀가 나타났다. 단목련이었다.

“여긴,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항상 어른스럽고 차분하다는 평을 듣는 서극림이었으나 어째서인지 지금은 진정하지 못하고 더듬더듬 말했다.

서극림은 지금 자신의 옷차림이 어떤지를 짚어 보다가 허리끈을 아무렇게나 여민 걸 알아채곤 작게 좌절했다.

“이제 다들 짐도 풀었을 것 같아서, 오늘 시험 해답지를 전해 주려고.”

“네?”

해답지라는 말에 서극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그보다 조금 작은 소녀가 방긋 미소 짓고 있었다.

“그보다 오늘 많이 고생했는데 나와 있어도 돼? 몸은 괜찮아?”

“괜차, 찮습니다! 염려해 주신 덕분입니다. 아니었으면 지금쯤 고향으로 돌아가는 마차를 타고 있었을 텐데…….”

서극림은 련이 자신의 손목을 잡아 주던 그 순간을 지나칠 만큼 선명하게 기억했다.

딱 한 번, 단목준의 집에 있는 연못에서 잉어를 본 적이 있었다. 하얀 몸에 붉은 무늬가 인상적인 예쁜 잉어가 그 연못 안을 부드럽게 헤엄치는 것 같이 유려한 손길이었다.

손이 잡힌 그 순간부터 배 속의 울렁거림, 구역질, 어지러움이 찬물에 씻겨나간 게 우연일 리 없었다.

“그렇게 생각해?”

“네?”

“여기 남은 게 내 덕분인 것 같으니?”

은근한 물음에 서극림은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가에 남아서 무공을 수련할 기회 같은 건 그다지 바라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걸 마지막에야 알았다.

쓰린 위를 붙잡고 구역질하는 자신을 쳐다보는 단목준의 눈길을 느끼면서, 그때야 처음으로.

그러지 않고서야 비틀거리면서도, 늦은 줄 알았으면서도 그렇게 연무장까지 달려갔을 리가 없으니까.

그에게는 그 기회를, 마지막 동아줄을 잡아 준 게 단목련이다.

지금 당장은 할 줄 아는 것도, 가진 것도 없어서 아무것도 보은할 수 없지만, 단목련이 바라는 게 있다면 최선을 다해 볼 생각이었다.

“그럼 열심히 해야 한다. 알았지?”

“네?”

“극림은 큰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야. 열심히만 하면. 밥도 많이 먹고 잠도 잘 자고.”

“아, 네!”

‘그것…… 뿐인가?’

서극림은 조금 당황했다.

단목준이 그에게 낡은 옷을 주었을 때, 서극림은 단목준네 곡식을 날라 주고, 밭의 거름도 뿌려 주고, 나중에 추수할 때 일을 거들어 주기도 해야 했었다.

“다들 쉬고 있나 보다.”

단목련은 영인사 건물을 한번 훑어보고는, 호위가 들고 온 바구니를 받아 그에게 내밀었다.

“내가 좀 더 일찍 올걸 그랬네. 이따가 이거 이름 적힌 대로 나눠 줄 수 있을까? 괜히 지금 가면 불편하게만 할 것 같아서.”

“네! 명을…… 명을 받듭니다.”

“뭐? 그럴 것까지는 아니야.”

단목련이 손을 내저었지만 서극림은 바구니를 소중히 품에 안았다.

그런 그를 보고 단목련은 내일부터 힘내라며 응원의 말을 해 주고는 등을 돌렸다. 곁에 서 있던 하인이 단목련을 향해 조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가서 빨리 주무세요. 밤새 저걸 쓰느라…… 그냥 저한테 줘서 전달하면 됐을걸.”

“그래도 이제 한식구가 됐는데 얼굴 한 번 더 보면 좋지.”

“그래도 그렇지, 저걸 다 쓰곤 새벽부터 약당도 왔다 갔다 했잖…….”

그 뒤로는 더 이상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서극림은 서신이 열 통 담긴 바구니를 안은 채 가만히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단목련이 뒤돌아보곤 손을 흔드는 통에 황급히 몸을 숙였다.

그러면서 그 둘의 대화를 곱씹었다.

이번에 단목준이 벌인 일로 탈이 난 사람들이 더 있다더니 단목련이 약당에 붙어서 약 만드는 일을 도운 것 같았다.

그러셨구나. 서극림은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라 직감으로 납득했다.

그러면서 단목련의 마지막 말을 곱씹었다.

— 이제 한식구가 됐는데.

같은 식구가 되었구나, 그렇게 입 안에서 말을 곱씹자 그제야 몽롱하던 것이 모두 가시고 가을밤의 찬 공기가 느껴졌다.

* * *

다들 들뜨고 흥분해서 아무도 잠들지 않았기 때문에, 서극림은 단목련이 떠나자마자 아이들을 불러 모아 단목련이 준 서신을 나누어 주었다.

“이, 이게 뭐야……?”

자신의 이름이 적힌 서신을 쥔 단목완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련 아기씨가 주고 가셨어. 해답지라고 했는데 나도 뭔지 모르겠다. 자, 여기. 각자 자기 거 찾아가.”

“아기씨 왔다 가셨어……?”

“응, 조금 전에. 방해하기 싫다고 그냥 이것만 전해 주고 가셨어.”

“그렇구나…….”

단목완이 조금 아쉬운 목소리로 수긍하고는, 서신을 들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마지막으로 다소 험악한 인상의 소년, 매신유가 서신을 홱 낚아채곤 그자리에서 그 서신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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