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85화
“…….”
“…….”
원체 살벌한 인상인데 찌푸리기까지 하고 있으니 말을 붙이기도 저어되어, 서극림은 약간 망설이듯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데 위에서 아래로 서신을 쭉 훑어본 매신유가 불쑥 말했다.
“너는 안 봐?”
“아…… 돌아가서 보려고 했는데.”
“네 것도 좀 보자.”
“뭐? 왜?”
매신유가 갑자기 자신의 것을 노리자, 서극림이 방어적으로 반응했다. 저도 모르게 서신을 움켜쥐었다가 종이가 구겨져서 흠칫했다.
“내 것도 보여 줄게.”
“아니, 난 네 건 별로…….”
별로 안 궁금하다고 딱 잘라 말하려고 했는데 문득 마음속 깊은 곳이 작게 일렁였다.
단목련이 매신유에게는 뭐라고 했을까? 또 자신에게는 뭐라고 했고?
“일단 나도 내 걸 읽어 보고.”
“빨리 열어 봐.”
“알았어…….”
서극림은 불만을 살짝 담아 매신유를 바라보곤 서신을 펼쳤다.
— 서극림.
— 오른발을 쓸 때 바깥쪽을 강하게 디디는 경향 주의. 왼발 부상 치료에 신경 쓸 것.
서극림은 거기까지 보고 놀라서 자신의 왼쪽 발을 내려다보았다.
예전에 한 번, 날카롭게 깨진 자기를 잘못 밟아서 크게 다친 적이 있었다. 꽤 오래 절뚝거렸지만 지금은 다 나았다고 생각했는데…….
— 검을 휘두를 때 왼쪽을 흘끗거리는 버릇. 이제 눈치 보지 말고 상대에게만 집중할 것.
— 별이 지상에 떨어질 때는 거리낌이 없고 모든 것을 부순다.
— 장점 : 양쪽 어깨가 좋아서 박투술의 성취도 기대된다. 순발력이 좋고 응용력이 뛰어나니 기초 훈련을 좀 더 열심히 하면 좋은 성과가 있을 것.
편지 같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훨씬 딱딱하고 사무적인 어조로 항목이 나열되어 있었다.
“어…….”
“바꿔 보자니까.”
뭐라고 할 새도 없이 매신유가 서극림의 서신을 낚아챘다. 그와 동시에 매신유가 자신의 서신을 그에게 불쑥 내밀었다.
두 소년은 말없이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잠시간 조용했다가 매신유가 물었다.
“……너 왼쪽 발 다쳤어?”
“어, 어어. 옛날에…… 넌 허리?”
“어, 나도 옛날에.”
“…….”
“…….”
침묵 끝에 서신을 다 읽은 매신유가 서극림에게 돌려주었다. 서극림 역시 그의 것을 돌려주었다.
매신유는 서신을 펼칠 때 동작이 격했던 것에 반해, 챙겨 넣을 때는 다소 조심스러웠다.
“그럼 난 간다. 내일 보자.”
매신유가 인사 한마디 없이 쌩하니 들어갈 줄 알았는데, 그래도 서극림에게 밤 인사를 한 줄 남기곤 등을 돌렸다.
“어…… 그래…….”
서극림은 이미 매신유가 떠나고 없는 허공에 인사를 흐트러뜨리곤, 서신에 적혀 있던 말을 곱씹으며 거처로 돌아갔다.
* * *
아이들에게는 일주일 정도의 적응할 시간이 주어졌다.
그리고 이제 서로가 서로의 이름을 모두 외우고, 그중에는 또 더 친하고 덜 친한 아이들도 생겼을 때 수련이 시작되었다.
“서극림!”
“네!”
“단목완!”
“네!”
“단목규!”
“넵!”
그 뒤로 일곱 명의 이름이 더 호명되었다. 공소옥, 단목풍, 단목권, 단목반, 여선훤, 단목해, 매신유.
그들 앞에 서서 이름을 호명한 단목현우는 조금 어색한 표정이긴 했지만 곁에 나란히 선 련을 한번 내려다보곤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우리는 서로가 가족이고 벗이라, 어려움을 직면하면 함께 맞서 싸우고 즐거움을 마주하면 다른 사람들까지 불러 모아 함께 기뻐할 것이다.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네!”
열 명의 소년 소녀가 우렁차게 외쳤다. 단목현우는 어색함을 티 내지 않기 위해 뒤통수를 쓸어내리고는 덧붙였다.
“이번 주는 기초만 단련하고, 다음 주부터는 오전 수련에 단목련도 함께한다. 질문 있는 사람?”
순식간에 웅성거림이 퍼져 나갔다. 직계가 그들과 함께 수련할 줄은 상상도 못한 듯했다.
단목현우가 양손을 딱딱 마주쳐 분위기를 환기하고는 외쳤다.
“자, 그럼 몸 풀고 달리기부터!”
“네!”
“네!”
수련 과정은 대대로 단목세가의 교두들이 만들어 둔 것이 있었는데, 련과 단목현우는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과정을 조금씩 손보았다.
항주에 갓 도착한 방계 아이들은 영양 상태가 각양각색이라, 고된 수련을 하기에 앞서 잘 챙겨 먹이고 재워서 그릇을 키우는 일부터 집중하고 몸의 기능을 익힐 수 있는 여러 가지 동작을 준비해서 지루하지 않게 꾸미는 등이었다.
그리고 아이들과 오전 수업을 함께하겠다는 건 련의 생각이었다. 단목천기는 다소 서운해했지만, 련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는 걸 받아들였다.
— 오후에는 할아버지한테 수업을 듣고, 낮에는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아이들이 잘하는지 바로 옆에서 보고 저도 자극받고 그러면 좋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교두 입장인 단목현우가 바라보는 것과는 다른 시선으로 아이들을 발전시킬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이야기였다.
련의 안목을 알고 있는 단목천기는 두말 않고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이 열심히 달리는 걸 흐뭇하게 보던 련은 시간을 확인하곤 그사이에 준비해 온 것을 꺼내 놓았다.
‘식이 조절 없이 몸을 키울 수 있을 리가 없다!’
하물며 몇몇은 태어날 때부터 고되고 가난한 환경 속에 살아왔다. 어릴 때 잘 보양해 주지 않으면 나이가 차서도 고생하는 법이었다. 그러다 다치기라도 하면 10년 불공이 무너지는 셈이다.
아이들은 단목현우의 동작을 따라 하면서도 곁에서 뭔가 부산히 준비하는 련을 보며 의아한 듯 흘끗거렸다.
마침내 연무장 달리기까지 마치고 헉헉거릴 때, 련은 아이들에게 미지근한 물과 함께 준비한 경단을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이…… 이게 뭔가요……?”
동그랗게 생겨서 모두가 ‘혹시 영단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지만, 당과처럼 달콤한 냄새가 나서 곧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게다가 잘 보면 그 정체를 알아볼 만했다. 익힌 곡물 같은 걸 바삭하게 튀겨서 뭉쳐 놓은 것이다.
“단목세가 특제…….”
뭔가 당당하게 외치려고 했던 련이 황급히 단목현우를 쳐다보았다. 생각해 보니 아직 이름을 정하지 않았다.
“특제…….”
“트, 특제 흑곡단이다!”
단목현우의 눈동자가 바쁘게 팽팽 돌아가더라니 잽싸게 답을 내놓았다.
흑석초를 비롯한 약초 몇 가지와 곡물로 만든 것이니 나름대로 적절한 이름이었다. 련은 단목현우에게 감사의 눈빛을 보내곤 얼른 말했다.
“특제 흑곡단이란다. 갖은 약초와 곡물을 배합해서 몸에 좋게 만든 건데, 이제 일주일에 한 번씩 이걸 먹을 거야.”
아이들은 흑곡단이라는 말을 처음 들어 봤으면서도 거기서 뭐냐고 묻지는 않고 약간 감격한 듯이 웅성거렸다.
“좋은 게 많이 들어갔지만 너무 자주 먹어도 몸에 좋지 않아서 일주일에 한 번씩만 주는 거야. 이거 먹고 힘내서 모두 천하제일인이 되는 거다!”
“네!”
천하제일인,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꿈꾸는 이름에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련이 내미는 흑곡단을 나눠 받았다.
“감사합니다, 아기씨!”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맛이 이상해도 꼭꼭 씹어 먹어야 해.”
그리고 열 명의 아이들이 다 나눠 가졌을 때, 련이 다소 걱정을 담아 말했다.
이 흑곡단을 처음 만들고 나서 시식회를 가졌었는데 그때 화륜이 지었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 기껏 뽑아 놓고 애들 다 죽이려고 이래요……?
당연히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그 뒤로도 시제품을 몇 바구니 더 만들었지만 묘하게 시원한 박하 맛과 신맛, 그리고 쓴맛이 엉겨 붙은 달콤한 곡물 경단의 맛을 이 이상 개선할 수 없었다.
‘영기를 안 넣고 만들면 그나마…… 그나마 조금 먹을 만하긴 했는데.’
조화와 정화를 끝까지 당겨 써서 만들어 낸 유소년기 전용 영단이었다.
기력의 균형을 보완하는 성질이 있는 흑석초를 함께 배합하고, 콩과 곡물을 엿과 섞어서 단맛과 식감을 보완한 것까지는 괜찮았다.
특히 주방의 전 씨가 만든 시제품은 간식으로 팔아도 될 정도라는 호평을 들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영기만 들어가면 맛이 변했다. 그렇다고 영기가 안 들어가면 무슨 소용인가.
‘얘들아, 어쩔 수 없다. 참고 먹으렴. 다 너희 좋으라고 하는 거야.’
련이 애잔한 눈빛으로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에 속아서 한입 깨물었던 아이들의 표정이 기기괴괴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감히 련의 바로 앞에서 뱉는 사람은 없었다. 반만 씹고 나머지는 꿀꺽 삼킨 단목완이 조심스럽게 련에게 다가왔다.
“챙겨 주셔서, 저어, 감사…… 감사해요.”
‘이거 너무 맛없어서 우는 거 아니지?’
단목완의 눈가가 약간 젖어 있었는데, 경단 하나에 정말로 감복했기 때문은 아닐 것 같았다. 련은 괜히 더 미안해져서 변명하듯 덧붙였다.
“진짜 몸에 좋은 것만 넣어서 만들었어…….”
정말이야…….
* * *
‘괜히 같이 듣겠다고 한 건 아닐까.’
“자, 단목련! 시범!”
“아니, 숙부…….”
“어허. 교두님이라고 해야지.”
“교두님…….”
단목현우는…… 물이 올랐다.
이 말로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었다.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웃는 얼굴에 영웅건까지 이마에 두르고서는, 아이들에게 초식을 가르치면서 교두님 소리 듣는 게 그렇게 즐겁고 좋은 모양이었다.